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바위 본 김정일 위원장, 이런 농담까지 했다니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⑨] 함경북도 칠보산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아침.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목이 아파왔다. 어제 천지에서 추위에 떨어서인지 감기 기운이 있다. 이를 눈치챈 설향이가 따뜻한 소금물을 준비해왔다.
"감기기운으로 목이 아파올 때는 함수(소금물)가 최고야요. 어제 장군봉까지 무리하게 괜시리 올라가시라 해서 몸이 불편해지신 것 같습니다. 아, 이거야 미안해서 어쩌나요."
"아냐, 괜찮아. 어제 천지에서 너무 만세 소리를 크게 질러서 그런 거야."
아침 일정에 들어있는 삼지연은 지난해 가본 적이 있는 터라 우리는 방에서 쉬기로 했다.
백두산, 더 이상 상상 속의 산이 아니다
오전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유럽 일행들과 함께 베개봉호텔에서 점심을 마친 우리는 다음 관광지인 칠보산으로 가기 위해 삼지연 공항으로 향했다. 이 백두산 산골 속에 대체 어디에 학교가 있는지 도로 옆으로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다.
북한의 시골은 교통수단이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를 힘겹게 끌고 걸어서 비탈길을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 볼 수가 없다. 남한의 경우 멀쩡한 버스도 폐차한다는데 이곳에 가져다 놓으면 동포들이 정말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를 태울 AN-24 프로펠러 비행기가 보인다. 지난해 북한 여행 때만 해도 프로펠러 비행기를 보고 얼마나 불안에 떨며 가슴 조마조마 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떠나야 하는 우리를 태울 러시아산 구형 비행기가 시간에 맞춰 준비돼 있는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비행기가 이륙해 어느 정도 고도에 다다른다. 혹시나 백두산이 보일까 싶어 남편과 나는 목을 빼고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봉우리들이 보이지만 어느 게 백두산의 봉우리인지 알 길이 없다. 그나마 보이는 봉우리도 구름에 가려지기 일쑤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천지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다시 한 번 눈을 감는다. 이제 백두산은 <애국가>의 노랫말에서나 나오는, 막연한 상상속의 산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산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모습은 가슴 속 깊이 새겨진다.
함경북도에서 만난 어머니의 '옛 친구'
우리가 탄 비행기가 이내 청진의 어랑비행장에 도착한단다. 이 비행장은 군사비행장인데 민간에게 허용된 지 얼마 안 됐다고 한다. 군사비행장이니 사진 촬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설향이가 미리 귀띔해준다.
'칠보산국제려행사'란 글씨가 적혀 있는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에 올라 공항을 빠져 나오자 '길주' '명천'이라 적힌 교통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정신이 번쩍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명천? 설마…."
어린 시절 동네에서 나를 예뻐해 주셨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나는 그분을 '오랑아줌마'라고 불렀다.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신 분이라고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분은 나를 붙들고 어린 시절 당신이 살았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명천에는 온천도 많고 또 해산물이 풍부해 밥상에는 온갖 생선이 올랐다는 이야기하며, '오랑천'에서 물장구치며 놀았던 이야기 등 한번 시작하시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어린 마음에 그 '오랑천'이란 곳에서 물놀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
자그마한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우리가 탄 버스가 그 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자, 마이크를 잡은 현지 안내원 아저씨가 차내 방송을 한다.
"지금 보시는 이 강은 '어랑천'이라는 강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옛날에 화산 활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온천이 많이 있고,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산들도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칠보산이 제일이랍니다."
아! '오랑'이 아니라 '어랑'이었구나. 그리고 이 강이 '오랑아줌마'가 늘 말씀하시던 바로 그 '오랑천'이구나!
'오랑아줌마'가 고향 이야기를 할 때마다 묘사했던 그 냇가의 모습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강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 맑은 냇가며, 길옆의 논밭이며, 그새 변한 게 하나도 없는 듯하다. '오랑아줌마'는 이곳에 얼마나 와보고 싶으셨을까, 얼마나 고향산천이 그리웠으면 어린 나를 붙들고 그치실 줄 모르며 고향 이야기를 해주셨을까. 아직도 살아 계실는지…. 마음속으로 외친다.
