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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 그들은 왜 잊혀졌을까

[서평] 이덕일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

등록|2013.11.24 14:38 수정|2013.11.24 14:38
단재 선생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말했고, 고려 시대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국사는 세상을 바로 잡는 책"이라고 말했다.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역사를 정의했다. 단재와 카의 역사에 대한 정의는 잘 알고 있지만, 이규보가 말한 "세상을 바로 잡는 책"이라는 말은 생경하긴 하지만 세 가지 정의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지난 20일 세코 히로시게 일본 관방 부장관이 "우리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전날인 19일에는 관방장관인 스가 요시히데가 "안중근 의사는 범죄자"라고 말했다. 당연히 우리는 발끈했다. 하지만 발끈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이규보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책"

'역사 왜곡' 논란을 빚은 <고등학교 한국사>(교학사) 교과서는 일본 우익지인 <요미우리>신문이 "일제시대를 경제 발전의 관점에서 재평가했다"고 보도할 정도로 일제식민지배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 미화 역시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이를 환영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잘못된 역사 교육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그가 말한 잘못된 역사 교육이란 이른바 '좌파 역사 교과서'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지난 9월 26일 <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그동안의 기존 교과서는 현대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관을 가지고 쓴 교과서고, 긍정적인 사관을 갖고 쓴 교과서가 교학서 교과서고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라며 "우리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사관을 가르쳐야지, 부정적 사관을 가르치면 우리에게 뭐가 오겠나?"라며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했다.

▲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 ⓒ 역사의아침

"긍정적이 사관"이란 단어는 일본 우익들이 역사를 왜곡할 때 자주 쓰는 용어다. 독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어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를 있는 그대로 가르친다.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리는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오히려 친일파를 등용했고,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이 친일청산을 시도하자 수구세력은 벌떼처럼 일어나 반발하며 '붉은 덧칠'를 시도했다. 그나마 독재정권을 객관적으로 정리한 역사교과서를 '좌파 교과서'라고 우겼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이 일 때 대부분 언론들은 '보수-진보 논쟁'으로 몰아갔다. 아니다. 이념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것인가와 왜곡해 가르칠 것인가 문제였다. '상식'과 '비상식' 문제였다.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 비상식이 아닌 상식으로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조선선비 살해사건>으로 조선사 시각을 바꾸었고 <근대를 말하다> 등으로 일제식민사관에 왜곡된 우리  역사를 복원을 시도해 온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은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역사의아침)에서 한국사가 정쟁 도구가 된 것을 "팩트를 조작한 세력들이 여전히 학문권력의 상당한 부분을 장악"하고, "역사 해석의 파편화·분절화"라고 설명한다. 즉, 역사를 마치 조각조각 나눠진 파편처럼 설명해왔다는 것이다.

한국사 정쟁도구 된 이유... 팩트 조작한 이들이 학문권력 장악

"부분을 보면 아닌 것 같은데 전체를 모아놓으면 식민사학이 되는 국사인식 체계가 지금껏 유지되어 왔다. 근현대사는 민족해방사적 관점으로 바라보면서도 고대사는 조선사편수회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대한 구조는 은폐하거나 외면한 채 지엽적 문제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았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6쪽) 

이덕일의 글을 통해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나무와 숲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잊혀진 근대>는 1918년부터 1945년 사이를 다뤘다. 특히 그는 1930년대를 주목한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만주를 필두로 외국을 침략한 시기다. 열두어 살 때부터 유년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사 훈련을 받은 전쟁기계들이 천황봉대를 했다. 이덕일은 이 시기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국주의 본국의 역사를 모르고서 식민지 상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잊혀진 근대>는 전쟁기계들의 정신세계와 행태를 분석하면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운동사"를 다룬다. 우리가 이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해방 후 냉전체제가 고착되면서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이념적 취사 선택에 따라 지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과 아나키스트 운동을 재조명할 때가 된 것이다.

"식민지시기에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해방운동 한 주류였다. 내부에 많은 파쟁이 있었고 민족주의자들과 많은 다툼도 겪었지만 이 시기에는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세력이었다. 6.25 남침으로 이런 인식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지만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은 이제 재조명할 때가 됐다."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 재조명 해야"

이덕일에 따르면 1920년대 사회주의 세력은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북풍회' 계열, 코민테른 극동부 코르뷰로 '화요회', 국내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인 '서울청년회' 계열이 있었다. 북풍회는 '북쪽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혁명의 바람'이란 의미로 "한국과 일본의 무산 계급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지 않고서는 한국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무산계급 한일 공조를 중시했다고 이덕일은 말한다. 화요회는 마르크스 생일이 '화요일'인 데 유래했으며 조선공산당의 모체가 된다. 서울청년회는 국내 최대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세력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갈등과 분열하는 모습은 보였다는 점이다. 1925년 4월 7일 한성강습원에서 230여개 단체가 모여 '전국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전국연합회'를 결성해 결의문을 채택한다.

