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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교류의 길을 찾아간 팔십년

[실크로드사전 출판 이야기①] 사전 출간기념회

등록|2013.11.21 13:52 수정|2013.11.21 13:52
실크로드사전을 내기 위한 지난 1년간의 이야기

▲ 실크로드사전 출간기념 플래카드 ⓒ 이상기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교수가 역저 <실크로드사전>을 창비에서 냈다. 그것을 기념하는 출간기념회가 11월 19일(화) 충무로 한국의 집에서 열렸다. 출판기념회는 정수일 선생의 팔순축하연을 겸했다. 정수일 선생은 1934년 11월 12일 길림성 용정(龍井)시 지신(智新)구 명천(明川)에서 태어났다. 이날 기념회 및 축하연의 부제는 '문명교류의 길을 따라 걸어온 팔십 성상의 자취를 기립니다'였다.

나는 11월 초에 행사 초대장을 받았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수일 선생의 실크로드사전 출간기념회가 열린다. 실크로드사전은 선생이 옥중에서 집필한 원고를 지난 1년간 정리·재집필한 것이다. 이 사전은 역사에 남을만한 역작이다. 특히 올해가 정수일 선생의 팔순을 맞는 해여서 팔순 축하연을 겸한다. 이처럼 뜻깊은 자리에 초대하니 참석해 축하해주기 바란다. 그런데 이번 사전 출간기념회에는 실크로드 도록이 함께 발간되었다.

지난 1년간 정수일 선생은 하루 17~18시간을 실크로드사전 작업에 투자했다고 한다. 건강을 위해 꾸준히 나가던 등산모임에도 발을 끊고 오로지 실크로드사전 집필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체력이 저하되고 시력이 떨어지는 현상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옆에서 보필하던 부인 윤순희 여사도 보기가 딱할 지경이었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지난한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1092쪽짜리 세계적인 저작 <실크로드사전>을 만들어낸 것이다. 

쟁쟁한 사람들의 축사

▲ 축사를 하는 백낙청 선생 ⓒ 이상기


이날 출간기념회에는 쟁쟁한 인사들이 축사를 했다. 가장 먼저 실크로드 연구전문 미술사가인 권영필 선생이 정수일 선생의 업적을 이야기했다. 실크로드를 중국의 베이징에서 한국의 경주까지 연장시켰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창비를 이끌어온 영문학자 백낙청 선생이 축사를 했다. 그는 정수일 선생을 세계의 석학으로 불러도 좋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정수일 선생은 세계의 박사다. 그런데 정수일 선생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박사학위가 박탈되어 더 이상 박사가 아니니 석학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산행 친구인 박준기 선생이 축사를 했다. 그들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돈명 변호사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꾸준히 산행을 해왔는데 최근에 정수일 선생이 나오질 않아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저작을 냈으니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날 축사에서 핵심적인 말들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장인 김정남 선생이 다 했다. 김정남 이사장과 정수일 선생은 2008년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창립해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다.

▲ 부인 윤순희 여사 ⓒ 이상기


김 이사장은 정수일 선생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문명사상가라고 불렀다. 정수일은 실크로드학에서 출발, 문명교류학의 길을 열어간 위대한 사상가다. 인류의 공생공영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띠고 학문탐구에 몰두했을 뿐 아니라 현장답사를 통해 그 소명을 완수하려고 했다. 그는 맑은 영혼과 드높은 시심을 갖고 정수일표 '문명교류사전'을 완성했다. 그는 수류화개(水流花開)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문사(文士)다.

마지막으로는 부인인 윤순희 여사가 그동안 못다 한 말을 했다. 윤순희 여사는 염무웅 선생에 의해 '정수일에게 나투신 관세음보살'로 불렸다고 한다. 윤 여사는 옆에서 지켜본 남편 정수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족이 모두 함께하길 기원했다. 알고 보니 그 가족은 정수일 선생이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나은 세 딸과 사위 그리고 손주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정수일 선생이 가야 할 길

▲ 실크로드사전에 사인을 해 주는 정수일 선생 ⓒ 이상기


정수일 선생은 매년 거의 1권씩 책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답사에 목마르고 연구에 목마르고 번역과 집필에 목마르다고 한다. 매년 2회씩 있는 문명교류연구소의 실크로드답사에 동행하고, 고전번역에 몰두하고, 집필에 시간을 투자하면서 문명교류학 정립에 매진하고 있다. 그동안 20권이 넘는 저서와 역서를 내고,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쉬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도 수행해야 할 과제가 8개 남았다고 말한다.

현재 진행 중인 과제 2개가 중세 문명교류에 대한 연구와 해양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라고 말한다. 그는 <신라·서역 교류사>와 <고대문명교류사>를 낸 바 있다. 그러니 다음 연구가 중세 문명교류사가 되는 모양이다. 실크로드는 크게 세 갈래 길이 있다. 첫째가 오아시스로다. 둔황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사마르칸트로 해서 이스탄불에 이르는 길이다. 오아시스로 연구는 정수일 선생이 가장 오랫동안 연구한 분야로, 저서의 대부분이 이 길에 대한 연구다.