'오랑아줌마, 저 지금 '오랑천'에 와 있어요. 조금만 더 오래 사세요. 곧 이곳에 오실 수 있으실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이내 눈물이 흐른다. 2011년 10월의 첫 북한여행 후 이번이 벌써 네 번째. 이제는 눈물이 그칠 때도 됐으련만, 그럼에도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북한 여행을 아무리 자주 한다고 해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유는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감동해서 울고, 슬퍼서 울고, 갈라진 조국이 억울해서 울고.
함경북도 마을, 황해도보다 사정이 안 좋구나
버스는 해안가 평야를 달려간다. 자그마한 마을을 지난다. 남한으로 치면 '읍' 정도의 마을이 아닐까 싶다. 마을길을 따라 집들이 눈앞에 들어온다. 마을 상황이 몹시 안 좋아 보인다. 마음이 아프다. 첫날 갔었던 황해도 시골 마을은 비교적 풍요로워 보였는데, 함경북도에서 만난 마을은 그렇지 않다. 함경북도 동포들의 삶은 황해도 동포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힘겨워 보인다.
창밖에 비친 도로 옆 가옥들이 수리 중이다. 북한 당국도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가 보다.
언젠가 탈북여성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문득 그들이 자신들의 출신지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난다. 많은 사람들이 회령·온성·경원·무산 같은 국경지대 그리고 청진 등 함경북도 출신들이었다. 물론 국경지대니 탈북이 비교적 쉬워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이곳의 생활이 더 힘들기 때문이어서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새터민들은 대개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는 것 같다. 북한에서 온갖 혜택을 다 누리다가 '도망온' 소수의 사람들 또는 배고픔에 못이겨 부모형제를 떠나 온 '가엾은' 사람들.
인민들 위에 군림하다 온 특수층 탈북자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대개 북한 기득권층이 얼마나 사악한지 목청을 높혀가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주로 봤다. 측은한 마음으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자기 얼굴에 침 뱉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되레 뻔뻔하다고만 느껴질 뿐이다.
배고픔에 못 이겨 탈북을 한 새터민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짓고,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며 오열한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북한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말해주는 그 현장을 나는 지금 지나고 있다. 적어도 궁핍한 삶에 대한 그분들의 증언은 사실일 것이라고 한마음으로 통감한다.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 남의 이야기 아니다
방송에 출연해 북한동포들의 궁핍한 생활을 마치 남의 집 이야기하듯 '깔깔대며' 말하는 일부 새터민들의 태도는 또 한 번 나를 아프게 한다. 이런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방송사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북한동포들의 이야기는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은 '남의 모습'이 아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간혹 "절대로 북한에 쌀을 보내면 안 된다"고 말하는 새터민들도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 여성 새터민은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면담하던 중, 절대 쌀을 북한에 보내면 안 된다고 말했다"며 텔레비전에 나와 그렇게 말한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굶주림을 못 이겨 북한을 떠났다는 그 새터민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만일 내가 배를 곯다가 북한을 떠났다면 그 상황에서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나는 분명 이렇게 외칠 것이다. "전세계의 인류여, 어서 빨리 북에 쌀을 보내주세요, 지금 내 부모님과 형제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부탁이에요"라고 말이다.
또 일부 새터민들은 "쌀을 보내봐야 당 간부들이 다 가져가지 우리는 구경도 못 한다"고 말한다. 외부에서 보낸 쌀이 어디로 가는지, 실제로 그 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전해졌는지는 아무리 모니터링을 잘한다고 해도 알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쌀이 누구에게 갔는지 관계없이 북한 내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히 크다. 당 간부들에게 쌀이 모두 가 있든, 그 누구에게 가 있든, 북한에 들어간 쌀은 누군가가 현금으로 만들기 위해 장마당에 내다 팔 것이다. 그렇다면 장마당에 흘러나온 쌀들은 결국 쌀값의 하락 요인이 될 것이고, 주민들은 같은 돈으로 더 많을 쌀을 살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러한 시장의 이치를 라진-선봉에 살고 있는 내 사촌동생에게로부터 들었다. 재미동포인 사촌 여동생은 남편 그리고 세 자녀와 함께 올해로 16년째 북한의 라진-선봉에서 살고 있다. 사촌동생의 남편은 실리콘밸리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촉망받던 컴퓨터 엔지니어였다. 그는 1990년대 중반 소위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돕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북한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그곳 동포들과 함께 한마음이 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가며 살고 있다.(관련기사 : 미국서 잘나가던 엔지니어, 북한서 15년 살고있다고?)
