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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속에 들어간 고구려비, 너무 하네

[박물관과 미술관 기행 11] 충주 고구려비전시관

등록|2013.12.22 10:26 수정|2013.12.22 10:26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집안 고구려비 ⓒ 동북아역사재단

21012년 7월 29일 집안(集安) 고구려비가 발견되었다. 새롭게 발견된 고구려비 소식은 2013년 1월 16일 '중국문물신식망(中國文物信息網)' 사이트에 '길림성 집안에서 고구려석비가 새로 발견되다(吉林集安新見高句麗石碑)'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이때부터 국내 고대 사학계가 난리가 났고, 그 연구결과가 6월말 <한국고대사연구> 특집호(70집)  '집안 고구려비 연구(集安高句麗碑 硏究)'로 나왔다. 연구에 의하면 이 비석은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왕릉 수묘제(守墓制)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발견이 1979년 2월 24일 충주에서도 있었다.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에는 입석이라는 마을이 있다. 입석은 우리말로 하면 선돌이다. 서 있는 돌이 의미가 있을 때 우리는 선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빗돌(碑ㅅ돌)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입석 마을 앞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더 더구나 글씨도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비석의 가치가 1979년 2월 24일 충주지방의 역사문화 연구단체인 예성동호회(현: 예성문화연구회)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비석은 글씨를 전혀 찾을 수 없는 백비 정도로 이야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은 비석에 의문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자고 해서 찾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왕(王), 대(大), 토(土) 같은 글자가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3월 하순 당시 충주북여중 국사 교사였던 장준식 회원이 단국대학교에 이 사실을 제보하게 되었다.

그는 내게로 와 고구려비가 되었다

▲ 고구려비 탁본 ⓒ 이상기


이에 단국대학교에서는 4월 5일 황수영 교수와 정영호 박사가 입석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황수영 교수가 가까운 봉황리 마애불로 가고 입석 마을의 비석조사는 정영호 박사가 맡게 되었다. 그는 대왕, 국토 등의 글자를 확인하고 전면과 좌측면을 탁본했다. 이를 토대로 전면 10행, 측면 7행에 각 20여 자씩 모두 400여 자의 글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중 신라토내, 사자, 상하 등 글자를 확인하고 신라시대 비석일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4월 7일과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단장 정영호 박사)이 비석을 찾아 좀 더 자세히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근거로 고구려비라고 결론 내렸다. 첫째 석비 서두에 고려대왕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둘째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사자 등 고구려 관등이 보인다. 셋째 광개토대왕비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보이고, 비형도 광개토대왕비와 흡사하며, 글자체도 고졸한 예서풍이다.

넷째 모인삼백 신라토내(募人三百新羅土內)라는 명문은 고구려가 신라의 영토 내에서 삼백 명의 군사를 모집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섯째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수왕은 79년(413-491)간 재위하면서 평양으로 천도했고, 한강 유역까지 지배하는 전성기를 이뤘다. 이런 이유로 5세기 후반 한강유역을 따라 상류까지 척경(拓境)하고 그 기념으로 이 비석을 세웠을 것이다. 이 비는 한국 유일의 고구려비다.

▲ 보호각 속의 중원 고구려비 ⓒ 이상기


이렇게 해서 이 비석에 중원 고구려비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1981년 3월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월에는 보호각이 건립되어 고구려비전시관이 세워지는 2012년까지 그 역할을 다했다. 충주 고구려비전시관 건립은 2006년 한창희 충주시장의 건의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받아들임으로서 논의되었다. 전시관의 기본계획 도면은 건축가 승효상 씨가 맡았고, 건물의 설계는 고당건축이 했으며, 시공은 남전종합건설이 했다.

내부 전시시설의 디스플레이는 (주)열린기획이 2011년 8월부터 2012년 3월까지 맡아서 진행했다. 내부는 크게 세 개 주제와 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기획전시실, 고구려 역사전시실, 충주 고구려비전시실. 기획전시실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보여준다. 고구려 역사전시실은 연표와 그림, 공예품 등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자세히 보여준다. 가장 안쪽에 있는 충주 고구려비전시실은, 가운데 고구려비를 배치하고 주변에 고구려비와 관련된 역사자료를 시청각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첫 인상을 말하라고 한다면

▲ 충주 고구려비전시관 ⓒ 이상기


충주 고구려비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을 컨테이너 같다고 말한다. 직육면체 박스 네 개를 연결해 놓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색깔마저 거무튀튀하고 벽체에 상하로 줄이 가 있어 그런 느낌이 더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박물관과 전시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건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보여줌으로 해서 모던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건축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는 게 좋겠다.

그럼 이번에는 내부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고구려비전시관의 장점은 관람의 동선이다. 들어가는 곳에서 나오는 곳까지 지그재그 형식으로 되어 있어, 좁은 공간임에도 고구려에 대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선의 좌우에 전시물이 있어, 다른 곳으로 벗어날 염려가 없다. 그렇지만 문제점도 있다. 전체적으로 내부가 너무 어둡다. 현대 건축의 특징이 내외부 공간의 소통인데, 그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동선이 미로처럼 느껴진다.

