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 알려드립니다
지리산 둘레길(원부춘-대축) 답사기
▲ 평사리 들녘소설 토지의 무대였던 넉넉한 평사리 들판, 멀리 오늘 넘어온 형제봉 능선이 보인다. ⓒ 정부흥
흙을 밟으며 산길을 걷는 일은 큰 축복이다. 늦가을, 하늘이 높아지는 날 출렁거리는 가을 바람에 속삭이는 낙엽의 법문을 들으면서 걷노라면 더욱 그렇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때문에 땅의 기운을 받지 못하고, 가족간의 대화도 TV나 게임에 뺏겨버린 오늘을 사는 이들 중 삶의 의미가 시리게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난 흙길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논두렁 밭두렁은 어머니가 고등어조림 새참을 이고 서둘러 다니던 길이고 먹점재와 신촌재는 개똥쇠가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 반 되를 사들고 넘다가 한 모금씩 홀짝 거리던 고개다.
나와 집사람은 지리산골에 살면서, 종일 같이 일하며 쉴 새 없이 종알 거리지만, 지리산 둘레길 답사를 떠나는 날이면 소풍가는 초등학생들 마냥 설렌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볼 것인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의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에게 '걷기'를 권한다.
어제는 OO연수원에서 3시간 동안 강의를 했다. 동생이 시골에서 일만 하면 사회생활 감각을 잃어버린다고 나름 신경써서 마련한 자리다. 연구원에 있을 때는 봄 가을로 학회발표 기회도 많았고 가끔 국제학술 발표 기회도 있어 청중 앞에 서는 것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2007년 뇌졸중을 앓고 난 후로 지금까지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 상당한 기간 동안 잊고 살던 일이다.
주제가 '행복'이었다. 내가 연구하고있는 내용과 결과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작년 5월 은퇴 후에는 그룹미팅 같은 것도 없었다.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준비한다고 했다. 참고서로 가지고 있는 책으로 모자라 새로 6권을 구입했다. 한 달 동안 준비했지만 미진하다는 생각에 마지막 주엔 다른 집안 일들을 다 제쳐두고 준비했다. 청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최선을 다한지라 강의가 끝난 뒤 입술이 부르트고 허탈감이 밀려왔다. 다음날 하루를 쉬고 나니 다시 몸을 추스르고 싶다.
그래서 지리산 둘레길 답사에 나섰다. 이번 둘레길 답사는 여섯 번째였으며 원부춘에서 대축까지 구간을 걸을 예정이었다. 구간거리가 8.6km로 다른 구간에 비해 짧은 편이다. 걷는 예상시간도 5시간 정도다. 다른 일반적인 코스에 비해 예상 소요 시간이 짧은 것 같아 평소보다 1시간 늦게 집에서 출발했다.
그동안 내가 둘레길을 잘 찾아 다닐 수 있었던 건 독도법과 등산 경험 덕이다. 나와 집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꽤 많은 산들을 답사했다. 산에 갈 적에는 언제나 지도와 나침반을 챙겼다. 몇 년 전부터는 외국에서 구입한 등산내비게이션을 가지고 다녔지만 수입사의 횡포로 마땅한 국내 전자지도를 구입할 수 없어 재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인터넷에서 스마트폰과 PC컴퓨터를 연동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검색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활용해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할 만하여 소개한다.
첫째, e산경표 PC와 스마트폰 프로그램을 각각 다운로드하여 폰과 컴퓨터에 설치한다.
▲ 구간지도 지리산 둘레길 공식사이트(http://www.trail.or.kr)에서 다운로드 한 간이지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만 현지 둘레길에는 안내 표지판이 없어 마땅한 쉴 곳도 점심 식사장소도 놓치기 쉬웠다. ⓒ 정부흥
둘째, 생명평화 지리산 둘레길 인터넷사이트(http://www.trail.or.kr)를 방문하여 구간 정보와 구간 지도를 다운로드 받는다. 지도는 PDF 파일 형태이다. 원부춘- 대축 구간을 확대하여 출력하고 필요한 정보들은 잘 읽어둔다. 원부춘과 대축 마을 주소는 출발지점과 목표지점의 정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갈 때 필요하고 다음 구간으로 이어갈 때도 이 지점에서 이어가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나는 언제나 간이지도 귀퉁이에 적어둔다.
셋째, 인쇄한 간이지도와 인터넷에서 열어볼 수 있는 등고선지도를 비교해가며 방안걷기(indoor walking)를 몇차례 한다. 나에겐 이 시간도 행복하고 좋은 시간이다.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가는길 따라 마음도 오간다.
