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을 믿었던 이재영...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리뷰] 이재영 유고집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
▲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 ⓒ 해피북스
"그는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맞섰으며, 민족주의자들과도 맞섰다. 정당 없는 혁명노선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대의 이상은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지속될 것입니다."(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그가 2012년 12월 12일 암을 이기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갔을 때 기렸던 이들이 한 말이다.
노회찬 전 의원은 고 이재영 1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글과 말을 모은 유고집 발간사에서 "이미 한국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는 진보정당의 탄생과 변천에 관한 역사적 쟁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리고 이 기록들은 단지 흘러간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대부분 쟁점들은 진보정당이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해결되어야 할 여전히 뜨겁고 중요한 현안들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즉, 그가 살았을 적에 내놓은 정책과 쟁점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진보정당 브레인' 이재영
그가 누구이기에 노회찬은 이토록 높이 샀을까? 그가 숨졌을 때 박용진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캠프 대변인은 "지금 후보가 얘기하고 있는 무상교육, 무상의료와 관련된 정책이 이 의장의 손에서 나왔다"며 "우리 정치와 우리 국민이 이재영 의장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이것"이라며 애도성명을 냈다. 이 말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살아온 삶의 족적을 보면 무릎을 '탁'칠 것이다.
'민중당 경기도당 정책국장', '진보정치연합 정책국장', '국민승리21 정책국장', '민주노동당 정책실장',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정책'이 들어간 직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진보정당 정책들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그를 '정책통', '브레인'으로 불렀다. 실제 그랬다. '대형마트 규제', '상가 및 주택 임대차 보호법',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조세개혁 및 복지정책','무상의료·무상교육' 따위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누구일까? 이재영이다. 그가 내놓은 정책들은 진보정당만 아니라 민주당 그리고 새누리당마저 외면할 수 없다. 처음에는 '빨갱이 정책'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된 것이다.
이재영 추모사업회가 유고집 두 권을 펴냈다. 그가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와<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각각 레디앙·해피스토리 펴냄)이다. 이들은 "이재영은 가슴에는 원대한 꿈을 지녔지만, 두 발은 땅을 딛고 있었다"고 말했다. 공허한 정책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정책을 내놓았다는 말이다.
"사실 이들 기록이 다루고 있는 여러 쟁점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약점을 키우고 강점들을 훼손시키는 오류와 시행착오가 오늘날 진보정당이 겪는 간난과 신고의 뿌리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 기록들은 추억의 박물관에 보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현안을 다루고 미래를 헤쳐나가기 위한 현장의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천황에게 '견마지로'했던 <조·동>이 부끄러워해야지..."
2009년 11월 5일 서울 남부지법 마은혁 판사가 언론 관련법 처리에 반대하며 국회 로텐더 홀에서 점검농성을 벌인 혐의로 약소 기소된 민노당 당직자 12명을 공소기각하자 <조·중·동>과 당시 한나라당은 '색깔론'을 덧씌웠다. 그러자 이재영은 "일본 천황에게, 박정희 총통에게 머리털을 뽑아 짚신으로 삼을 만큼 견마지로를 다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자들이 아니라, 왜 내가 부끄러워야 하는가?"라며 따져 묻고 "우리에게는, 나치 부역자 1만 명을 총살, 교수형 시킨 드골 같은 우익을 만나지 못한 죄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 천황에게 충성 맹세한 독재자 박정희와 천황에게 머리 조아리고, 박정희 칭송에 바빴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부끄러워 할 일을 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이들이 부끄러워해야 하나. 이재영은 또 "우리는 정의롭고자 했고, 마땅히 희생하고자 했다"면서 "우리가 어리고 서툴러 잘못한 일이 많았다고 손가락질받고, 희생이 부족하다거나 가식었다고 지탄받을망정, 그 올바르고자 했던 젊은 마음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분노한다.
"단지 부끄러운 것은 '사회주의 혁명 조직'에서 일했다는 기억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커녕 사상과 양심의 자유조차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데 대한 자괴감이다."(14쪽)
천황과 독재자에게 머리를 조아린 '할 말은 하는' 신문,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박근혜정권에게 당당하지 못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이재영의 분노와 탄식은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다. 그가 지금 같은 하늘아래에서 숨을 같이 쉬고 있다면, 현 정국에서 대해 가만히 있겠는가? 통탄할 일이다.
