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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들들아, 부디 이 책을 읽길 바란다

[서평] 최현숙의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등록|2013.12.09 09:58 수정|2013.12.09 09:58

▲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 이매진

1987년 1월 한 달 동안 나는 가방을 만드는 가내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 있다. 군대 가기 전 용돈이나 벌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직원이 10명쯤 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 중 중학교를 갓 졸업한 17살된 여학생들도 두세 명 있었다. 오빠 학비와 남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서다.

1992년에는 부산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다. 고등학생을 담당했는데 여학생이 있었다. 4~5명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1987년과 1992년 딸들은 이렇게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다. 아들들이 누나와 여동생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직접 만난 그 학생들만 아니라 1970년대 이후 약 20년 동안 대한민국 딸들은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 나 역시 누나와 여동생 도움을 받았다. 아니 훨씬 이전부터 이 땅의 딸들이었던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 삶이 다 그랬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흔해빠지고 사소한 늙은 여자들"이지만, 그들이 입을 통해 풀어낸 자신들 삶은, 명함으로 살아온 힘있는 여성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함'을 주는 책 한 권이 있다. 한 마디로 '엄마 냄새' '할머니 냄새'가 난다. 김미숙(89)·김복례(87)·안완철(81)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을 예수와 충돌하며 가난을 선택했다. 여성과 사랑하며 더 큰 자유를 얻었다는 최현숙이 이들을 만나 나눈 이야기(구술)를 묶어 펴낸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이매진)에 이들의 삶이 담겨있다.

책은 한국 사회 여성들의 목소리로 한국 현대사를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로 출발한 <15소녀 표류기> 첫 번째 시리즈다. 출판사 이매진은 "'15소녀 표류기'는 다양한 여성들의 개인사를 묻고 들으며 남성들 역사, 거대 서사 중심 역사에 가려온 여성들 새로운 역사를 발굴한다"며 "'386 세대' 40대 여성들, '88만원 세대'(삼포 세대)인 20~30대 여성들 그리고 동시대에 성장하고 있는 10대 여성들까지 모두 다섯 권으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살아온 평범한 여성들, 그러나 시대적, 역사적 조건에 순응하지만은 않은, 때로는 맞서 싸우고 때로는 협상하며 삶의 전략을 세우지만 평범하지만 비범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한국 사회가 꿈틀대온 백여 년의 역동적인 역사를 돌아보고 싶었다.조금씩 시차를 두고 같은 시대를 다르게 살아나간 여성들의 이야기가 흘러가고 겹쳐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자이크처럼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려본다."(본문 5~7쪽)

평범하지만 비범한 여성들

1925년 평양에서 난 김미숙 할머니는 167cm 훤칠한 키에 체중은 늘 52kg을 유지하는 분이다. 하지만 살아온 삶은 녹록지 않다. 정신대 뽑혀가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결혼을 했다.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하지만 "신랑이 그 지방 젤 부잣집의 첩 다섯 중 넷째 첩의 외아이들"었고, "댄스홀 나가면서랑 미군들이랑 살면서, 애를 수도 없이 떼었어, 낳은 적은 없다"며 자신의 삶을 풀어낼 때는 숙연함마저 든다. 그리고 그의 일갈은 목사인 나를 뜨금하게 한다.

"그러다가 백이믄 아흔 다섯은 남자 혼자 미국 들어가든가, 안 나타나든가 하구, 그 새끼는 여자 혼자 책임이 되는 거야. 그렇게 혼혈아 낳아서 많이들 결국에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고 하는 거지. 붙들고 키운 사람들 보면, 어린 것들이 손가락질당해서 학교도 못 가고 직장도 못 다니고, 그러드라고. 나 하나로 끝나면 될 걸 왜 애까지 낳아서 그 설움을 또 만드냐구? 그걸 회개하라니 말이 돼?"(본문 101쪽)

"지네들 하느님은 어쩐가 몰라도, 내 하느님은 딱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있는 하느님이야, 복음에도 나오잖아,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라는 할머니 말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정말 회개해야 할 목사들이 많다. 하지만 자신들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신자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목사들이 많다.

