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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자전거 그리고 일본 5] 훗카이도 다테에서 함께한 만찬

등록|2013.11.21 11:57 수정|2013.11.21 11:57

훗카이도에 찾아온 밤눈 내리는 겨울 밤의 은은한 풍경 ⓒ 문종성


사토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학교를 파하고 오니 동네 사람들이 분주하게 드나드는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큰 방에는 근엄한 표정의 아버지 사진이 놓여 있었고, 어머니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한 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이 오지 않을 거라 내심 불안하게 믿어왔었다. 하지만 푹푹 더위가 찌던 그해 여름, 사토는 눈치만으로도 더 이상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알아챘다. 동시에 거침없는 얄개 시대를 보내던 그의 사춘기는 순식간에 삶의 좌표를 잃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병을 앓고 계시긴 했지만 기약 없이 떠날 줄은 몰랐어. 집에 와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더군.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분이었지. 그후 어머니는 작은 아버지와 재혼하셨어. 아버지의 빈자리가 정말 컸나봐. 나는 그때부터 몹시 우울한 사춘기를 보냈거든. 난 정말 외톨이였어, 내가 기댈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어. 친한 친구 하나 없는 내 삶은 그냥 공허한 어둠 그 자체였으니깐."

사토의 아버지는 신사를 관리하는 스님이었다. 안빈낙도의 삶을 살던 그의 가족이 가장 많이 웃던 때가 있었다. 베리를 먹는 날이었다. 베리를 손에 올려놓고 한 입에 털어 먹을 때 그 오물오물 거리는 새콤한 식감은 사토에겐 큰 행복이었다. 입속에서 탁 터지는 베리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 그의 막연한 꿈은 농부였다. 농부가 되면 맛있는 베리를 평생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희미했던 꿈이 어느 날 갑자기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방황에 시달리던 그는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22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베리지만 보다 전문적으로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본으로 돌아오면 베리 농장을 경영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의심할 필요 없는 그의 열망이었다. 그렇게 발을 내딛은 시카고에서 한창 학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에게 여태껏 삶에 있어서 고려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을 때 뭣도 모르고 친구 따라 교회를 나간 적이 있었어. 그때 다른 건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자꾸 그들이 돕던 아프리카 아이들이 잔상에 남는 거야. 70년대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황폐 그 자체였거든. 무력한 대기근이 지속됐지. 그날부터 내 고민이 시작됐어.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혼자 감당할 수가 없겠더라고. 학업을 마치고 난 뒤 일본에 돌아와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 문제를 공론화했지. 결국 몇몇 주민들이 뜻을 한데 모아 극심한 재난을 겪고 있는 에티오피아를 돕기로 한 거야.

어떻게 됐느냐고? 무려 15년 동안 나눔의 손길이 끊어지지 않았어. 감사한 건 그후로 내 삶이 훨씬 능동적이면서 더 열성적이 됐다는 사실이지. 미국에 다녀온 뒤 내가 많이 변했어.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꿈을 공유한다는 것, 에티오피아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된다는 사실이 삶의 활력을 만들어 내는 동기가 된 거야. 지금도 우리는 매달 후쿠시마 원전 피해자 가족 등을 포함해 일본 내 소외된 계층을 돕고 있어. 그들 모두가 나에게는 선물 같은 존재들이야. 덕분에 얼마나 행복한지! 베리보다 더 달콤한 인생 아니겠나?"

저녁 메인 메뉴에피타이저로 연어 샐러드가, 저녁 메인 메뉴로는 소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다. 다츠 상이 직접 요리했다. ⓒ 문종성


생일다음 날이 다츠 상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그의 61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 문종성


사토상의 이야기를 듣던 다츠 상과 나는 감동의 또 다른 표현으로 잠시 침묵을 택했다. 훈기가 도는 테이블 위에서 우라베 상이 말을 넘겨받았다.

"내 딸 토키미가 지난해에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인도 여행을 갔었지. 그런데 여행지는 가지 않고 마더 테레사의 집을 다녀왔더라고. 내내 콜카타에 머물면서 봉사를 했다더군. 그러더니 다녀와서는 '아빠, 나 간호사 될 거예요!'라는 거야. 그곳의 열악한 상황들을 보고 나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꿈을 찾은 거지. 내년에 대학 입시를 치르는데 간호학과에 지망할 거래. 솔직한 심정으로는 훗카이도에 있는 병원에 취업해 일하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콜카타 인상이 깊었던 것 같아. 간호사가 되면 어디가 됐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몇 년은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딸의 선택이니 아버지로서 존중해줘야지."

따뜻하다활짝 웃는 얼굴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다츠 상(맨 오른쪽)에 집에 초대받았다. 그의 부인과 기타를 들고 있는 우라베 상. ⓒ 문종성


모임을 주선한 집주인 다츠는 기업 컨설팅 전문가다.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닌 베테랑이다. 그는 유치원 때부터 줄곧 우등생 인생을 살아왔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가 탄탄대로의 인생을 살아왔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인생을 사는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은 있었다.

"젊었을 때는 일에 대한 열정이 지나치다보니 가정에는 소홀했던 것 같아. 그거 알아? 회사 분쟁은 중재해도 가정의 트러블은 그리 쉽게 중재하지 못해. 농담 한마디 하자면 경영 위기를 겪고 있는 회사를 살리는 일보다 여자 마음 달래는 게 더 어려워.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지. 해결하려고 덤비는 것이 현명한 게 아니라 그 사람 편에서 이해하는 것이 지혜라는 걸. 티타임을 가지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행복을 이제야 알았다니깐. 나에게 가정이라는 선물이 없었다면 난 아마 이런 여유도 없이 일중독의 피폐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몰라. 봐봐, 내가 구운 소고기 스테이크 맛 기가 막히지 않아?"

훗카이도의 작은 해안도시 다테. 나는 격의없이 초대해 준 다츠의 집에서 그가 직접 요리한 스테이크를 맛보며 마음이 행복해지는 얘기를 나눴다. 오랫동안 나누는 삶에 대해서 찬사가 이어졌고, 와인 한 잔을 곁들인 낯선 공간에서 주어진 선물 같은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선물다츠 상은 추운 겨울 따뜻한 자전거 여행이 되길 바란다며 목토시와 장갑, 귀마개를 선물로 주었다. 감사. ⓒ 문종성


덧붙이는 글 http://blog.naver.com/miracle_mate
현재 위치 : 니이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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