그는 때때로 동남아에서 쌀을 수입해 지역의 북한 동포들에게 풀어놓기도 하는데, 수입한 쌀이 항구에 들어온다는 소식만 퍼져도 장마당에서는 쌀값 하락이 생긴다고 했다. 이 '시장의 원리'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그 어떤 쌀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고 본다.
복잡한 경제의 원리를 떠나서라도, 무슨 이유에서든 북한에 쌀을 보내지 말라고 간청하는 일부 새터민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굶주림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텐데 말이다.
한 여성 새터민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지금 이 강을 건너면 후에 다시 돌아와 어떻게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으며 조국은 또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는 말. 강을 건너기 전 뒤를 돌아보고 울고 또 울었다는 그녀는 북한을 떠날 당시 10대 후반의 어린 소녀였단다. 세상에 이런 효녀가 없고, 애국자가 따로 없다. 아마도 나였으면 밥을 굶게 한 부모를 원망하고 나를 방치해 둔 조국에 조금의 미련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강을 건넜을지 모른다.
내가 북한에서 만난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렇게 순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나라를 사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을 때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답한다.
북한은 지방의 생활 수준 향상에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결국 북한을 떠나는 동포들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것 뿐일 테니까.
함경도 산골짜기에도 희망과 미래가 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명간군이라는 곳을 지나 칠보산이 있는 명천군에 들어선다. 군 경계선에 있는 교통표지판 옆으로 한 아주머니가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를 끌고서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저 짐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리고 저 아주머니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아니면 장마당으로? 힘겨워 보여도 빈 자전거보다는 흐뭇해 보인다.
그래도 내가 처음 북한을 여행했을 때보다는 시골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폐차했어도 벌써 오래 전에 했을 법한 고물 트럭의 짐칸에 사람들이 끼어앉아 낯선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건넨다. 인간이란 아무리 잘살아도 조금만 불편하면 인상을 찌푸리고, 아무리 못 살아도 조금만 나아지거나 희망이 보이면 미소를 짓는가 보다.
아이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신겨 어디론가 나들이가는 젊은 부부가 보인다. 마냥 즐겁기만 한 아이는 엄마를 쳐다보며 흥에 겨워 걷는다. 길가의 돌멩이를 톡톡 굴려가며 인형같은 구둣발로 뛰어가듯 쫓아간다. 행여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질까 걱정스러워하는 아빠의 눈빛은 아이의 발길에 머무른다. 함경도의 산길에도 미래가 피어난다. 고까옷 입고 환한 모습으로….
길을 따라 낮은 산에는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2011년 첫 북한 여행 당시, 회오리 바람이 쓸고 간 듯한 민둥산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가파른 산이든, 완만한 산이든 나무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옆 나지막한 동산에도 작은 나무들이 제법 모습을 드러내며 자라고 있다. 여름이라서 더 푸르러 보이는 듯. 마음이 편하다.