이재영은 보수만 아니라 특히 진보세력과 자유주의세력 그리고 시민사회세력을 향한 날 선 비판을 이어간다. 어쩌면 보수세력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민주개혁세력'을 향한 비판이다. 북한 체제와 정책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던 민노당 내부세력을 강하게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은 이념이 아니라 정념이다. 김정은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는 민주노동당의 첫 번째 이유는 북한이 대화의 상대이니 존중해야 한다는 것인데, 집권당도 아닌 군소정당이 언제부터 그렇게 국가 외교에 신중한 자세를 견지해왔는지 금시초문이다."(21쪽)
북한에 대해 할 말을 해야... 진보정당
특히 그는 "이정희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남북 관계가 평화와 화해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임무이다.' 옳다. 그런데 남북 관계의 평화와 화해보다 더 근본적인 진보정당의 임무는 인류 보편의 진보가 무엇인지를 국민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것"이라며 "권력 세습이 옳다면 그것을 변호하는 것이고, 옳지 않다면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재부'나 '대표부'가 아닌 독립적 진보정당의 의무다"라고 말했다. 진보정당은 독재권력에 대한 비판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동북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북한 핵무기를 대항하기 위해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주 강정해군기지 역시 같은 논리다. 하지만 이재영은 말한다. "평화는 무기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지켜 주는 것"이라며 "스위스나 스웨덴이 프랑스, 러시아 같은 핵 강국 옆에서 자주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핵우산 덕분도 아니고, 핵무기 덕분도 아니다. 대신 그들에게는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와 그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인민의 강력한 열망이 있을 뿐이다"며 평화는 민주주의가 지켜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탁월한 식견이다. 이재영 같은 생각을 군사주의자들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하지만 무력은 언제나 생명을 빼앗았다. 이재영 말처럼 스위스와 스웨덴이 있어 평화를 지켜내는 것이 아니다. 중남미에 자리한 코스타리카는 아예 군대가 없다. 그런데도 심심하면 군부쿠데타와 독재가 만연한 중남미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다. 무력이 평화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지켜줌을 증명하고 있다.
"평화는 무기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지켜준다"
이재영은 "인민이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강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인민들은 '안녕 대자보'와 이 추운 겨울 '물대포'를 맞으면서 촛불을 들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에 민주당을 비롯한 제도권 민주정당이 함께 해야 한다. 민주당이 왜 지지율이 낮은가? 이재영이 말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강한 열망"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면 평화가 온다. 촛불이 활활 타오를 때인 지난 2008년 6월 11일 이재영은 이렇게 썼다.
이런 인민 욕구를 들어줄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없다는 점이 현 국면의 유일한 딜레마이다. 이명박은 노무현 말기 같고, 민주당은 2004년 즈음의 민주노동당만도 못하고, 유일하게 연단에 설 수 있는 정치인인 강기갑은 민주노동당을 말하지 않고, 진보신당은 1997년 국민승리21수준이다. 경제 사회적 권리와 평등을 보장하라는 촛불의 목소리를 받아 안을 유력한 진보정치 세력이 없다는 점이 촛불을 가로막는 진정한 장벽이다.(258쪽)
촛불은 자발성이었다. 하지만 자발성만으로는 정부와 권력을 만들 수 없다. 정부는 결국 제도권 정당이 만든다. 2008년 민주당과 민노당은 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실패는 2012년 12월 19일에도 실패했다. 이재영이 생명을 놓은 후 불과 일주일만이다. 민주정부를 만들지 못한 결과는 언론사 사옥과 노동자 심장부가 공권력에 유린당하는 치욕스러운 일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다중을 믿었던 이재영...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재영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시민사회세력을 향한 날 선 비판도 이어간다. 그 비판을 읽어가면 거북함저 든다. 이재영은 이들보다 다중의 힘을 믿었고, 신뢰했다. 그들이 이룰 것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그는 그 위대함을 몸으로 경험하지 못했지만,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누가 이 거대한 물결(2008년 촛불집회)을 감히 규정하거나 통제하겠는가? 절대 권력이라는 대한민국 대통령도, 세계 좌익의 주목을 받는 한국 운동권도 통제하지 못하는 카오스다. 그곳에는 직업적 운동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중의 창의성과, 준비된 권력도 없이 대통령 물러나라는 군중의 무모함과,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중(多衆)이 함께 있다. 거기서 뭔가 시작될 것이다. 거대하게 그러나 천천히'(259쪽)
2008년 촛불 믿었던 이재영, 2013년 '안녕 대자보'도 믿을 것이다. 이재영이 바랐던 그 꿈을 우리가 함께 이루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재영은 "단지 부끄러운 것은 '사회주의 혁명 조직'에서 일했다는 기억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커녕 사상과 양심의 자유조차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데 대한 자괴감"이라고 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이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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