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자들의 비공개 모임, 용기 내어 가봤더니
[어느 알코올중독자의 고백⑥] A.A 모임 참석 후기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포스터 사진 ⓒ 이니셜 드로덕션
"… 내가 드디어 짝을 만났군… 이걸 사주다니 감격했어… 어서 술로 채워야지…."
대학교 2학년 때인가 개봉한 영화인데 개봉관에서만 세 번, 그 후로도 비디오, DVD까지 거의 열 번 가까이 본 영화다. 스팅의 OST를 들으며 세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벤을 흉내내어 술을 마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도 나는 생애 최고의 영화로 주저없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꼽는다. 이런 게 진정 알코올 중독자스러운 거다.
영화 이야기로 여섯 번째 글을 시작한 이유는 이번 주제가 바로 A.A 모임(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흔히 단주모임이라고 불리는 A.A(Alcoholics Anonymous) 모임에 대해서 생소한 이들이 더 많을 테지만, 혹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영화 속 장면을 통해서다. 그러다 보니 A.A 모임의 일반적인 이미지로 <남자가 사랑할 때>의 맥 라이언이나 <28일 동안>의 산드라 블록과 같은 미모의 여성이 포함된 화기애애한 대화 분위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내가 A.A 모임을 가게 된 이유는 어쩌다 보니 알코올상담센터의 상담 약속이 3주 후로 잡히기도 했고, 센터에서의 상담만으로는 나의 알코올에 대한 갈망을 억제하기에 2%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그리고 나를 다독여주고 용기와 희망을 줄 것만 같은 A.A 모임에 대한 기대와 환상 같은 것이 작용했으리라. 일종의 구세주와 같은….
▲ 알코올중독 치료 관련 서적공부를 통해 알코올 중독에 대해 깊이 알아가다 보면 단주에 도움이 된다 ⓒ 이정혁
우선은 A.A 모임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A.A의 정의는 음주를 조절하는 능력을 잃어 버리고, 음주의 결과로 여러 가지 문제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 남녀들의 모임이다(출처: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 홈페이지). 쉽게 말해, 술을 조절해서 마시는 게 어렵고, 술로 인해 각종 사고를 일으킨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연재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내 스스로가 알코올 중독자임을 시인했으며, 상담센터의 진단 및 상담 결과도 중등도 이상의 알코올 의존 및 남용을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으므로 알코올 중독자의 한 사람으로 모임에 참여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셈이다.
실제적으로 A.A의 멤버가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술을 끊겠다는 열망 하나뿐이다. 입원 기록이나 신분 증명, 기타 가입 절차 따위는 전혀 없다. 그저 본인이 술을 끊어야겠다는 의지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느 모임이든 참석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대도시의 경우 매일같이 모임이 진행되므로 본인의 의지만 충분하다면 언제든 참석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도 단주의 열망을 가득 안고 인근 대도시의 A.A 모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아는 사람 만날까봐 다른 도시로 간 건 아니고, 불행히도 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는 A.A 모임이 없다).
"제가 살기 위해 여기에 나옵니다"
정상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퇴근했음에도 불구하고, 퇴근길 고속도로 정체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모임 시작 시간이 7시인데 길 위에서만 한 시간 반을 허비했다. 거기에다가 내비게이션의 안내로 최종 도착한 곳은 쌩뚱맞은 아파트 단지 주차장. 근방을 삼십여분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모임 장소를 찾았다. 시간은 이미 8시를 지나고 있었다.
A.A 모임은 크게 공개모임과 비공개 모임으로 나뉘는데, 공개모임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알코올 중독자와 그들의 가족, 술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술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공개된다는 말은 아니다. 지나가다 궁금해서 한 번 들러봤어요, 이러면 곤란해진다. 공개모임에서는 새로 나온 멤버들에게 A.A 프로그램을 간단히 소개하고, 일부 멤버들의 경험담을 공유하게 된다. 반면, 비공개 모임은 알코올 중독자에게만 해당된다. 비공개 모임은 중독자간에 경험담이나 현재의 상황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단주의 의지를 다지는 자리다.
첫날은 때마침 공개모임이어서 사회복지사를 준비 중인 여 선생님 한분이 참관하고 계셨다. 거의 한 시간을 늦게 도착한 나로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굉장히 뻘쭘했다. 밖에서 5분 가량 서성대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10분 가량 내년도 봉사자를 선출하고는 바로 모임을 정리하는 것이 아닌가? 자리를 정리하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분들께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고 모임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그저 참관인으로 참석한 줄 알았던 분들이 한두 분씩 인사를 건넨다.
▲ 알코올 중독은 하나의 질병이다알코올중독을 신체적 질병차원으로 접근할 때 사회적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 이정혁
그리고 밖으로 나와 담배 한 대씩 피우는 시간. 거의 모든 선생님들(A.A 모임은 익명을 최우선하므로 호칭은 모두 선생님으로 통일한다)이 줄담배를 피우는 그 속에서 나는 A.A 모임에 대한 나름의 가벼운 상상을 깨끗이 지워야만 했다.