버스는 점점 더 깊은 산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숲은 더 울창해진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명천은 작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부디 오곡백과 풍성하고 온갖 해산물이 끼니마다 밥상에 오르던 '오랑아줌마'의 기억 속 고향산천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인간사 이야기가 모여있는 칠보산
어느 덧 차는 칠보산 입구에 진입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칠보산은 오묘한 기암절벽으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기암절벽은커녕 양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숲 때문에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우리가 탄 버스는 좁은 데다 패인 곳이 많은 비포장도로를 간신히 지나간다. 길 위에는 돌멩이들까지 널려있어 자칫 잘못하면 버스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 그래도 큰 인명피해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버스가 기울어진다고 해도 양옆으로 겹겹이 들어선 나무들이 버스를 힘껏 받쳐주고도 남을 것이기에, 절대 계곡까지는 굴러내려 가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온몸에 힘을 줬으면 시간 감각도 굳어져 얼마 동안 산길을 올라왔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사방이 훤해진다. 드디어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버스도 무사히 전망대에 도착했다. 선녀가 올라온다고 해 승선대라 불린다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온갖 형상의 큰 바위들이 크게 파인 계곡을 따라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마치 연극 무대의 대형 세트처럼 보인다.
언뜻 금강산을 연상시킬만 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금강산의 오묘함과 백두산의 장엄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름 그대로 일곱 가지 보물을 지녔다고 해서 칠보산이라고 불린다는 이 산은 내륙에서부터 바닷가로 들어가며 내칠보, 외칠보 그리고 해칠보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수려한 산세에 홀려 있는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내칠보인지 외칠보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바다가 보이지 않으니 해칠보는 분명 아닐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처음 대하는 전망대이니 아마 내칠보가 아닐까 한다.
천태만상의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다. 천불바위·장군바위·기와집바위·배바위·피아노바위·송이바위·책바위·우산바위·원숭이 바위 등 온갖 우주만물과 인간사의 이야기가 한데 모여있는 듯하다.
그중 부부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두 부부가 포옹을 하는 모습이다. 이를 본 김정일 위원장은 이 부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 모습인지 설명했다고 한다.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그것'이 아직도 달려있는지 부인이 왼손을 바지 속에 넣어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단다.
설명을 들으니 정말 꼭 그 모습이다. 그러나 바위에 대한 유머보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런 세속적인 농담을 했다는 사실이 되레 더 충격적이었다.
내게 김정일 위원장은 무시무시한 독재자로 각인돼 있었다. 딱딱한 인민복에 선글라스를 쓰고, 군 장성들을 대동한 그의 행보는 내가 어렸을 적 받은 반공교육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전 인민이 벌벌 떨며 그 앞에서는 감히 단 한마디 실언도 용납되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 그렇게만 알고 있던 그가 인간적인 유머를 했다는 게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 부부가 꼭 가봐야 한다며 설향이가 례문암이라는 바위로 우리를 안내한다. 신기하게도 이 큰 바위 한가운데 작은 틈새가 있다. 부부가 꼭 껴안고 입맞춤을 한 채 바위틈을 지나가야 하는데, 몸이 바위에 닿지 않고 통과하면 백년해로를 할 수 있단다.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바위틈을 빠져나왔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개심사라는 발해 시대 절이라고 한다. '발해'라는 말이 나를 흥분케 한다. 발해가 우리 나라였던가! 발해의 유적이 한반도에도 있었단 말인가. 잊힌 우리의 제국 발해의 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껏 봐왔던 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까? 우리는 개심사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아침.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목이 아파왔다. 어제 천지에서 추위에 떨어서인지 감기 기운이 있다. 이를 눈치챈 설향이가 따뜻한 소금물을 준비해왔다.
"감기기운으로 목이 아파올 때는 함수(소금물)가 최고야요. 어제 장군봉까지 무리하게 괜시리 올라가시라 해서 몸이 불편해지신 것 같습니다. 아, 이거야 미안해서 어쩌나요."
"아냐, 괜찮아. 어제 천지에서 너무 만세 소리를 크게 질러서 그런 거야."
아침 일정에 들어있는 삼지연은 지난해 가본 적이 있는 터라 우리는 방에서 쉬기로 했다.
백두산, 더 이상 상상 속의 산이 아니다
▲ 백두산 베개봉호텔에서 삼지연 공항으로 가는 산길 ⓒ 신은미
오전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유럽 일행들과 함께 베개봉호텔에서 점심을 마친 우리는 다음 관광지인 칠보산으로 가기 위해 삼지연 공항으로 향했다. 이 백두산 산골 속에 대체 어디에 학교가 있는지 도로 옆으로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다.