▲ 고구려비전시실 상층부 ⓒ 이상기


또 한 가지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의 높이를 높여야 한다. 6.39m에 이르는 탁본의 아랫부분이 접혀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설계 후 기증되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데, 차후 꼭 개선되어야 할 사항이다. 실제 광개토대왕비 모형을 만들어 한 바퀴 돌면서 비석을 감상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고구려비전시실의 천정 부분도 고치는 게 바람직하다. 그곳에 원형의 창을 내서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하면 고구려비에 신비감이 더해질 것이다. 로마 판테옹의 원형 천정을 연상하면 된다.

고구려비전시실의 4면을 감싸고 있는 사신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기획전시실에서 소개되고 있다. 고분벽화를 이곳에서 또 한 번 크게 강조한 이유가 뭘까? 그만큼 중요해서 일까, 아니면 벽화가 인상적이어서 일까? 개인적인 생각으론 전시실의 이름에 걸맞게 고구려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3D형식으로 디스플레이하면 어떨까 한다. 박물관과 전시관은 박제된 유물전시실이 아니고,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살아있는 문화공간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고구려 문화와 사회

▲ 아크릴로 표현한 고구려 고분벽화:견우와 직녀상이 보인다. ⓒ 이상기


고구려 고분벽화를 볼 수 있는 기획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견우와 직녀상이다. 이것은 덕흥리 고분에서 볼 수 있다. 견우는 이름 그대로 소를 끄는(牽牛) 농부다. 그러므로 영농에 종사하는 남성을 상징한다. 그 견우를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배웅한다. 직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베를 짜는(織女) 여인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고구려인들의 우주관과 인생관이다. 별자리를 통해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흥리 고분은 내부에 쓰여진 명문을 통해 주인공의 이름과 건축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두 개의 방중 앞방(前室) 안벽 상단에 14행 154자의 묘지명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408년(永樂 18년)에 만들어졌고, 주인공은 유주자사(幽州刺使) 진(鎭)이다. 덕흥리 고분에는 무덤 주인의 정치적 활동을 보여주는 그림 뿐 아니라 행렬도, 수렵도, 천문도 등이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자 주인의 나들이까지 그려져 있어 생활상과 풍속까지 짐작할 수 있다.

▲ 안악3호분에 그려진 부엌의 아궁이와 시루 ⓒ 이상기


두 번째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 안악3호분 벽화다. 이 고분에 고구려인의 인물상과 생활상이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에 그려진 인물풍속도를 통해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 묘주와 그의 부인상 등 중심인물이 크게 표현되고, 그 주변을 시종무관, 호위대, 의장대가 호위하고 있다. 기마행렬도, 취타행렬도, 개마행렬도 등에서는 이들 지배계급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택견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수박희(手搏戱), 뿔피리(角笛) 부는 모습은 당시 문화와 예술을 보여준다. 이들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생활공간이다. 주방과 부엌, 곳간과 창고, 방앗간 그림을 통해 우리는 4세기 중반 고구려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곳간에는 돼지와 사슴 등 짐승이 걸려 있고, 부엌 아궁이에는 커다란 시루가 보인다. 또 마구간과 외양간이 있어 말과 소도 가축으로 키웠음을 알 수 있다.

▲ 무용총의 춤추는 그림 ⓒ 이상기


수박희는 무용총에도 나온다. 그러나 무용총의 특징은 이름 그대로 춤추는(舞踊) 그림과 사냥하는(狩獵)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팔을 뒤로 한 채 남녀무용수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유행하는 땡땡이 무늬 옷을 입었다. 남녀는 바지와 치마를 통해 구별된다. 그리고 리더로 보이는 남자는 머리에 깃털을 꽂았다.

수렵도에서는 사냥하는 궁수가 말을 타고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쫓는 말의 역동성과 도망치는 짐승의 긴장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중간에 표현한 산은 현대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그 외 각저총의 씨름하는 그림과 별자리 그림, 쌍영총의 삼족오, 강서대묘의 사신도 등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각저(角抵)는 씨름을 말하고, 쌍영(雙楹)은 무덤 안에 있는 쌍 기둥을 말한다. 

충주 고구려비는 언제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을까?

▲ 충주 고구려비 ⓒ 이상기


충주 고구려비문은 '5월 중에 고려의 위대한 왕인 할아버지왕이 명령을 내려서'로 시작한다. 여기서 핵심은 할아버지왕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비석을 세운 사람이 문자왕이고, 이야기의 주인공은 장수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장수왕이 이름 그대로 오래 살아(長壽) 손자인 문자왕이 왕위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신라매금으로 하여금 영원토록 형과 동생으로 지내기를 원한다.' 여기서 매금은 신라왕을 낮춰 부르는 호칭이다.

그리고 '상하 관계로 서로 화합하며 하늘의 뜻을 따른다'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가 신라와 상하관계에서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맹약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으로 와서 매금의 태자와...'로 문장은 계속 이어진다. 여기까지 보면 이 비석은 장수왕의 치적을 칭송하는 송덕비이고, 신라와 상하관계로 살아가자는 일종의 회맹비다. 또 영토를 고구려의 동남쪽 이곳 한강유역까지 넓혔음을 알리고 있으니 척경비라고도 할 수 있다.

▲ 충주 고구려비 역사기록화 ⓒ 이상기


그래선지 충주시에서 만든 역사기록화에 보면 회맹에 초점을 맞춰 주제가 표현되고 있다. 고구려군이 우월한 입장에서 신라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신라 사람들은 공손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절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이들 세 가지 관점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한 결론은 아직 나지 않는 상태다. 글자를 더 판독한다고 해도 쉽지 않은 과제다.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연도, 그것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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