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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쁨전 에피소드

엄마!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등록|2013.12.17 10:22 수정|2013.12.17 10:22

작가사진들주중에 지방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사진을 만들어 벽에 걸었다 ⓒ 이영미


일을 하는데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80세가 넘은 그녀의 엄마이다. 스마트폰으로 철자 하나 안 틀린 긴 글이다. 좋은 전시를 함께 딸과 해주어서 참 고맙고 앞으로도 축복이 내리길 기도하겠고 더불어 큰 발전을 하라는 요지이다. 문득 전시 오프닝 날 그녀와 그녀의 엄마가 만든 풍경 하나가  생각난다.

"엄마! 영미 언니하고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언니는 언니고 나는 나예요.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장애인도 그렇다니까요!"

전시장에서 인천에서 사범대학원을 나와 교직에서 30년간 몸담고 있는 작가동생이 팔순의 어머니에게 말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주중에 모두들 대구와 인천과 청주에서 일하다가 주말이면 만나서 작가와의 만남의 날을 정해 지인들과 미술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만나며 2주간의 일정을 가지고 펼쳤던 '침묵의 기쁨전'이 드디어 종료되었다. 문득 선명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30대와 40대 50대의 침묵의 여성 4명! 작게는 20여년 길게는 40여년 동안 붓을 잡은 우리들이다. 키가 작은 이도 있고 큰 이도 있고, 보기 드문 미인도 있고 나처럼 그냥 눈빛 하나만 살아서 김구 손녀같은 둥근 안경낀 사람도 있다. 말을 좀 잘하는 사람, 아예 말을 못하는 사람, 말을 못해도 수화를 잘 하는 사람, 수화를 못 해도 나처럼 말을 좀 하는 사람 다양하다.

오십 보 백보 차이지만 우리는 서로 서로 그런 잘하는 것은 더 나누고 모자란 것은 보듬어 주면서 20년 간 우정을 다져왔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족들을 서로 서로 만난 것은 이번 기쁨의 침묵전 만남의 날이었다. 그녀들은 내 딸들을 보았고 나는 그녀들의 엄마와 지인들을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에게 그녀는 하나 뿐인 딸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 아주 드물게 사범대학교에도 보내고 그녀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인천미술대상을 받았을때 그녀의 어머니는 무척 기뻤을 것이다. 돌아가신 우리 친정엄마처럼! 그러나 그녀의 엄마는 전시를 기획하고 주관한 나를 만나고 나서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왜 영미선생님처럼 말을 잘 못하니? "

그녀는 상처를 받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반 짜증조로 엄마에게 비교하지 말라고 그 자리에서 말을 했다. 아마 숱하게 엄마에게 그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 자식은 한 없이 모자라면서도 애틋하고 그러면서도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그런 존재인 모양이다.

함께 인사동에서  게스트하우스 호텔을 잡아 긴 밤을 같이 지새울때 그녀는 그런 어머니의 기대를 이해하지만 이해하고 가만히 있으니깐 점점 심해져서 힘든다고 하였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인식을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바꾸어지지 않는다면서.... 나는 말했다.

"바꾸려고 하거나 또는 엄마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 할 수록 엄마는 아쉬워하고 더 고집스러워가실꺼야! 그러니 그냥 알았어 그런데 잘 안돼! 이렇게 하면 엄마는 점점 더 수그러질 가능성이 있으니 일일이 대꾸하고 잘못이라고 말을 안하는 게 좋겟어!"

전시 마지막 날! 그녀는 황금구두를 신고 왔다. 그리고 우리 보는데서 혼자 텔레비젼을 보고 따라 익힌 탭댄스를 추었다. 칠보공예를 익힌 솜씨로 예쁜 브로우치와 직접 만든 비누와 화장품도 나눠주었다. 참 재주가 많은 그녀이다. 말을 좀 유창하게 하는 것과 스스로 만들어 주변과 예쁘게 나눌 줄 아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한 일일까 그녀의 엄마가 생각을 해 보면 좋겠다.

대구에서 온 동생들은 따스한 쉐타와 와인을 나눠주고, 나는 동행이란 캘리가 들어간 앞치마를 나누었다. 얼마나 따스한 마음들인지 나는 참 행복했다. 그리고 그녀들도 마찬가지 였다. 전시는 참 소담하면서도 기쁘고 맑게 치러졌다.

▲ 엽서도자기 ⓒ 이영미


미술세상의 한 복판인 인사동에서 장장 2주간을 전시한다는 것은 정말 이게 가능할 것이라고 처음에는 감히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저 믿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니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기획을 해보자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 전시주관인 나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동생들과는 일심동체가 되어야 했다.

참 생애 맛보기 어려웠던 기쁜 우리들의 시간은 일단락 되고 저마다 자신들이 터전에서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고 있다. 오랜 침묵의 우물에서 우리는 처음에는 지독한 외로움과 싸웠지만 이제는 그 우물에 비친 별빛을 가지고 우리만의 하늘을 만들고 그 하늘에서 기쁜 별이 반짝이게 하며 세상에 나누었다.

일 년에 한 두 번 만나기 어려운 조카를 비롯한 많은 인연들...심지어 10 년도 더 전에 작품과 글을 나누었던 벗들, 대학원을 마치고 몇 년에 한 번씩만 만나던 짝궁도 만났다. 그리고 한 지붕안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 지금 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방에서 서울까지 친구와 손을 잡고, 또는 꼬맹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기차를 타고 보러 왔다.

생판 모르는 어떤 사람은 '침묵의 기쁨전' 이라는 전시제목이 참 좋다고 하였고, 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은 우연히 들어왔다가 우리 4명이 청각여성장애작가라는 것을 알고 참 놀라와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감동해서 그런지 몰라도 실비로 내놓는 작품값보다 더 많이 내놓고 우리들에게 인사동 한정식을 사주었다.

내년에는 좀 더 맑고 밝은 별빛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올해는 기획에서 주관과 도록편집 등 자질구레한 온갖 일들을 내가 감당해야 했는데 내년에는 똑같이 나눠 하기로 했다.

전시를 하는 기간동안 일하는 기관에서는 연간평가가 치러지고, 학부에서는 기말고사와 레포트제출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매일 새벽 2-3시까지 현실의 일들을 감당하면서 전시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마침내 해내었다.

내가 해낸 것이 아니라 해낼 수 있도록 성원을 보내준 주변의 지인들, 그리고 내가 모르게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많은 사람들.... 보이는 사랑과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들이다. 침묵의 기쁨전은 끝났지만 많은 것들이 남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의 기쁨의 빛이 삶에 너무 지쳐 깜박깜박 했던 빛이...진정으로 웃는때보다 형식적으로도 더러 웃기도 했던 그 마음안의 지친 빛이 생생하게 되살아 났고 그래서 매 순간 진정으로 소녀처럼  다시 활기차게 웃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첫 번째 침묵의 기쁨전에 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드려요
내년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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