북한의 시골은 교통수단이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를 힘겹게 끌고 걸어서 비탈길을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 볼 수가 없다. 남한의 경우 멀쩡한 버스도 폐차한다는데 이곳에 가져다 놓으면 동포들이 정말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삼지연 공항에서 탑승전 공항직원과 함께 ⓒ 신은미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를 태울 AN-24 프로펠러 비행기가 보인다. 지난해 북한 여행 때만 해도 프로펠러 비행기를 보고 얼마나 불안에 떨며 가슴 조마조마 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떠나야 하는 우리를 태울 러시아산 구형 비행기가 시간에 맞춰 준비돼 있는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비행기가 이륙해 어느 정도 고도에 다다른다. 혹시나 백두산이 보일까 싶어 남편과 나는 목을 빼고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봉우리들이 보이지만 어느 게 백두산의 봉우리인지 알 길이 없다. 그나마 보이는 봉우리도 구름에 가려지기 일쑤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천지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다시 한 번 눈을 감는다. 이제 백두산은 <애국가>의 노랫말에서나 나오는, 막연한 상상속의 산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산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모습은 가슴 속 깊이 새겨진다.
함경북도에서 만난 어머니의 '옛 친구'
▲ 청진의 어랑공항 청사 앞에서 뭔가를 읽으며 미소짓는 설향이 ⓒ 신은미
우리가 탄 비행기가 이내 청진의 어랑비행장에 도착한단다. 이 비행장은 군사비행장인데 민간에게 허용된 지 얼마 안 됐다고 한다. 군사비행장이니 사진 촬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설향이가 미리 귀띔해준다.
▲ 어랑공항을 빠져나와 바다로 가는 길 ⓒ 신은미
'칠보산국제려행사'란 글씨가 적혀 있는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에 올라 공항을 빠져 나오자 '길주' '명천'이라 적힌 교통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정신이 번쩍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명천? 설마…."
어린 시절 동네에서 나를 예뻐해 주셨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나는 그분을 '오랑아줌마'라고 불렀다.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신 분이라고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분은 나를 붙들고 어린 시절 당신이 살았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명천에는 온천도 많고 또 해산물이 풍부해 밥상에는 온갖 생선이 올랐다는 이야기하며, '오랑천'에서 물장구치며 놀았던 이야기 등 한번 시작하시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어린 마음에 그 '오랑천'이란 곳에서 물놀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
▲ 어랑천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 신은미
자그마한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우리가 탄 버스가 그 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자, 마이크를 잡은 현지 안내원 아저씨가 차내 방송을 한다.
"지금 보시는 이 강은 '어랑천'이라는 강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옛날에 화산 활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온천이 많이 있고,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산들도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칠보산이 제일이랍니다."
아! '오랑'이 아니라 '어랑'이었구나. 그리고 이 강이 '오랑아줌마'가 늘 말씀하시던 바로 그 '오랑천'이구나!
'오랑아줌마'가 고향 이야기를 할 때마다 묘사했던 그 냇가의 모습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강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 맑은 냇가며, 길옆의 논밭이며, 그새 변한 게 하나도 없는 듯하다. '오랑아줌마'는 이곳에 얼마나 와보고 싶으셨을까, 얼마나 고향산천이 그리웠으면 어린 나를 붙들고 그치실 줄 모르며 고향 이야기를 해주셨을까. 아직도 살아 계실는지…. 마음속으로 외친다.
'오랑아줌마, 저 지금 '오랑천'에 와 있어요. 조금만 더 오래 사세요. 곧 이곳에 오실 수 있으실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이내 눈물이 흐른다. 2011년 10월의 첫 북한여행 후 이번이 벌써 네 번째. 이제는 눈물이 그칠 때도 됐으련만, 그럼에도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북한 여행을 아무리 자주 한다고 해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유는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감동해서 울고, 슬퍼서 울고, 갈라진 조국이 억울해서 울고.
