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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보다 많은 입양아'...왜 그들은 한국을 선호할까

[해외리포트] 50년 만에 개정된 입양 특례법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

등록|2013.12.04 12:07 수정|2013.12.17 15:19
미국의 I-94 (뉴욕과 시애틀을 잇는 동서횡단 고속도로)를 달리다 미네소타 어디 가게에 들러 물건을 고를 때, 캐셔나 다른 손님들과 몇 마디 주고받게 될 때, 그네들이 종종 묻는 말이 있다.

"넌 어느 나라서 왔니?"
"코리아. 알아?"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덧붙이는 말 중 대부분은 이렇다.

'내 친구, 친척 누가 코리아에서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다.'

이 경우 난 어찌 반응해야 할지 항상 난감하다. 조금 전까지 동등하다 생각했던 그들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에게 한국은 아직 전후 폐허가 복구되지 못한 땅, 그래서 가난하고 불쌍한 고아들을 '잘 사는 나라, 미국'으로 계속해서 입양 보내는 나라이다. 다른 곳보다 많은 한국 입양아들을 만날 수 있는 미네소타에서의 한국의 모습은 그렇다.

호수보다 많은 한국 입양아

▲ 영화제 자원봉사자 레비의 한국 이름은 마관철, 시각장애인으로 3살때 대구에서 입양됐다. ⓒ 최현정


흔히들 미네소타를 '1만 호수의 땅(The Land of 10,000 Lakes)'이라 부른다. 크고 작은 호수가 셀 수 없이 많다고 해서 붙어진 이 별명을 인용해, 사회학자들은 미네소타엔 호수보다 많은 한인 입양아가 있다고 말한다. 미네소타에는 많은 한국 아이들이 입양됐고 지금도 입양 되고 있는 곳이다. 전체 미네소타 주 한국계 미국인의 구성비를 보면 50%가 한국으로부터 입양되어 온 이들이다("Korean Looks, American Eyes", Kim Park Nelson).

"아..ㄴ..영…하..쎄..여."

머리가 하얀 초로의 남자가 어색한 한국어를 건넨다. 일본분이세요? 아니면, 중국인가…? 국적을 짐작할 수 없는 남자의 외모에 난 눈치를 살폈다. 나의 의도를 알아챈 남자는 조금 더 길게 천천히 말한다.

"캘리포니아서 왔어요. 입양됐어요. 전쟁 고아예요. 인천… 살았어요."

▲ '입양 정책과 개혁을 위한 모임' 운영진 ⓒ APRC


지난 11월 15~16일, 미네소타에 모인 모두의 사연들이 그랬다. 버려지고 방황하고 그러다 어른이 된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사람들.  남과는 다르게 시작한 인생의 첫 단추를 평생 트라우마로 갖고 사는 이들. 바로 미국 입양인들이다.

그 '입양아'들이 미국 미네아폴리스에 모였다. 입양인들 스스로 준비해 만든 영화제 '미네소타 인종간 입양 영화제 (MNTRFF: Minnesota Transracial Film Festival 2013)'와 콘퍼런스 '입양 정책과 개혁을 위한 모임-입양 담론의 재구성(The Adoption Policy and Reform Collaborative Conference: Reframing The Adoption Discourse)'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나는 가슴 속에 항상 응어리가 있었어요. 뭐라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분노의 실체를 우연히 한 연극무대에서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화(anger)'였습니다."

부천에서 태어난 케이티(katie Hae Leo)는 미국으로 입양됐다. 예민학 문학 소녀로 자란 그녀가 오랫동안 자신을 억누르던 가슴 속 응어리의 실체를 알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친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자괴감은 끊임없이 그녀의 삶을 흔들었다.

"미국 엄마는 항상 우리를 못 생겼다고 했어요. 절대 한국말은 쓰지 못하게 했고, 고등학교부터는 우리 힘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어요."

8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쌍둥이 자매는 13년 만에 한국의 친부모를 만난다. 그들은 가난때문에 부자 나라로 보내진 아이였지만, 양부모의 학대로 몸도 마음도 성치 못하다. 다큐멘터리 <고향을 찾아서>(Searching for Go-Hyang)에 나오는 쌍둥이 자매는 언어는 물론 여전히 가난한 친엄마가 만들어준 한국 음식들이 모두 낯설고 어색하다.