"화요회 일파가 주최하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는 그 소집 시기와 방법, 주최의 동기로 보아서 운동선을 규란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반대 대회를 개최한다."(65쪽)

민중대회는 노동단체 263개, 청년단체 100여개, 백정 등 신분해방단체인 형평단체 18개, 사상단체 44개 등 425개가 참여하는 대회였다. 서울청년회는 이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 이유는 "민중대회가 조선 민중의 투쟁 역량을 나누어 결과적으로 일제를 이롭게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의 갈등과 분열을 보면 2013년 진보세력 분열을 보는 듯하다. 자신이 가진 신념이 너무 강하다 보니 조금만 다른 생각을 가져도 수구세력보다 더 강하게 비난하고 비판한다. 조금 '다름'을 모두 '틀림'으로 단정하는 잘못을 진보세력은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보개혁세력이 싸워야 할 대상은 수구기득권세력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 진보세력이 새겨야 할 1920년대 분열이다.

언어학자 놈 촘스키는 "아무도 아나키즘이란 용어를 독점할 수 없다"고 했다. 존 몰리뉴는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책갈피)에서 "아나키즘은 만연한 착취와 불의, 자본주의 국가의 막강한 권력, 지배 이데올로기의 억압적 통제에 맞서 '됐거든' 하고 시원하게 쏘아붙인다"면서 "부자와 빈자, 착취자와 피착취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같은 구분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권력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아나키즘'

그렇다.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면서 어떤 때는 혁명을 불사했고, 좌파 전체주의도 부정한다.

"아나키즘 연구가 다니엘 게렝은 <현대 아나키즘>에서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시스트의 관계를 '형제이자 적'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형제이지만 전체주의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일제는 물론 좌파 전체주의와도 치열하게 싸운 존재가 아나키스트들이었다."(101쪽)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고, 좌파 전체주의와 치열하게 싸우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사라져야 한다는 아니키스트들에게는 '조선인'과 '일본인' 구별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피압박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인은 피압박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니 민족의 틀을 넘어서 동지로서 연대할 수 있었다"고 이덕일은 말한다.

아나키스들은 일본제국의 수괴들을 저격하거나, 중일 합자은행을 터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의열단'(단장 김원봉)이 그 중 하나다. 의열단은 "조선총독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매일신보 같은 핵심 식민통치기구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무장투쟁론을 외교독립론자들은 비판한다. 그러자 의열단은 단재 선생에게 자신들 주장을 담은 선언물을 의뢰했고, 그 결과가 <조선혁명선언>이다.

같은 민족, 같은 나라 차별없는 세상 꿈꾼 아나키스트

<조선혁명선언>은 "강도 일본이 우리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권을 다 박탈하였다"면서 "식민지 민중이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수단은 정의롭다"고 선언했다. <조선혁명선언>에 '민중혁명론'이 있는데 이것이 아나키즘 요소가 있다.

"구시대의 혁명론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한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해야 한다."(138쪽)

한 마디로 같은 민족, 같은 나라 안에서도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회영 선생은 "무정부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대동(대동)의 세계를 말했는데"라고 말했다. 이는 조선 아나키스트가 국외 아나키즘을 무조건 수입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어 이회영은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상호부조하고 협동노작하는 사회적 본능이 있었다"면서 "태고로부터 연면히 내려온 인간성의 본능은 선한 것"이라고 간파했다고 이덕일은 말한다.

비록 이들 아나키스트가 바란 민중혁명과 대동사회는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3년, 국가주의가 다시 부활하고 전체주의가 도래하고 있다는 불김한 예감이 들고 있다. 이 때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해야 한다"는 <조선혁명선언>은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할까.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스트만 아니라 '일제 만주 침략', '부호의 등장', '일제 패망' 등 다섯 가지 프레임을 통해 해방 전 근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덕일은 앞에서 한국사가 정쟁 도구가 된 이유 중 하나가 '팩트 왜곡'이라고 했다.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는 당시 신문기사와 증언록, 사진 등 사료 중심의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잊히고 묻히고 지워진 해방 전 근대 풍경으로 독자를 이끈다.
덧붙이는 글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 이덕일 지음 ㅣ 역사의아침 펴냄 ㅣ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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