함경북도 마을, 황해도보다 사정이 안 좋구나
▲ 수리 중인 가옥들 ⓒ 신은미
버스는 해안가 평야를 달려간다. 자그마한 마을을 지난다. 남한으로 치면 '읍' 정도의 마을이 아닐까 싶다. 마을길을 따라 집들이 눈앞에 들어온다. 마을 상황이 몹시 안 좋아 보인다. 마음이 아프다. 첫날 갔었던 황해도 시골 마을은 비교적 풍요로워 보였는데, 함경북도에서 만난 마을은 그렇지 않다. 함경북도 동포들의 삶은 황해도 동포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힘겨워 보인다.
창밖에 비친 도로 옆 가옥들이 수리 중이다. 북한 당국도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가 보다.
언젠가 탈북여성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문득 그들이 자신들의 출신지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난다. 많은 사람들이 회령·온성·경원·무산 같은 국경지대 그리고 청진 등 함경북도 출신들이었다. 물론 국경지대니 탈북이 비교적 쉬워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이곳의 생활이 더 힘들기 때문이어서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새터민들은 대개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는 것 같다. 북한에서 온갖 혜택을 다 누리다가 '도망온' 소수의 사람들 또는 배고픔에 못이겨 부모형제를 떠나 온 '가엾은' 사람들.
인민들 위에 군림하다 온 특수층 탈북자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대개 북한 기득권층이 얼마나 사악한지 목청을 높혀가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주로 봤다. 측은한 마음으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자기 얼굴에 침 뱉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되레 뻔뻔하다고만 느껴질 뿐이다.
배고픔에 못 이겨 탈북을 한 새터민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짓고,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며 오열한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북한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말해주는 그 현장을 나는 지금 지나고 있다. 적어도 궁핍한 삶에 대한 그분들의 증언은 사실일 것이라고 한마음으로 통감한다.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 남의 이야기 아니다
방송에 출연해 북한동포들의 궁핍한 생활을 마치 남의 집 이야기하듯 '깔깔대며' 말하는 일부 새터민들의 태도는 또 한 번 나를 아프게 한다. 이런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방송사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북한동포들의 이야기는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은 '남의 모습'이 아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간혹 "절대로 북한에 쌀을 보내면 안 된다"고 말하는 새터민들도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 여성 새터민은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면담하던 중, 절대 쌀을 북한에 보내면 안 된다고 말했다"며 텔레비전에 나와 그렇게 말한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굶주림을 못 이겨 북한을 떠났다는 그 새터민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만일 내가 배를 곯다가 북한을 떠났다면 그 상황에서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나는 분명 이렇게 외칠 것이다. "전세계의 인류여, 어서 빨리 북에 쌀을 보내주세요, 지금 내 부모님과 형제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부탁이에요"라고 말이다.
또 일부 새터민들은 "쌀을 보내봐야 당 간부들이 다 가져가지 우리는 구경도 못 한다"고 말한다. 외부에서 보낸 쌀이 어디로 가는지, 실제로 그 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전해졌는지는 아무리 모니터링을 잘한다고 해도 알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쌀이 누구에게 갔는지 관계없이 북한 내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히 크다. 당 간부들에게 쌀이 모두 가 있든, 그 누구에게 가 있든, 북한에 들어간 쌀은 누군가가 현금으로 만들기 위해 장마당에 내다 팔 것이다. 그렇다면 장마당에 흘러나온 쌀들은 결국 쌀값의 하락 요인이 될 것이고, 주민들은 같은 돈으로 더 많을 쌀을 살 수 있게 된다.
▲ 라진-선봉에 살고있는 나의 사촌 여동생(맨 오른쪽)과 그녀의 남편(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사진은 2012년 5월에 촬영한 것. ⓒ 신은미
나는 이러한 시장의 이치를 라진-선봉에 살고 있는 내 사촌동생에게로부터 들었다. 재미동포인 사촌 여동생은 남편 그리고 세 자녀와 함께 올해로 16년째 북한의 라진-선봉에서 살고 있다. 사촌동생의 남편은 실리콘밸리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촉망받던 컴퓨터 엔지니어였다. 그는 1990년대 중반 소위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돕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북한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그곳 동포들과 함께 한마음이 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가며 살고 있다.(관련기사 : 미국서 잘나가던 엔지니어, 북한서 15년 살고있다고?)