"난 한국 전쟁 중 태어났고 아버지는 미군이었어요. 근데 4살때 갑자기 사라지셨죠. 한국인 엄마는 나를 시장통으로 데려가 길거리를 가리키며 절대 돌아보지 말라 하셨어요. 그게 엄마와의 마지막 인사였지요. 누군가 날 고아원으로 데려갈 때까지 난 한동안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였어요."

▲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사라지고 한국인 어머니는 그를 길거리에 버렸다. 부랑아로 살다 고아원에 갔지만 거리에서도 고아원에서도 토마스는 항상 혼혈이라 놀림받았다. ⓒ 최현정


전쟁고아(G.I. baby)로 혼혈이라 놀림받던 토마스(Thomas park Clement)는 1년 반 뒤 고아원에서 미국으로 입양된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아저씨가 된 토마스는 자신이 버려진 그 길거리를 잊지 못한다.

그들 가슴에 남아 있는 '상처'

이틀에 걸쳐 만난 수많은 입양인들은 그들의 상처를 얘기했다. 교수, 작가, 배우, 사업가, 학생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듯 보이는 이들이지만, 그 속엔 책 몇 권은 될 다양한 사연들이 있었다. 인종도, 사연도, 사는 곳도, 현재 위치도 모두 다른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동력은 바로 '입양아'였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미래까지 옥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들은 궁금했고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소리쳐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 열정적으로 소통하고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한국 어린이 해외 입양 현황 (1953-2011)한국 전쟁 이후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던 해외 입양은 1958년부터 공식 집계가 이루어진다. 1987년 , 한해 8837명이라는 최대 인원을 해외로 입양 시킨 이후 1990년 2962명으로 2000명 수준을 유지하다 정부 차원의 해외입양 억제 정책이 시작된 2006년부터 1000명대로 떨어졌다. (자료 출처: 재단법인 중앙 입양원, 보건복지부) ⓒ 최현정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 외국으로 입양된 한국 어린이의 수는 약 17만여명 (보건복지부, 국가통계청 자료)이지만, 전시와 전쟁 직후,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인원까지 포함해 외국으로 입양된 한국 어린이 숫자는 약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중 미국으로 입양된 숫자는 12만명으로 전체의 약 60~70%에 해당한다.

미국내 한국 어린이 입양은 역사가 좀 독특하다. 1948년 백인 가정에 미국내 흑인 어린이 입양이 처음 시작된 후, 1953년에 공식적인 한국 고아 미국 입양이 이루어진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58년,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의 백인 입양이 합법화 됐을 정도로 미국내 아시아 어린이 입양은 매우 낯선 문화였다. 

그 후 미국내 입양이 점차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가족 계획으로 인한 미 국내 출산율 저하와 입양 가능 숫자의 부족 그리고 시민운동을 통해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이해가 커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중산층의 증가로 입양 비용에 대한 감당이 가능해진 경제적 상황을 거론한다. 

▲ 참가작 중 한국전쟁과 입양문제를 다룬 'Memory of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에 관한 기억 관람 후 참가자들이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사진을 찍고 있다. ⓒ 최현정


국외적 이유로는 1950년대 중반 부터 미국은 인도주의 계획 (Humanitarian Project)이라는 이름하에 해외 어린이 입양을 활발히 전개한다. 이는 미국의 해외 국제 관계 정책에 뿌리를 둔 것으로 미국과 끈끈한 유대가 강한 나라- 한국, 베트남, 과테말라와 이전 공산주의 연계국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구제(Child Save) 형식의 입양 정책이었다.

특히 한국 고아의 입양은 미국 역사상 첫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라는 불명예를 입양이라는 휴머니티 이미지로 포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원치않은 냉전의 희생자가 되어 미국으로 쫓겨온 이들에 대한 다큐멘타리 <잊혀진 전쟁에 관한 기억>(Memory of Forgotten War)을 만들어 이번 영화제에 참가한 램세이 임(Ramsay Liem). 그는 한국 전쟁을 '냉전의 시작이자 뜨거운 전쟁'으로 표현했다. 그 냉전은 수 만의 한국 고아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무려 60여년 동안. 

여전히 쉬운 입양국, 한국

"내 친척이 인도 아이를 입양했는데, 영양상태가 나빴는지 많이 말랐었어. 근데 지금은 살이 올라 참 귀엽더라. 나도 지금 입양을 알아보고 있는데… 한국 아이가 좋을 것 같아."

수업에 관한 상담을 하던 나의 '대학작문' 선생인 크리스탈이 한국인인 내게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 올해 초에 국가 차원에서 입양을 금지시킨 러시아나 300일 넘게 기다려야 하는 중국 입양보다 쉽다는 얘기와 함께.