▲ 출간기념회 참석자들과 함께 한 정수일 선생: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 이상기


둘째가 초원로다. 초원로는 몽골의 카라코룸으로 해서 중가리아 분지와 알타이 산맥을 넘어 아랄해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길이다. 초원로에 대한 연구는 2010년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냄으로서 어느 정도 완결되었다. 그 후 정수일 선생은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아메리카로 연결되는 해양로를 가정하고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 실크로드 해양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아마 내년쯤이면 그의 손과 발을 통해 해양 실크로드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미완의 6개 과제도 차근차근 진척시켜 나갈 것임을 약속했다. 그는 이를 통해 문명교류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려는 목표를, 아니 염원을 이루려고 한다. 만약 정립이 불가능하다면 토대라도 만드는 게 그의 목표다.

또 다른 염원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서울과 평양의 거리는 250㎞밖에 되지 않는데, 60년이 넘게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팔순이 된 그는 개인적으로 북쪽에 있는 자식들을 만나고 싶은 감정도 감추질 못한다. 정수일 선생은 스스로 남과 북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는 현재도 분단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차병직 변호사를 통해 소개된 정수일 일대기

▲ 정수일 선생이 공부한 이집트 카이로대학교 ⓒ 이상기


정수일 선생의 선대 고향은 함경도 명천이다. 1930년경 아버지가 연변으로 이주했고, 그곳에 정착한 마을 이름도 고향인 명천을 따라 명천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정수일은 태어났고, 1941년 지신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광동 (초급)중학교에 입학했고, 1949년에는 연변 고급중학교(현: 용정 고급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52년에 중국 전국통일시험제도를 통해 북경대학교 동방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연변지역에서 북경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은 2명이었다.

동방학부에서 전공을 결정할 때 그는 아랍어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때 아랍어를 선택한 것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3학년을 마칠 때쯤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제3세계 지도자 모임이 있었고, 여기서 만난 이집트 낫세르 대통령과 중국 수상 주은래 사이에 학생교류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정수일이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집트 카이로대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 풍경 ⓒ 이상기


그는 카이로대학교에서 아랍어는 물론이고 아랍과 이슬람 문명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동과 유럽 친구들을 통해 독일어, 페르시아어를 공부했고, 시각을 세계로 넓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4년간 공부를 마치고 1958년 중국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중국 외교관으로서 알제리 주재 중국대사관에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또 프랑스어를 공부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의 언어적인 능력은 계속 확장된다.

1960년에는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의 정책연구관으로 근무했고 1961년 베이징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 후 분단의 극복이라는 명제가 그를 사로잡았고, 1963년 평양 국제관계대학 교수로 갈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는 평양국제관계대학이 평양외국대학으로 통합되면서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1979년 1월 남북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평양을 떠난다. 그는 튀니지대학으로 가 <인도와 그 주변국에 대한 이슬람 전파>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 실크로드의 핵심인 오아시스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고 있다. ⓒ 이상기


이후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거쳐 1984년 4월 29일 드디어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8월에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공부를 하며, 국내대학 아랍어과에서 강사로 아랍어를 가르친다. 그리고 윤순희 여사와 결혼도 하고, 1990년 마침내 <신라·아랍제국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곧 이어 단국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면서 학자로서의 탄탄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1992년 9월에는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해 <신라·서역 교류사>(단국대 출판부)를 출판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수일의 실크로드학 서적과 논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논문을 통해 그는 처용이 이슬람 상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정수일은 1996년 7월 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그는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그러나 옥중에서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연구하고 집필하면서 실크로드사전 초안을 만들어 나간다. 그는 또한 아내인 윤순희에게 편지 쓰는 것도 잊지 않는다. 1996년 9월 16일부터 쓴 편지가 2004년 옥중편지 모음집인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로 나오게 된다.

2000년 정수일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게 되었고, 2001년 <이븐 바투타 여행기>출판을 시작으로 다시 저작과 번역에 몰두하게 되었다. 2004년에는 사면·복권되었고, 2005년부터는 여권을 발급받아 해외답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6월에는 정수일 선생을 중심으로 한국 문명교류연구소가 문을 열었고, 11월에 사단법인이 만들어져 학술과 답사를 지원하게 되었다.

그 후 거의 매년 1권씩 책이 나왔고, 실크로드 답사도 20회 이상 진행되었다. 그런 연유로 한국 문명교류연구소가 이날 실크로드사전 출간기념회를 주관하게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실크로드사전 출판 이야기]는 3회 이어진다. 첫 번째 기사가 사전 출간기념회고, 두 번째 기사가 실크로드사전 서평이며, 세 번째 기사가 한국 문명교류연구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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