그는 때때로 동남아에서 쌀을 수입해 지역의 북한 동포들에게 풀어놓기도 하는데, 수입한 쌀이 항구에 들어온다는 소식만 퍼져도 장마당에서는 쌀값 하락이 생긴다고 했다. 이 '시장의 원리'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그 어떤 쌀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고 본다.
복잡한 경제의 원리를 떠나서라도, 무슨 이유에서든 북한에 쌀을 보내지 말라고 간청하는 일부 새터민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굶주림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텐데 말이다.
▲ 두만강. 강 건너가 중국 땅이다. 사진은 2012년 5월에 촬영했다. ⓒ 신은미
한 여성 새터민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지금 이 강을 건너면 후에 다시 돌아와 어떻게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으며 조국은 또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는 말. 강을 건너기 전 뒤를 돌아보고 울고 또 울었다는 그녀는 북한을 떠날 당시 10대 후반의 어린 소녀였단다. 세상에 이런 효녀가 없고, 애국자가 따로 없다. 아마도 나였으면 밥을 굶게 한 부모를 원망하고 나를 방치해 둔 조국에 조금의 미련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강을 건넜을지 모른다.
내가 북한에서 만난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렇게 순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나라를 사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을 때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답한다.
북한은 지방의 생활 수준 향상에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결국 북한을 떠나는 동포들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것 뿐일 테니까.
함경도 산골짜기에도 희망과 미래가 있다
▲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를 끄는 함경도 아줌마 ⓒ 신은미
우리를 태운 버스가 명간군이라는 곳을 지나 칠보산이 있는 명천군에 들어선다. 군 경계선에 있는 교통표지판 옆으로 한 아주머니가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를 끌고서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저 짐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리고 저 아주머니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아니면 장마당으로? 힘겨워 보여도 빈 자전거보다는 흐뭇해 보인다.
▲ 트럭을 타고 가는 북한 주민들.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준다. ⓒ 신은미
그래도 내가 처음 북한을 여행했을 때보다는 시골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폐차했어도 벌써 오래 전에 했을 법한 고물 트럭의 짐칸에 사람들이 끼어앉아 낯선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건넨다. 인간이란 아무리 잘살아도 조금만 불편하면 인상을 찌푸리고, 아무리 못 살아도 조금만 나아지거나 희망이 보이면 미소를 짓는가 보다.
▲ 아이와 함께 어디론가 걸어가는 젊은 부부 ⓒ 신은미
아이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신겨 어디론가 나들이가는 젊은 부부가 보인다. 마냥 즐겁기만 한 아이는 엄마를 쳐다보며 흥에 겨워 걷는다. 길가의 돌멩이를 톡톡 굴려가며 인형같은 구둣발로 뛰어가듯 쫓아간다. 행여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질까 걱정스러워하는 아빠의 눈빛은 아이의 발길에 머무른다. 함경도의 산길에도 미래가 피어난다. 고까옷 입고 환한 모습으로….
▲ 나무심기를 권장하는 구호가 적힌 벽화 ⓒ 신은미
길을 따라 낮은 산에는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2011년 첫 북한 여행 당시, 회오리 바람이 쓸고 간 듯한 민둥산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가파른 산이든, 완만한 산이든 나무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옆 나지막한 동산에도 작은 나무들이 제법 모습을 드러내며 자라고 있다. 여름이라서 더 푸르러 보이는 듯. 마음이 편하다.
