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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정치적인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주장] '현대문학'사태를 바라보며

등록|2013.12.22 16:24 수정|2013.12.22 16:24
초원의 주인이 바뀌면 초원을 뛰놀던 동물은 한동안 불안하다. 주인의 움직임과 속성을 알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초원, 그리고 그 초원의 주인(?)인 대통령이라는 절대 권력이 바뀐지도 1년이 지났다. 권력의 연속성에서 자리의 주인만 바뀐 것이기에 초원을 사는 우리들은 한동안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적어도 지난 1년간 그랬다.

굳이 초인의 출현을 열망했던 니체를 무덤에서 다시 꺼내지 않더라도 순간은 영원으로 고정 불변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한없이 무거워진 존재인 우리들은 '초인'이 되지 못한 채 초원의 주인을 위한 '밀알'로서만 존재 할 가능성이 높기에. 그럼에도 나는 그의 인간적인 면을 기대하며 한가닥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초원의 주인이 바뀌던 순간의 알 수 없던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주변에서 이해가 안 되는 상황들이 벌어졌다. 종종 눈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이 네모난 화면 속에서 굳은 표정을 한 채 모습을 드러내곤했다. 검찰에서 소환장이 날아온 적은 없지만 불안했다. 가끔씩 일과 일상을 끄적이던 홈페이지의 글을 모두 삭제해버렸다. 시뮬라시옹 속과 시뮬라르크. 우리의 감각은 보여지는 현실을 실제로 접한다는 착각 속에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인간의 감각으로만 경험할 수 있기에 정확하지 않다.

지금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본질과는 상관없이 단지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만 확인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형상을 지닌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생각의 결과물도 마찬가지다. 시뮬라시옹 속의 시뮬라르크. 즉 가상 현실 속의 가짜가 진짜가 되어버리는. 끊임없이 자기 복제된 그 흔적마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글을 쓴다는 행위는 두렵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참여냐 순수냐'를 넘어서는 현대문학 사태

내가 쓴 글에 자기검열을 했던 것처럼 지극히 자유롭고 끊임없이 시대와 불화해야 할 문학도 마침내 자기 검열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현대문학>이라는 국내 최고(?)의 문예지가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씨'의 에세이를 몽테뉴의 '수상록'에 비견될 만한 글이라고 '박비어천가'를 외치더니 급기야는 불온한 단어와 정치적 표현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원로 문인들의 원고를 거부하고 연재 중이던 작품마저 중단했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난 몇 달 동안 국내 주류의 문단에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학의 변두리에 머물고 있는 나도 먹고사는 일에 바쁘다 보니 처음엔 주류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연히 그 평론가가 언급한 '수상록'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박근혜'씨'의 에세이도 읽어보지 않았다. '수상록'과 '에세이'의 문학적 완결성을 비교할 입장도 못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후 <현대문학>이 원로 작가들에게 보인 행태도 문제다. 작가라면 문예지에 자신의 글이 거부당하는 게 어떤 절망과 굴욕감을 주는지 잘 알 것이다. 수 년 전 나도 한 문예지에 단편소설을 연거푸 세 번을 거절당한 후 그 원고를 찢어버렸던 아픔이 있다. 내가 알기로 <현대문학>에 원고를 거부당한 원로 작가들이 현실 참여적인 문학을 했던 것도 아니다.

'참여'냐 '순수'냐 하는 문학적 논쟁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왔고 문학이라는 사회적 '거울' 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끊임없이 논쟁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이런 문학적 논쟁을 넘어서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단지 불안했던 한 시대상을 팩트로서 표현하고 그들이 보기에 불편한 단어 몇 개를 사용했다고 해서 한 시대를 대표했던 원로 문인들의 글을 거부하는 것은 그야말로 폭력을 넘어선 야만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범주'를 말하며 아름다움과 추함, 이익과 손해, 성스러운것과 속물적인 것의 대비를 말했다. 그리고 이 대비가 극단의 상황에 이르면 결국엔 정치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고 했다. 정치적인 것이란 곧 '적 아니면 동지'다.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전쟁이 발발한다.

<현대문학>은 문학적 범주인 '순수'와 '참여'의 대비를 정치적으로 확대시켜서 결국 적과 동지로 구분해버렸다. 그 결과 제59회 현대문학상 수상자들 중 일부가 수상을 거부하고 수많은 문인들이 <현대문학>에 원고 게재 거부를 선언했다. 문학적인 것의 범주가 '적과 동지'로 확대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문학적인 것의 범주란 무엇인가? '문학' 대 '모든 사회적인 것'이지 않을까.   

수많은 평론가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문학은 이미 죽었다고. 문학이라는 몸체는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 죽은 몸체 안에서 끊임없이 세포를 분열하듯이 문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생겨났다. <현대문학>은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끊임없이 안으로 들어가야 할 생생한 몸체다. 그리고 그 푹신한 품 안에서 자신의 문학적 향기를 마음껏 뿜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예지이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작가는 '끊임없이 시대와 불화해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시대는 곧 당대의 가장 최고의 권력 집단이며 그러기에 작가는 끊임없이 당대에 핍박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라는 최고의 찬사가 불는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필화'사건이라고 볼수도 없는 한 거대 문학집단의 절대권력을 향한 문학적 '수음'이다. 이제라도 문제를 인정하고 문학인답게 문학적으로 해결을 보려는 모습을 보인다니 다행이다. 그 창피한 '수음'을 거두고 이제라도 그 본래의 명성에 맞는 문예지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김인철의 개인 블로그(네이버)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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