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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이 필요해!"

연극 속의 노년(42) : <복서와 소년>

등록|2013.12.07 14:20 수정|2013.12.07 14:20

연극 <복서와 소년> 포스터 ⓒ 학전

* 이 기사에는 연극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70세 노인. 별명은 왕년에 권투선수였을 당시 부르던 대로 '붉은 사자'. 아차하는 순간 주먹을 휘둘러 현재 독방을 쓰고 있는데 방에 누군가 찾아온다.

학교에서 일진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열일곱살 아이. 이름하여 '셔틀'. 온갖 심부름을 다하다 못해 이번에는 '짱'의 죄까지 뒤집어쓰고 사회봉사 명령을 받아 요양원에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

성깔있는 두 사람이 만났으니 조용할 리가 있나. 서로를 쳐다보는 눈길은 사납기 이를 데 없고, 오가는 말씨 또한 거칠기 짝이 없다. 그래도 사람 사이란 신기해서 매일같이 부대끼다 보면 말이 섞이고 관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법.

어머니와 단둘이 남쪽으로 피난 와 온갖 고생 끝에 권투선수가 되고 결혼해 딸도 낳았지만, 월남전에 참전한 사이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내와 딸은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후의 인생은 오로지 딸을 찾기 위해 살았다.

권투를 그만 둔 뒤에 버스 운전을 하다 인사 사고를 내 복역을 했고, 결국 요양원에 들어오게 된 것. 그러나 실제 건강은 굳이 요양원에 있을 필요가 없는 상태. '붉은 사자'의 70년 인생사와 함께 '셔틀'의 생활도 하나씩 드러난다. 일진에게 맞고 치이고 놀림 받고 심부름에 시달리는 매일의 괴로움.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이는 그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고, 편의점 알바 누나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다.

이리저리 부딪치던 두 사람은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연다. 겉으로는 여전히 퉁퉁거리면서. 셔틀은 붉은 사자의 오래된 물건을 팔아 돈을 마련해 오고, 붉은 사자는 셔틀이 고민을 하나씩 해결할 수 있도록 조언하면서 권투를 가르쳐준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자신을 붙잡아주는 그 무엇도 없는 붉은 사자는 죽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는데 셔틀은 정확하게 그 마음을 읽어낸다. 그리고는 그가 후배가 살고있는 섬으로 떠나도록 부추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때, 더 이상은 길이 없다고 여길 때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답은 물론 사람 숫자만큼 다 다르겠지만, 혼자일 때와 누군가 곁에 있을 때 그 답에 달라질 거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곁에 있는 누군가가 반드시 가족이거나 아는 사람일 때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붉은 사자와 셔틀처럼 남남일지라도, 평생 얼굴 마주보는 일 없을 것처럼 굴던 사람들일지라도 마음으로 만나기 시작하면 서로가 달라진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신기하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 있지 않을까.

붉은 사자와 셔틀은 아마 서로를 잊지 못하리라. 아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남은 생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겼고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나이 들어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동시에 소중한 일. 또한 손아랫 사람에게 받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 우리들 마음 너무 단단하게 닫고 살 일이 아니다.

세상살이 고단한 노인과 아이가 만나 서로가 새 걸음을 내딛도록 힘을 주었다. 물론 앞으로의 삶도 그리 녹록찮겠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기 이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진심과 진심이 통하는 진정한 만남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서로가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연극 <복서와 소년> (번안, 연출 : 김민기 / 출연 : 이성욱, 남문철, 서인권, 김태경) ~ 12월 21일까지, 학전블루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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