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대왕세종>의 원경왕후 민씨(최명길 분). ⓒ KBS
만약 저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을 한 여인이 있다. 조선 제3대 주상 이방원의 퍼스트레이디인 원경왕후 민씨(1365~1420년)다. 여성이 공식적 최고지도자에 도전할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이 제도를 잘 활용했을 것이다. 그는 정치참여의 욕구 때문에 심장이 늘 부글부글하는 사람이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격동기에 민씨는 정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정치규제법에라도 걸렸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신체규제법'에 걸려 있었다. 그 격동기 때 그는 딸 둘을 낳은 뒤 아들 셋을 출산하자마자 세 아들을 곧바로 땅에 묻었다. 그래서 신체적·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부글부글하는 정치적 욕망을 짓누르며 그는 방안에서 배만 쓰다듬고 있어야 했다.
조선 건국 5년 뒤인 1397년에 충녕대군(훗날의 세종, 생존자 기준으로 셋째아들)을 낳은 뒤부터 민씨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남편 이방원은 여성의 정치적 조력에 크게 의존하는 편이었다. 건국 전만 해도 이방원은 작은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와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런 스타일 덕분에 민씨는 충녕을 낳은 뒤로 이방원의 핵심 참모로 떠오르게 되었다.
얼마 안 가서 민씨에게는 능력을 과시할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기회는 처음엔 위기의 형태로 다가왔다. 태조 이성계의 최측근 참모이자 정권 실세인 정도전이 요동 정벌(만주 정벌)을 명분으로 사병을 혁파하면서 이방원에게도 무장해제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에 맞서 민씨는 남편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벌이게 되었다.
민씨는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태조 7년 8월 26일자(음력) 즉 1398년 10월 6일자(양력)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은 정도전의 압박에 밀려 자기 소유의 병장기를 불태워버렸다. 이때 민씨는 남편도 모르게 그중 일부를 숨겼다가 거사 당일 꺼내놓았다. 또 동생인 민무질을 통해 정도전 쪽 사람인 이무를 매수해서 거사 당일 정도전 측의 동선도 파악했다.
무장해제를 당한 이방원은 자기한테 가세한 정부군의 무기를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는 자기 무기로 쿠데타를 벌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민씨가 병장기를 꺼내놓음에 따라 이방원의 하인들은 신속하게 사병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정도전을 살해하고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점만 봐도, 민씨가 단순히 집안에서만 안주인이 아니라 쿠데타에서도 안주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원경왕후 민씨와 이방원(김영철 분). ⓒ KBS
제1차 왕자의 난이 이방원을 실권자로 만들어주었다면, 제2차 왕자의 난은 그를 진짜 왕으로 만들어주었다. 이방원은 제1차 때는 정권에 대한 도전자의 입장에 있었던 데 비해, 제2차 때는 둘째형 이방과를 주상으로 모신 실권자로서 이방간(넷째형)의 도전을 받는 입장에 있었다.
1차 때 이방원에게 병장기를 제공했던 민씨는 2차 때는 정치적 투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어찌 보면 1차 때보다는 2차 때의 역할이 더 컸다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위의 형인 이방간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방원은 1차 때와는 달리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복형제와 칼을 맞대야 했기 때문이다. 1차 때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이때는 아버지가 아니라 정도전을 직접 상대했다. 그래서 이방원은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2차 때는 동복형과 직접 싸워야 했기 때문에 양심상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이방원의 결단을 촉구하고 양심을 무디게 만든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민씨였다. 정종 2년 1월 28일자 즉 1400년 2월 22일자 <정종실록>에 따르면, 민씨는 이방원에게 갑옷을 입혀주고 대의를 설명하면서 출정을 독려했다. 민씨의 모습은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을 독려하는 감독 그 자체였다.
민씨의 격려를 받은 이방원은 밖으로 나가 이방간을 격파했다. 이로써 이방원은 유력한 정적을 모두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방원에 대한 도전자가 모두 사라지자, 정종 이방과는 이방원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해서 이방원이 제3대 주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방원 정권이 탄생했기 때문에, 원경왕후 민씨는 단순히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정권의 대주주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주상이 임기제였고 여성도 주상에 출마할 수 있었다면, 민씨도 분명히 차기나 차차기를 노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남편이 퇴임한 뒤에 예조판서(국무장관) 직을 수행하다가 기회를 봐서 주상에 출마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씨가 정치적 파워를 갖는 것을 가장 싫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은 여성을 정치적 조력자로 활용하는 데는 적극적이었지만, 여성과 더불어 권력을 나누고 싶어하진 않았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그는 민씨를 약화시키기 위한 또 다른 정치투쟁에 착수했다. 평소 그는 아내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항상 아내의 야심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상이 된 이방원은 권씨(권의빈, 의빈 권씨)라는 후궁을 선발했다. 권씨가 지혜롭다는 것이 최대 이유였다. 지혜를 가졌다는 것으로 보아, 권씨도 신덕왕후 강씨나 원경왕후 민씨처럼 이방원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할 만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민씨가 권씨의 후궁 책봉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극렬히 반대한 것을 보면, 권씨도 민씨 못지않은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이방원은 권씨를 궁에 들였고, 민씨는 이방원의 참모진에서 배제됐다.
▲ 원경왕후 민씨가 이방원을 왕으로 만든 뒤인 1405년에 지어진 창경궁. 사진은 창경궁 후원(비원)의 모습. ⓒ 김종성
이방원은 아버지뻘 참모인 하륜의 부정부패를 모두 눈감아주었다. 이것은 '하륜이 아무리 부정부패를 해봤자 왕권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부인 민씨만큼은 철저히 견제했다. 민씨가 참모 이상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자신의 왕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방원의 견제는 권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민씨를 밀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방원은 민씨의 수족인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제거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이방원은 민씨 형제들의 말꼬리를 잡아 이들이 양녕대군 이외의 왕자들이 죽어 없어지기를 희망했다느니, 자기가 시험 삼아 사퇴 의사를 밝히자 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느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 사형을 집행했다.
민씨의 수족들을 잘라내고 민씨를 무력화시킨 이방원은, 민씨가 눈을 감은 지 2년 뒤에 눈을 감았다. '저 여자보다는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다', '저 여자가 나보다 오래 살면 정권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이방원이 2년 더 오래 살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원경왕후 민씨가 남편을 도울 때 속마음을 들키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가문이 그렇게까지 파탄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씨는 정치적으로 유능한 참모였지만, 남편이자 주군인 이방원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속마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가 속마음을 잘 숨기고 태종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면, 태종시대와 그 직후의 정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세종의 참모인 황희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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