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배추를 절였는데, 고춧가루가 없어 '아뿔싸'

섬진강변 두계마을 이야기... 첫 김장을 하다

등록|2013.12.03 16:05 수정|2013.12.03 16:06
11월 중순이 넘어 서자 이 집 저 집에서 김장을 하기 시작했다. 요즈음은 김치냉장고라는 편리한 물건이 있어서 김치가 시어질 염려가 없으니 날이 추워지기 전에 김장을 하는 것이다.

배추 절이는 양이 엄청난데 1년 동안 두고 먹을 김치 말고도, 자식들에게 보낼 것까지 담그려니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식들에게 보내는 재미가 없으면 마을사람들은 농사지어 철철이 갈무리하는 열의가 반으로 팍 줄어들 것 같다.

▲ 이 정도 담가야 김장이제 ⓒ 김영희


그리하여 "김장했소?'가 이즈음 인사가 되었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이런 인사를 하면 나는 좀 난감해진다.

"김치냉장고가 없어서 지금 못해요."
"아니 김치냉장고는 있어야제. 없으면 땅에 묻어."

김치냉장고가 없다는 핑계로 김장을 미루고 있지만 실은 배추절이는 일이며 속 만드는 일이며 이런 것에 영 자신이 없다. 과천에 있을 때는 주문한 절인 배추 댓포기도 쩔쩔매며 이웃들하고 함께 담근 전력이 있어서, 저렇게 바깥에 큰 통에 배추를 절이고 씻고 하는 본격적인 김장이 도무지 엄두가 안나는 것이다.

"아줌마 이리 좀 와봐여."
"예?"
"우리밭에 배추 좀 가꼬가잉. 큰아들한테 보낼라고 했는디 안 가져간당만. 즈그 산디서 얻었다고."

올해는 값이 떨어져 배추가 흔해져버렸다. 무려 마흔 포기나 얻은 배추를 집까지 수레로 날라오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 배추 좀 가져가라는 논갓집 배추밭. ⓒ 김영희


"나는 어쩌까... 배추 절이는 것도 잘 못하겄는디"

김장배추도 쌓아놨겠다, 이제 정말 김장을 해야하는데 나는 그저도 미루기만 하면서  우리 바로 아래 사는 연심이네 눈치만 봤다. 연심이네가 김장하면 나도 옆에서 그대로 따라할 속셈이었다.

그런데 내가 믿고 있던 연심이네까지 슬그머니 김장을 해버렸다. 낮에 일갔다 와서 밤중에 했단다. 날이 추워지니 우리 김장도 더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쩌까 큰 다라이도 없고. 배추 절이는 것을 잘 못하겄는디."
"우리 다라이 갖고 가. 니열(내일) 아침 내가 가볼텡게."

니열 아침이 됐고, 일머리를 모르는 나는 허둥거리기만 하는데 연심이네가 나타나자 일이 척척 진행이 되었다. 

"자, 배추는 여기 비닐우에다 부려놔. 그라고 반으로 가르고 칼집을 넣야해."

내가 배추를 가르면 연심이네는 물에 한 번 담갔다가 한잎한잎 들추고 소금을 뿌리는데 손이 빠르기도 했다. 맨 위에 대야를 올려 놓고 물을 가득 담아놓은 것으로 절이는 일은 끝이 났다.

▲ 집집마다 김장이 끝나자 맨 끝으로 마을회관에서 동네김치를 담근다. 겨우내 공동으로 먹을 김치다. ⓒ 김영희


"이제 그만 절여도 되것어. 씻어서 받쳐놔야쓰것네."

저녁무렵 다시 온 연심이네가 절인 배추를 후적후적 씻어서 채반에 척척 걸쳤다. 그 무거운 채반을 둘이서 낑낑대며 방안에 들여다 놓으니 벌써 김장을 다 한 것처럼 뿌듯했다.

'됐다. 이제 속만 만들면 된다.' 

하기는 해봤는데... 손에 익은 것이 아니라 아리송했다.  

"찹쌀죽을 쒀서 마늘, 청각하고 젓갈은 미리 섞어놔야제. 고춧가루는 더 나중에 넣어. 무시도 비빌 때 채썰어 넣면 되고" 
"예"

연심이네 훈수에 대답은 잘해놓고  그제사 보니 집에 고춧가루가 없다. 김장을 한다면서 고춧가루 준비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우리도 고춧가루는 얼마 없는디... 얼른 이장네 가서 물어봐."

둘이서 이장네로 가자 이장댁이 어이가 없어 웃는다. 

"고춧가루는 우리 쓸것만 있는디 어쩌까. 그라지 말고 고추를 낼 아침 방앗간에 가꼬가서 빻아오면 되야."

이장댁이 고추푸대를 들고 나왔다.

"이것 우리 먹을라고 둔 것인디..  몇 근이나 있어야 쓰까. 그래도 닷근은 있어야 헐것이여이."
"고추를 닦아야 할까요?"
"우리 먹을 것이라 다 닦아논 것이여. 꼭지만 따불면 돼. 아조 여기서 꼭지도 따갖고 가."

닷 근이 넘어서 여섯 근이나 되는 고추를 방안에 펼쳐놓고 아닌 밤에 꼼짝없이 고추꼭지를 따주기까지 하는 이장댁과 연심이네, 아무래도 생초짜 이웃을 잘못 만났다. 고맙다 못해 웃음이 나온다.

이튿 날 아침 일찍, 난생 처음 고추방아 찧으러  읍내 방앗간으로 갔다. 방아기계를 세군데 거쳐서 고추가루가 나오는 것도 난생 처음 보았다. 

▲ 방앗간 고추방아 ⓒ 김영희


낮에는 동네 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서 점심을 먹느라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 드디어 연심이네와 이장댁이 와서 무우를 채치고 속을 만들어 버무렸다. 두 사람 손이 빠르니 나는 김치가 된 배추를 날라 독에 넣기만 했다.

다 끝나고 나서는 셋이서 둘러앉아 뭇국에 한 그릇에 소주 한잔. 캬. 끓고 있는 보쌈 고기는 아직 익지 않아서 먹지도 못했다. 못 말리는 나의 일솜씨를 어째야 할지.

▲ 우리집 김장 ⓒ 김영희


마을 수준으로 보면 얼마 되지도 않은 양을 담그면서 수선깨나 떤 올해 김장이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