일단, 모임에 나오는 분들은 나처럼 술이나 한 번 끊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수차례의 입원 생활 경험이 있는 분부터 현재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분, 십 년 이상을 병원 생활을 하신 분까지, 나는 그 분들에 비하면 햇병아리 중에서도 알에서 갓 부화한 존재였다. 그만큼 그 자리에 나온 모든 분들의 알코올 중독 경험은 심각했으며, 그분들에게 있어서 A.A 모임은 절실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여러 선생님들이 한마디씩 건네는 자신의 경험을 들으면서 '격'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분들이 겪어 온 단주의 과정은 생존의 몸부림이었으며, 진실했고, 때론 엄숙하기까지 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소풍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모임에 참석한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선생님 중 한 분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저는 제가 살기 위해 여기에 나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과연 내가 이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것이 잘한 일인가 고민이 든다. 알코올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가족과 이별한 그 분들에 비해 나의 단주 결심은 너무 배부르고 낭만적인 선택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A.A 모임의 참가 조건에 대해 다시 상기해 본다. 술을 끊겠다는 열망. 모임에 참여하는 분들에 비해 알코올로 인한 문제나 해결 과정 등이 빈약할지언정, 술을 끊겠다는 열망만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장기간의 입원 생활 후에도 실패했던 분들이 모임을 통해 어떻게 단주가 가능해졌는지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알코올 중독은 질병이다. 이미 세계보건기구와 미국의사회에서도 당뇨나 암과 같은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어떤 병이든 제대로 진단을 내려서 초기에 치료를 하는 것이 예후가 좋다. 나 역시도 초기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치료하고자 제 발로 걸어갔으니 완쾌할 때까지는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틀 뒤인 비공개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렇게 참석한 비공개 모임을 통해 나는 단주의 필요성에 대해 확신을 얻게 된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맑은 날에도, 눈·비 오는 날에도 생각나는 '낮술'
▲ 낮술에 대한 동경은 애주가들이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 이정혁
너무 진지한 이야기를 오래 했다. 이제 여담을 풀 차례.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본 글의 내용보다 뒤에 사족처럼 다는 여담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내용이 알코올 중독이다 보니 좀 딱딱하고 어두워질 수 있어서 양념으로 몇자 적기 시작한 미사여구인데… 부디 주객이 전도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의 주제는 낮술이다.
눈이 내릴 것만 같은 하늘, 가슴을 죄여 오는 실내의 답답한 기운들, 직장 내에서 받는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 이런 날은 모든 걸 박차고 뛰쳐나가서 낮술을 마셔야만 한다!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실제로 대학교 때는 수업 중에 내리는 눈 또는 비를 바라보다가 몰래 강의실을 빠져 나와 낮술에 취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낮술의 치명적 유혹. 우선 낮술과 날씨의 상관관계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자.
먼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눈부신 햇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괜스레 서글퍼질 때가 있다. 더구나 특별히 할 일없는 토요일 오후에 멍하니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보면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마시고 싶어진다. 비를 잔뜩 품은 구름이 미동도 않은 채 나를 째려보는 그런 날도 예외는 아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어느 순간 짓누르기 시작하면 역시나 뛰쳐나가 술잔에 몸을 담그는 길밖에 대책이 없다. 비오는 날이야 선택불가의 상황이니까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아침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겨울의 한낮에는 뜨끈한 국물과 정종으로 머릿속은 이미 만원이다. 고로 일년 365일 중 낮술을 피해야 하는 날씨는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면 낮술에 어울리는 주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일단 너무 독한 술은 낮술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지고 주변인들의 손가락질과 노여움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 '낮술로 바카디 한잔 했어', '낮술엔 역시 40도짜리 안동소주지'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낮술로는 부친과 모친의 식별은 가능할 정도의 낮은 도수의 술이 어울린다. 맥주는 너무 일찍 배가 부르고, 소주는 너무 일찍 취기가 오르고 낮술하면 역시 막걸리가 가장 무난하다.
일단 막걸리는 자체 요기 기능이 내포되어 있어서 빈속에 부담이 덜하다. 낮술 자체가 우발적 행동이므로 끼니를 챙겨먹기가 어렵지 않은가? 오늘은 낮술을 마실 테니 반드시 점심을 챙겨 먹어야겠다 라고 아침 댓바람부터 결심하는 이는 거의 드물다. 우리의 술 막걸리는 이처럼 낮밤을 가리지 말라는 선조들의 지혜가 녹아 있는 술인 것이다.
▲ 낮술-2막걸리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마실 수 있게 만든 선조들의 지헤가 녹아 잇는 술이다 ⓒ 이정혁
그렇다면 낮술을 왜 마시는가? 도대체 낮술이 뭐가 좋길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애주가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낮술의 장점은 바로 시간이다. 한참을 마셔도 해가 남아 있다는 안도감, 해가 질 때쯤 본격적으로 펼쳐질 광란의 밤에 대한 기대감이 바로 낮술의 묘미인 것이다. 낮술 중에 시계를 보고나서 "뭐야, 아직 네 시밖에 안됐네"라며 세상을 모두 가진 듯한 행복감에 휩싸여 본적이 있는가? 앞으로도 여덟 시간은 족히 마실 수 있다는 애주가의 발빠른 계산은 삶의 여유와 느림의 미학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마지막으로 낮술의 폐해에 대해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한다. 아비어미도 몰라본다는 말은 지나치게 식상한 감이 있다. 실제적인 낮술의 문제점은 초저녁에 페이스를 잃고 자칫 쓰러졌다가는 어중간한 새벽에 잠이 깬다는 데 있다. 낮부터 들이붓기 시작하면 저녁 7시쯤 쓰러졌다가 새벽녘에 물을 찾아 깨기 마련인데, 그때 잠까지 깨 버리면 대책이 없다. 다시 술을 마실 수도 없고, 뒷덜미를 후려치는 숙취는 '내가 왜 그랬지?'라는 후회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상태로 동이 틀 때까지 두통과 오심에 시달리다 보면 낮술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대낮부터 술을 퍼마셔 봐야 몸 버리고, 시간 버리고, 돈 버리는 낭비 삼박자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라는 것이다. 마셔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낮술의 낭만 따위 개도 안 물어갈 허상에 불과하다. 그대, 아직도 낮술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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