▲ 집 근처 언덕에도 나무가 자라고 있다. ⓒ 신은미
버스는 점점 더 깊은 산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숲은 더 울창해진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명천은 작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부디 오곡백과 풍성하고 온갖 해산물이 끼니마다 밥상에 오르던 '오랑아줌마'의 기억 속 고향산천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인간사 이야기가 모여있는 칠보산
▲ 칠보산 관광 안내도 ⓒ 신은미
어느 덧 차는 칠보산 입구에 진입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칠보산은 오묘한 기암절벽으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기암절벽은커녕 양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숲 때문에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우리가 탄 버스는 좁은 데다 패인 곳이 많은 비포장도로를 간신히 지나간다. 길 위에는 돌멩이들까지 널려있어 자칫 잘못하면 버스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 그래도 큰 인명피해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버스가 기울어진다고 해도 양옆으로 겹겹이 들어선 나무들이 버스를 힘껏 받쳐주고도 남을 것이기에, 절대 계곡까지는 굴러내려 가지 못할 것이다.
▲ 승선대(전망대)에 선 유럽 관광객들 ⓒ 신은미
얼마나 온몸에 힘을 줬으면 시간 감각도 굳어져 얼마 동안 산길을 올라왔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사방이 훤해진다. 드디어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버스도 무사히 전망대에 도착했다. 선녀가 올라온다고 해 승선대라 불린다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온갖 형상의 큰 바위들이 크게 파인 계곡을 따라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마치 연극 무대의 대형 세트처럼 보인다.
언뜻 금강산을 연상시킬만 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금강산의 오묘함과 백두산의 장엄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함경북도 칠보산 풍경을 공개합니다 ⓒ 신은미
이름 그대로 일곱 가지 보물을 지녔다고 해서 칠보산이라고 불린다는 이 산은 내륙에서부터 바닷가로 들어가며 내칠보, 외칠보 그리고 해칠보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수려한 산세에 홀려 있는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내칠보인지 외칠보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바다가 보이지 않으니 해칠보는 분명 아닐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처음 대하는 전망대이니 아마 내칠보가 아닐까 한다.
천태만상의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다. 천불바위·장군바위·기와집바위·배바위·피아노바위·송이바위·책바위·우산바위·원숭이 바위 등 온갖 우주만물과 인간사의 이야기가 한데 모여있는 듯하다.
▲ 송이바위 ⓒ 신은미
▲ 피아노 바위. 왼쪽에 연주자가, 오른쪽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는 형상이다. ⓒ 신은미
▲ 장군바위 ⓒ 신은미
그중 부부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두 부부가 포옹을 하는 모습이다. 이를 본 김정일 위원장은 이 부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 모습인지 설명했다고 한다.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그것'이 아직도 달려있는지 부인이 왼손을 바지 속에 넣어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단다.
▲ 부부바위 ⓒ 신은미
설명을 들으니 정말 꼭 그 모습이다. 그러나 바위에 대한 유머보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런 세속적인 농담을 했다는 사실이 되레 더 충격적이었다.
내게 김정일 위원장은 무시무시한 독재자로 각인돼 있었다. 딱딱한 인민복에 선글라스를 쓰고, 군 장성들을 대동한 그의 행보는 내가 어렸을 적 받은 반공교육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전 인민이 벌벌 떨며 그 앞에서는 감히 단 한마디 실언도 용납되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 그렇게만 알고 있던 그가 인간적인 유머를 했다는 게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다.
▲ 례문암. 몸이 바위에 닿지 않아야 백년해로를 한다고 한다. ⓒ 신은미
우리 부부가 꼭 가봐야 한다며 설향이가 례문암이라는 바위로 우리를 안내한다. 신기하게도 이 큰 바위 한가운데 작은 틈새가 있다. 부부가 꼭 껴안고 입맞춤을 한 채 바위틈을 지나가야 하는데, 몸이 바위에 닿지 않고 통과하면 백년해로를 할 수 있단다.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바위틈을 빠져나왔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개심사라는 발해 시대 절이라고 한다. '발해'라는 말이 나를 흥분케 한다. 발해가 우리 나라였던가! 발해의 유적이 한반도에도 있었단 말인가. 잊힌 우리의 제국 발해의 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껏 봐왔던 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까? 우리는 개심사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수양딸 설경이가, 아들을 출산했답니다 |
평양의 수양딸 설경이가 지난 9월 12일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주의성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백일 전까지 아기의 사진을 찍지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도 예전에는 그랬던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12월 20일이 백일인데, 그때 사진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사진이 도착하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