넷째, 간이지도 코스를 등고선지도 따라 몇차례 오고가다보면 코스윤곽이 머리속으로 들어온다. 이제 나의 출발준비가 끝난 샘이다. 집사람은 같이 갈 길동무인 김사장댁에 출발 날자와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매주 목요일 아침 8시에 우리집에서 만나 출발한다.
다섯째, 우리가 하는 둘레길 답사 방식은 승용차 2대를 이용한다. 같이서 오늘 도착 지점인 '대축마을'로 간다. 넘어야할 형재봉 능선의 위용에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폰 앱인 e산경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궤적기록'모듈을 활성화시킨다. 이제 내가 움직이는 위치를 폰이 기록하기 시작한다.
여섯째, 승용차 1대는 '대축' 마을에 주차시키고 다른 1대를 이용하여 오늘 출발 지점인 '원부춘'마을로 간다. 전번 도착 지점이었던 마을 정자 앞에 주차하고 코스입구를 찾아나선다. 구간정보에 있는 위치에서 이어가기 때문에 입구 찾기가 어렵지 않다. 입구에는 언제나 길안내 장승이 양손으로 갈길과 온길을 적색과 흑색으로 가르키고 있다.
일곱째, 나의 등산조끼 앞주머니에는 우리가 나아가는 궤적을 표시하는 폰과 간이지도가 들어있다. 지리산 둘레길은 있어야할 곳에 길안내 장승이 서 있다. 그러나 둘레길이라고 해서 큰길도 아니고 표시나는 길도 아니다. 다른 골목길이나 다를바 없다. 갈림길에서는 반드시 길안내 장승을 확인해야 한다. 나는 수시로 폰의 궤적과 간이지도의 코스를 비교한다. 궤적 모양이 간이지도 코스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표다. 나는 길안내 장승과 폰의 궤적 그리고 간이지도 안내를 받으며 둘레길을 간다.
여덟째, "길을 잘못 들었다 싶으면 되돌아가 확인하라." 대학 산악부원 시절 선배들로부터 귀에 박히도록 듣는 말이다. 평범하고 당연한 이 말이 허기지고 탈진한 상태에서는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비상시에는 목숨을 건지는 목숨줄이 된다. 둘레길에서야 이런 상황까지 가지않겠지만 7~8시간 걷다보면 지치고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다.
아홉째, 폰에 출발 지점인 '대축마을' 지점과 궤적의 점이 만나 폐곡선을 이루면 오늘의 둘레길 답사 일정이 끝난다. 귀가 길에 원부춘 마을에 들러 아침에 주차해둔 차를 찾아 각자 자기차에 오르면 성취감과 다음 코스의 기대 감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 등고선지도와 궤적PC용 e산경표지도에 귀적을 표시한 형태, 점선으로 표시된 구간은 자동차로 이동한 구간이고 적색 실선은 도보로 이동한 구간이다. GPS자료 수신과 궤적 확인 때문에 화면을 켠 상태로 고정시켜 둔다. 폰 건전지 용량이 적어 도중에 예비 건전지로 교환해야한다. 무심코 걷다보면 건전지 교환 시간을 노치기 쉽다. 위 지도에서 적색선이 끊긴 구간은 건전지를 교환하지 않아 GPS 자료를 분실한 구간이다 ⓒ 정부흥
▲ 궤적분석표 자동자로 이동한 구간의 자료가 포함되어 신뢰도가 떨어지지만 형재봉 능선의 고도 750m 재를 넘어야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고 경사도로 미뤄 코스의 난이도도 예상할 수 있다 ⓒ 정부흥
▲ 원부춘 마을 출발점둘레길 안내정보에 의하면 이번 코스는 처음 시작하여 1시간 30분 정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숨을 돌릴 수 있다고 했지만 길동무들이 다소곳하기엔 날씨가 너무 좋은 모양이다 ⓒ 정부흥
▲ 들판 감나무오늘 코스는 똘감나무를 만날줄 모른다고 했더니 집사람은 똘감으로 감식초를 담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감나무 아래에 이르자 집사람과 지혜엄마는 떨어진 감 줍기에 넋을 잃었고, 김사장은 대나무 장대로 감을 딴다. 30여분 걷는 시간이 지체됐고 내가 메야 할 베낭 무게는 족히 20kg가 넘었다. 다른 사람들지리산 둘레길 각 구간은 베낭 무게는 걷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벼워졌지만 나는 8km 내내 특수부대 유격훈련을 해야했다. 아~아! 감식초 ⓒ 정부흥
▲ 집사람 웃음의 속 뜻은도시락, 물통 등 둘레길 답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집사람 배낭에 옮기고 내 배낭에는 감식초 담글 감만 들었다. 집사람이 좋아서 웃길레 나도 덩달아 웃었다. ⓒ 정부흥
▲ 길안내 장승 대축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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