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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를 친 그해, 딸은 대학에 떨어졌다

고라니를 보면 그때의 사고가 떠올라 씁쓸... 좋은 소식 전해주렴

등록|2013.12.20 16:27 수정|2013.12.20 16:27
"저거, 저거!"

딸의 비명에 순간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운전대를 콱 움켜잡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딸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주니 고라니 한 마리가 자동차 불빛이 눈에 부신 듯 멈칫 멈칫하며 길 가에 서있는 게 아닌가. 불을 끄자 그제야 갈 길을 간다. 우리도 놀랐지만 고라니 역시 놀랐는지 황급히 길을 건너 산 쪽으로 겅중겅중 뛰어간다.

오랜만에 집에 다니러 온 딸을 마중하러 나갔다가 큰일을 낼 뻔했다. 딸이 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늦은 밤이라 차들의 왕래가 많지 않아서 고라니는 무사히 길을 건널 수 있었다. 만약 차가 많이 다니는 시간대에 고라니가 찻길을 건넜다면 과연 길을 건널 수 있었을까. 운이 좋으면 길을 건널 수도 있겠지만 십중팔구는 차에 치여서 다치거나 비명횡사하는 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길을 건너 산 쪽으로 뛰어가는 고라니를 한참 동안 지켜 보았다.

▲ 고라니는 무리를 지어 살지 않고 대개 혼자 생활한다고 합니다. ⓒ 김향


고라니를 칠 뻔했다

밤에 운전을 하다 보면 동물들을 만날 때가 더러 있다. 동네 근처에서는 고양이를 주로 보지만 산자락에 붙어 있는 길을 지날 때면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들을 볼 때도 간혹 있다. 운전 중에 도로 위에서 동물을 만나면 차를 멈추어 보호해 주는 게 당연하지만 못 보았거나 또는 미처 피하지 못해서 차로 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차를 세우고 다친 동물을 길 밖으로 옮겨서 돌봐주는 운전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비록 동물일지라도 산 생명을 치었으니 심리적으로 받는 충격이 클 테고, 그러면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그냥 도망치고 마는 것이다.

나도 전에 고라니를 친 적이 있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낸 딸을 데리러 가는 중이라 행여 늦을까 봐 급하게 달리고 있는데 도로 공사 중이라서 길을 우회해 놓은 데가 있었다. 비포장 길이기도 하고 또 좁고 굽은 길이라서 조심스럽게 달리는데 '쿵'하고 차체에 충격이 오지 뭔가. 동물을 친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길에 동물이 있는 걸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공사를 위해 놔둔 시설물을 들이받은 줄 알고 차를 세웠다.

▲ 야생동물을 찍기는 매우 어려운데, 그것은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 김향

헤드라이트의 강한 불빛이 눈부셔서 그런지 아니면 차와 부딪힐 때의 충격 때문에 그런 건지 고라니가 비틀대면서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공사 중인 길이라 그리 속도를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라니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비척댔다.

늦은 밤이라 길에는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고라니를 친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라니를 안아서 길 밖으로 옮겼다. 그냥 두면 뒤에 오는 차들이 또 칠지도 모르기 때문에 길 옆의 밭에 내려놓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마치 완전 범죄를 꿈꾸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어서 빨리 현장을 피하고 싶었다. 혹시 고라니가 크게 다치거나 또 죽기라도 하면 오래 오래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 같았고, 더구나 죽어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사고 현장에서 도망쳤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급하게 자리를 피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편에서는 산 생명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 불편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입시를 앞둔 딸에게 혹시라도 해가 될까 봐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좋은 일을 많이 해야 그 덕이 자식에게 갈 터인데 오히려 고라니를 치었으니, 그 죄가 딸에게 미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라니가 어찌 되었나 싶어 찾아봤다. 비틀대는 고라니를 길가 밭에 내려놓고 떠났는데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 한 길 이상 낮은 밭이니 다시 길로 올라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을 차린 후에 건너편 산으로 갔을 것 같았다. 속으로 '휴'하고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다음 날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또 찾아가봤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현장에 가서 확인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 후가 어찌 되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길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만약 고라니가 다쳤다면 핏자국이 있을 텐데, 다행히 길은 깨끗했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가책에서 풀려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그 사고에서 자유롭지가 않았다. 차에 치여 비척대는 고라니 모습이 잊히지를 않았고 또 제 발로 뛰어가는 고라니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늘 들었던 것이다. 그 뒤로 길에서 고라니를 보게 되면 반가운 한 편으로 그때의 사고가 떠올라 씁쓰레하다.

▲ 눈이 내리면 먹이는 어떻게 찾을까요. 겨울은 야생동물들에게 특히 더 견디기 어려운 계절일 것 같습니다. ⓒ 김향


잠시 주춤하던 고라니, 제 길을 찾아가다

산 생명에게 해를 입혀서 그랬는지 딸은 그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한 해 더 공부를 해야만 했다. 꼭 그 일 때문에 그리 된 것도 아닐 텐데 왠지 나는 자책감이 들었다. 입 밖으로 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라니를 치었기 때문에 딸이 대학에 못 간 것처럼 여겨져서 미안했다. 그래서 딸이 재수를 하던 그 다음 해에는 차를 운전할 때도 조심했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살생을 멀리하며 한 해 내내 정성을 들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지도 몇 해 지난 딸은 청춘의 빛나는 한 때를 보내느라 강화도 집에 올 짬이 별로 없다.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나 올까 하지만 와도 하룻밤 자고 떠나기가 바쁘다. 딸도 자기 세계가 있는지라 바쁠 것이다. 그래도 김장을 돕겠다며 집에 오겠다는 딸의 전화를 받으니 반갑고 고마웠다.

퇴근을 하고 바로 출발한 딸은 밤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라니를 만났다. 고라니가 길을 다 건너갈 때까지 차를 세우고 기다려 주었다. 자동차 불빛에 눈이 멀어버렸는지 잠시 주춤하던 고라니는 불을 꺼주자 곧 제 갈 길을 찾아서 갔다.

불빛 저 너머로 사라지는 고라니를 눈으로 쫒으며 예전에 있었던 사고를 떠올렸다. 그때는 미처 보지 못해 해를 입혔지만 이번에는 고라니를 지켜주었다.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딸에게 좋은 혼처 자리가 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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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의 질주 지난 5월에 강화도 옆의 볼음도에 갔다가 만난 고라니입니다. ⓒ 정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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