"충현교회는 이남에서 제일 크고 부자 교회였어. 그 교회를 내가 삼십 년 조금 못 되게 다닌 거야. 그 교회가 이십 년 전에 백오십억을 들여 새로 지었어. 지금 다니는 저 옆에 교회는 사억을 들여서 다시 짓는대나 어쩐대나. 백오십억 들일 때도 나는 건축 헌금을 한 푼도 못줬어. 지금도 마찬가지구. 아들 목사 만들어 바치느라 돈 들어간 걸로, 내 혼자 생각으로 퉁친 거야."(본문 110쪽)

할머니는 아들이 목사다. 목사 아들을 두었지만, 수백억 원짜리 예배당을 짓는 헌금도 한 푼 내지 못했다는 말에 가슴이 아프다. 하나님이 이해하실 것이다. 예수님 가난한 과부가 넣은 전 재산 동전 두닢이 부자가 자랑스럽게 넣은 뭉칫돈보다 더 복되다고 하셨다. 할머니게 돌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먹어도 먹어도 몸서리치게 쓴 약"

올해 여든여섯 살인 김복례 할머니는 해방 두 해 전 정신대를 피해 이웃 동네 남자와 혼인을 했다. 하지만 남자는 한 달만에 징용에 끌려갔다. 무엇보다 매독에 걸린 사람이었다. 다른 남성과 혼인을 다시 했지만, 할머니 몸은 망가질 때로 망가졌다. '구전단'과 페니실린을 먹고 얼굴이 뭉개졌다.

"구전단을 화로에 넣고 불을 피워서, 그 연기를 코랑 목구멍으로 들이마시는데, 얼마나 독한지 입과 목이 나무통처럼 부어서 물도 못 넘기겠더랑게. 구전단이 얼마나 독하냐면 그게 살에 닿으면 살이 패여. 그려서 그걸 먹으려면, 구전단을 으깬 다음 밥에 싸서 씹지를 않고 삼키기도 했다니께. 그렇게 먹어도 몸서리치게 쓴 약이야. 그런데 그렇게 해도 부스럼이 낫지 않자 묘량서 순경질하던 큰오빠가 손가락만 한 페니실린 한 병을 가져와서 그걸 주사로 맞고는 입이랑 코 근방 곪은 살들이 쑥쑥 빠지고 떨어지면서 코 둔덕이 없어지더랑게. 당시 페니실린 한 병 값이 통보리 한 말 정도라고 그러드먼. 그때부터 콧구멍 하나만 이렇게 얼굴 가운데 흉터가 돼서 남고, 목젖도 없어진 거고 이도 빠지기 시작한 거여."(본문 133쪽)

얼굴 뭉개진 여성, 그 삶을 어떻게 짧은 이야기를 통해 다 담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평생 동안 이어진 심한 안면 장애와, 극빈한 여성 가장의 삶 등을 감수할 각오를 당시의 김복례가 미리 했을 리가 없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남의 집 머슴살이와 행랑채살이를 하며 줄줄이 딸린 식솔들을 챙겨야 했던 남편"을 미워하기 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김복례 할머니는 그래도 "남편이 자신에게 잘 해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죽고 자파도, 새끼들 때문에"... 아들이여, 가슴에 새기라

이게 우리네 할머니와 어머니가 살아온 삶이다. 삶의 무게와 깊이만 조금씩 다를 뿐. 손가락질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배고픔도 피해가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무서웠제, 아, 보리가 익기도 전에 보리 모개를 따다 솥에 살살 볶아서 말린 다음 맷돌에 갈아서 고구마 순하고 같이 죽 끓여 먹기도 혔어"라는 말에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나는 솔직히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이렇게 천하게 살 바에는 죽어버리자는 생각을 수도 없이 혔어. 핏줄한테 설움 받는 날이면 더 죽고 자팠지. 맨맞허니 귀님한테나 화풀이를 하고 욕을 하고는 했지남, 밤 깊어 애들 자고 있으면 혼자 산에 가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집 뒤에 진뱅이네 산이 내 울음터였어. 나 죽는 거야 간다현디. 저 새끼들이 어찌될랑가 생각허면 맘대로 죽을 수가 있어야지. 죽어지지가 않았어"(본문 154쪽)

"천하게 살 바에는 죽어버리자는 생각을 수도 없이"하고, "죽는 거야 간다현디"는 말이 가슴을 후빈다. 할머니만 이렇게 산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이 수 없이 이런 생각을 했고,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저 새끼들", 곧 아이들 때문에 질긴 생명을 이어왔다. 이 땅의 자식들, 특히 아들들은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새겨야 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없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이 구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구했다. 이름없는 여자들이.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한 살인 안완철 할머니는 "양반집에 시집와서 종년으로만 살아왔다"며 "양반이라면 이가 갈린"고 한다. 이 한 마디에 그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팍팍했는지 알 수 있다. 세 할머니를 글을 통해 만나면서 문득 첫 결혼 11년 동안 잠자리 한 번하지 않고, 두 번째 결혼은 딸 하나 낳고 홀연히 떠나버리고, 아버지를 만났던 우리 어머니가 생각났다. 이분들을 만나게 해준,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덧붙이는 글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최현숙 지음 ㅣ 이매진 펴냄 ㅣ 1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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