출산율이 낮아졌다고 말은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매년 600~1000여 명의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 2011년 한국은 러시아, 중국, 에티오피아에 이어 어린이 미국 입양국 4위를 달리고 있다(해당 사이트 참조: http://adoption.state.gov/about_us/statistics.php).

올해 초, '우리 아이들을 수출하지 않겠다'며 자국 고아의 미국 입양을 전면 금지한 러시아가 빠지면 그 순위도 변동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한국 어린이 입양은 나의 선생 크리스탈이 말한대로 어느 나라보다 쉽고 편하다. 상당한 비용(약 3만8000달러, 한화로 3800만 원)만 지불하면 직접 한국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손쉽게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광고되기도 했다(인권단체들이 관련 단체에 항의해서 철회되었다).

이는 에티오피아, 가나, 아이티, 온두라스의 경우는 2차례 입국, 중국, 콜럼비아, 코스타리카, 인도, 홍콩은 양부모가 7주간 해당국가에 머무르며 입양절차를 직접 밟도록 하고 있는 조항과 비교해도 엄청나게 편리한 방법이다. 러시아는 이전에도 미국 양부모가 세 차례 자국을 방문하게 했다. 비록 피치 못한 사정으로 자국의 아이를 외국으로 보낸다 해도 아이의 인권을 위해 새 부모에게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하는 것이다.

작년 8월 5일부터 한국에서도 입양특례법이 개정돼 시행되고 있다. 입양기관을 통해 해외로 보내진 입양인들이 주축이 돼 50년 만에 실로 어렵게 개정된 입양에 관한 법이다. 전쟁 이후,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외국으로 보내져 살았던 이들이 그들의 경험과 시행착오, 문제점들을 모아서 모국의 비인권적인 법을 바꾼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국제기준으로 본다면 여전히 국외입양이 쉬운 나라다.

5·16 군사 쿠데타 집권 후 처음 통과된 '고아 입양법'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 한 후, 처음으로 통과시킨 법은 '고아 입양법'이었다. 이 법 이후 전쟁 고아가 아닌 아이들도 낯선 나라에서 인종과 언어가 다른 부모를 만나 사는 게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 후 개정된 고아입양법의 이름은 '입양 절차와촉진에 관한 특례법'으로 입양기관의 역할이 더 커지고 활발해지게 된 계기를 만든다. 법의 보호를 받은 대형 입양 기관들이 주축이 되어 그동안 해외 입양은 '촉진'되고 '장려'되었던 셈이다.

현재, 새로이 개정된 입양특례법은 입양에 관한 국제 조약인 헤이그 입양 협약을 비롯해 여러 국제 법률이 기준이 되었다. 아이를 출산한 산모에게 아이와 함께 7일간 산후 조리를 할 수 있게 한 것은 자신이 낳은 아이와 눈도 못 마주쳐보고 입양기관이 인수해 가던 예전 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친생 부모와 아기와의 연결 고리를 차단시키기 위한 친생자 등록 불이행을 묵인해 입양아를 '기아(버려진 아이)'로 만들었던 기존의 법률과도 매우 다르다.

예전의 조치들은 성인이 된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과 친가족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한국 아이는  입양 부모와 입양 국가에겐 최고의 상품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가정법원이 양부모를 불러 부모의 신분과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갖게 한 것, 새 법에 의한 판결 과정에서 시행되고 있는 이 조치는 우리의 아이들을 외국땅으로 보내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해야 하는 최소의 예의이지 싶다.

이번 행사에서 나는, 5살 때 중국 길거리에 버려져 미국으로 입양된 제니(Jenni Fang Lee)를 만날 수 있었다. 조그만 키에 친화력이 좋은 그녀는 이번 행사의 참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길거리에 버린 다섯살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중국 정부의 한자녀 정책의 결과다. 아직 학생인 그녀는 정치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다. ⓒ 최현정


"한국의 입양 역사는 나를 포함한 중국 입양인들에겐 반면교사입니다. 한국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중국 입양인들은 한국 입양의 역사를 공부 중입니다. 무엇보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정치는 입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11월 15일은 17년 전, 그녀를 길거리에 버리게 한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이 노동 인력 부족으로 수정된다는 뉴스가 나온 날이었다.

▲ 미네소타 입양 콘퍼런스 참가자와 주최 측이 함께 찍은 사진. ⓒ 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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