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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이냐?"

모자 간의 다툼은 칼로 바람 베기

등록|2013.12.23 13:41 수정|2013.12.23 15:56

이민이가 왕산해수욕장에서 할아버지와 야구 배팅을 하고 있다.초등학교 3학년 말썽꾸러기여서 모자간에 다툼이 잦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운동이라면 신이 났다. ⓒ 이월성


우리 집 사람 77살 할머니. 몽당연필을 손아귀에 쥐고 쌕쌕거리는 가쁜 숨소리를 내는 쪼그라든 입에 마른 침을 몽당연필에 발라가며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우는 글씨로 딸에게 편지를 썼다.

"너는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이냐?"

딸 은주가 손자인 초등학교 3학년인 이민에게 야단치며 한 말을 귀담아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 훌쩍거리는 손자 얼굴을 그려가며 딸에게 말로 하지 못하고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네가 이민에게 한 말과 똑 같은 말을 어머니께서 내게 했었다. 그 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에 집을 나가고 싶었었단다.'

이렇게 써 놓고 "됐다!"하고 3살 되는 막내 손자 이재가 하는 말을 흉내 내며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보였다. 내가 "할머니가 글을 잘 썼는데? 나도 한 줄 써 볼까?"했더니 "써 보세요!"한다.

나도 몽당연필을 받아 쥐고 할머니처럼 침을 발라가며 할머니가 쓴 글 아래에 잇따라 글을 썼다.

'은주야, 아이들은 말썽을 피우는 인형이란다. 말썽을 피우지 않으면 아이가 아니지? 아이가 어른 같은 분별력이 있어봐라. 어른들이 할 일이 없어진단다. 어린이가 말썽을 피우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어린이 입장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아라.'

깜박 깜박하는 머리로 쓴 글이 잘 쓰여졌는지, 하려는 말이 잘 전달됐는지, 편지를 읽고 또 읽어 보았다. 편지를 봉투에 접어 넣고 편지를 딸에게 직접 전하려고 외출복을 입고 안주머니에 편지를 넣었다. 딸 은주가 편지를 받아 보면 반응이 어찌 나오려나? 걱정을 하면서 비장한 각오로 사과 한 봉지를 사 들고 딸네 집으로 갔다.

집안으로 들어간 순간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두 손자가 웃으며 나를 반갑게 맞는다.

내가 딸네 집에 찾아갔을 때 딸과 두 손자는 제주도로 여행을 가려고 삥 둘러앉아서 계획을 짜고 있었다. 딸이 "아버지와 어머니도 같이 가세요?" 딸이 웃으며 말하자, 손자들이 "모두 같이 가요" 하며 내 옷에 와서 강아지처럼 달라붙는다.

"제주도에 가면 산방산에 올라가는데 산이 경사져서 이재는 어린이여서 올라가지 못 하겠다."

은주가 말했다.

"엄마에게 업히면 되잖아!"
"엄마 혼자 올라가기도 힘드는데?"
"그럼 모두 산방산에는 올라가지 않으면 돼!"

이민이가 말했다. "하하, 허허, 호호" 모두 웃었다.

몬드리안이 그린 여인상 그림은 나신인 온몸이 온화하고 따뜻한 적황토색의 색감으로 칠해져 있다. 여인상은 부드러운 선으로 기름하게 그려져 목이 길고 가냘픈 몸매와 얼굴까지 갸름한 여인의 모습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호수 같은 맑은 빛의 파란 눈동자를 한 그림이다. 보는 사람의 가슴 속으로 성큼성큼 내게 가까이 오는 몬드리안의 그림이다. 이 그림 같은 은주의 모습을 보았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 않았는가? 모자지간의 다툼은 칼로 바람 베기인 것 같았다.

이민의 얼굴에서 눈물자국을 찾아볼 수 없었고, 딸 은주가 이민에게 야단을 쳤던 준엄했었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공연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개입할 일이 아닌 모자 간의 갈등이었었던 것을 깨닫고, 손을 윗도리 안주머니로 가져가서 집에서 할머니와 내가 합작으로 쓴 편지를 버리기로 마음 먹고 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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