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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조력자' 또는 '프락치'가 된 형에게

내란음모 재판 증인 출석 앞둔 이아무개씨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2013.11.20 16:15 수정|2013.11.21 17:21

▲ ‘국정원 내란음모정치공작 공안탄압규탄 대책위원회'는 9월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음모죄 혐의 등은 “국정원의 정치공작이고, 박근혜 정부식 매카시즘의 초입에 있는 사건”이라며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공작의 진상을 규명하는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고 선언했다. ⓒ 진보정치 박경철


형. 여름 지나고 가을도 지났다. 그리고 겨울이 왔어. 8월이었지. 소위 내란음모라는 이름이 붙은 그 사건이 세상을 화들짝 놀라게 했던 것이. 사건이 터지고 형이 하던 당구장 문이 굳게 닫혀 있더라는, 설마 했던 의심들이 구체적인 사실로 드러났지. 수많은 추측들이 사람들 발밑을 굴러 다녔어. 형과 가까웠던 이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압수수색을 당했고, 그리고 범죄사실의 주요한 인물로 등장했지. 그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나는 계속 그게 묻고 싶었어. "형, 괜찮은 거야?"

그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많은 이들에게 형은 '죽일 놈'이 되었어. 그래서 형이 괜찮아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지 묻고 싶었어. 사건이 국정원에서 검찰로, 다시 법원으로, 기소되고 재판이 열린다고 할 때, 변호사들에게 물었지. "혹시 형이 증인으로 출석하느냐"고.

출석하지 않겠느냐는 대답들을 하더군. 그때마다 그랬어. 내가 알던 형은 그렇게 마음이 모질거나 단단한 사람이 아닐 텐데… 증인으로 나온다면, 피고인들도 힘든 일이겠지만 본인한테 너무 괴로운 일일 것이라고. 그런 일은 피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오늘에야 듣게 되었어. 목요일부터 증인으로 법정에 선다는 것을.

불행의 불씨는 언제부터 피어오르는 것일까…. 우리는 예정할 수 없는 인생을 항해하지만 때로 감당할 수 없는 가혹한 바람이 불 때, 피할 수는 없을까. 형을 아는 누군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어. 세상이 모두 감옥으로 바뀌어버린 사람에게 탈출구가 필요할 테니까. 지금, 형이 있는 곳이 어디라도, 설령 이민을 간다는 어디라도 말이지. 그래서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내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해.

사람들은 의외로 쉽게들 말해. 사건이 터진 것이라고. 어떤 사건. 이번도 그랬지. '내란음모 사건이 터졌어'라고.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고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한다면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지. 우리는 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에 주목하지 못하는 시선을 갖게 된 것일까.

형과 함께 보낸 세월이 깨진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나치가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언어 규칙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이 언어 규칙이란 것은 학살이나 유대인 이송과 같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우회적 표현법을 만들어 대신 사용한 것을 말하는데, 예컨대 학살은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 취급 등으로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다는 것이야.

마치 우리 사회에 '내란음모', '종북', '빨갱이' 같은 언어가 사용되면서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이 마비돼버린 것처럼. 결국 사람들은 정작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여론 재판대에 먼저 올라, 심판을 받았지. 이미 빨갱이가 되어서 자신들이 살던 마을과 공동체, 직장에서부터 쫓겨나게 되었지. 사건의 진위 여부가 판가름 나기 전에 이미 정상적인 절차나 합리적인 판단이 실종된 곳에서.

그 속에 그들의 가족이 있고 가해자, 조력자, 혹은 프락치라고 불리게 된 형도 있지. 소위 '공안탄압'이라고 불리는 비인격적 언어 뒤에 사람들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하고 싶었어. 간첩이 산다는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이 된 가족들은 치료를 거부당하기도 했대. 진보당 당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입길에 올랐고 당신도 RO 조직원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지.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형과 구속된 한동근 형,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집안의 대소사를 같이 나눴던 사람들과의 세월이 깨진 것은 어떻게 할까. 인간의 얼굴을 한, 역사는 모두 어떤 말들로 설명될 수 있을까. 형이 무슨 이유로 지금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고, 국정원이 밝힌 대로 "운동권으로 20여년 살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는 전화가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피치 못할 일이라는 것은 늘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던 누군가의 말처럼, 막다른 골목까지 형이 내몰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한국사회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국정원이라는 곳이 운동권으로 20여년을 살았던 사람이 새로운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그런 의미에서 국정원의 등장은 끔찍했어. 모든 관계의 파국에 국정원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몸서리쳐지더군. 어떤 사람도 어떠한 정치적 목적으로도 존엄성을 파괴당해서는 안 되는 걸, 그들은 잊고 있는 듯 보이니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모두 괜찮았으면 좋겠어

"박 대통령 후보 시절엔 사과한다더니..."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고문·조작된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법살인'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10월 24일 오전 청와대 부근 청운효자동주민센터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 취하'를 요구했다. ⓒ 권우성


1972년 박근혜 대통령 아버지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고 국민적 반대에 직면한 뒤, 1974년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지. 고 김용원씨의 아내 유승옥씨는 "내 남편은 간첩입니다"라는 거짓 자백의 글을 쓰고 쥐약을 먹으려고 했어.

그걸 발견한 친정어머니 때문에 살게 되었지만 충격으로 어머니는 한 달 뒤에 생을 마감하셨다지. 고 하재완씨의 아내 이영교씨는 동네 아이들이 막내 아이 목에 새끼줄을 묶고 총살 놀이를 하는 걸 봤대. 빨갱이 자식이라고 놀리면서, 그걸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래.

세월이 흘러 재심이 받아들여졌고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판명이 되었지만, 돌아올 수 없는 죽은 사람들과 보상받을 수 없는 삶을 산 사람들의 인생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법적으로 어떤 판결을 받게 되더라도, 짓밟힌 상처는 그대로 남겠지. 역사는 되풀이 되지 말라고 우리한테 교훈을 남기고 있을 텐데, 더 큰 상처가 될 일이 형에게도 누구에게도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국제사회도 한국사회의 자유권이 심각하게 후퇴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 비밀정보기관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주요한 정치사안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니까 말할 것도 없겠지. 인권 사안이 여기저기서 많이 터지다 보니 몸은 지치고 마음은 피로해서 얼마 전부터 심리학 책을 읽고 있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부터 위로하고 싶었거든.

책을 보면서 지금 한국사회는 자신 안의 그림자를 타자에게 투사하면서 살고 있구나, 싶더라. 그것이 북한이든, 무엇이든. 번지수 찾을 수 없는 증오의 대상을 물색하고 그를 통해 분노, 시기, 갈 곳 없는 감정을 쏟아붓는 것은 아닐까.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 함께 불행하게 되는 중이고.

로버트 존슨이라는 융심리학자는 "인간 역사의 어두운 장은 타인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전가할 때 펼쳐진다. 남자가 여자에게, 백인이 흑인에게, 가톨릭이 개신교에게,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게, 무슬림이 힌두에게 그림자를 투사한다. 이웃 간에도 이런 일은 일어난다. 한 가족을 희생양으로 택하여 마을 전체의 그림자를 그 가족에게 짊어지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책에 썼어. 형,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림자를 투사하면서 스스로를 위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일지도 몰라. 어설프게도, 그래서 나는 서로의 나약함을 인정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졌어.

어떠한 만남으로 다시 보게 될지 알 수 없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같은 시대에 발을 디디면서. 형,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었어. 고통이 무엇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누구라도 형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을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모두 괜찮았으면 좋겠어.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내란음모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인 소위 국정원 조력자 이아무개씨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글은 수원지역에서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했고, 수원반전평화연대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일하며 친분을 쌓은 다산인권센터 박진 상임활동가가 21·22·25일 내란음모 혐의사건 재판 증인으로 출석하는 그가 읽기를 바라면서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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