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보수 첨병' 키케로가 이석기를 탄핵한다면?

[세계문명기행V : 로마문명이야기⑧] 키케로(3)

등록|2014.01.03 13:47 수정|2014.01.03 13:47
키케로가 집정관을 하던 때(기원전 63년) 로마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하나가 터진다. 그게 바로 '카틸리나 음모'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이 사건의 주모자인 카틸리나를 탄핵하고, 이어 그와 추종자를 제거함으로써 로마를 구한다. 그렇다면 이 음모는 어떤 것이었을까.

로마는 기원전 1세기에 들어오면서 최고의 경제호황을 누렸다.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지중해 전역의 최강자가 되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당시 로마에는 지중해 전역에서 온갖 사치품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상류층 사람들은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향락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사회 양극화였다. 도대체 이 넘치는 부가 상류층 사회로만 들어가고 일반 평민들의 삶은 좋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때 평민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예나 지금이나 돈을 빌리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상류층의 호화로운 삶과 비교되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빚은 눈덩이처럼 쌓여 많은 파산자들이 발생했다.

이럴 때 카틸리나라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 사람은 원래 독재자 술라가 지휘하는 로마군단의 지휘관 출신의 정치인인데, 이 사람 또한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그의 이런 배경 때문에 자연스레 그는 사회 불만세력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는 집정관이 되어 이 부채 문제를 청산하겠다고 공약했다. 요즘 이야기로 한다면 대통령이 되면 채무자들의 모든 빚을 탕감해준다는 공약을 내세운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공약이라면 집정관을 뽑는 민회에서 그가 당선되는 것은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판단 미스였다. 집정관 후보자를 내는 데 권한을 행사하는 원로원은 그가 집정관이 되면 로마 경제를 파탄낼 것이라 우려한 나머지 그에게 후보자 지위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몇 번 시도 끝에 가까스로 원로원을 통과하니 이제는 믿었던 민회마저 그를 외면했다.

기원전 63년 그는 다시 한 번 집정관 자리를 노리고 출마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맞수 키케로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거듭되는 낙선 속에서 그의 마음은 탔고, 성격은 더욱 과격해졌다. 불만세력은 점점 그에게 다가왔고, 드디어 그는 로마를 타도하는 것만이 방법이라 생각하고 거대한 음모를 진행한다. 물불 가리지 않는 지지자들을 모았고, 로마 밖의 에트루리아에까지 도움을 청해 로마 전복을 계획했던 것이다. 명실상부한 국가 전복음모였다.

천하의 웅변가 키케로, 로마를 살리다

카틸리나를 탄핵하는 키케로, 세자레 마카리, 1889. 키케로가 카틸리나를 탄핵하는 연설을 하자 카틸리나(오른쪽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 주변에 앉았던 지지자들은 하나 둘씩 빠져 나간다. 당혹스런 카틸리나, 혼자 남아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위키피디아


이 음모를 알아낸 이가 키케로다. 그는 카틸리나가 참석하는 원로원 회의에서 카틸리나의 음모를 공개하면서 그에 대한 응징을 요구한다. 듀란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키케로는 …최고 수준의 격렬한 비난을 그에게 쏟아 부었다. 연설이 진행되고 있을 때, 카탈리나 주위의 좌석이 하나씩 하나씩 비워졌고, 마침내 혼자만 남게 되었다. 카틸리나는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비난 공세와 날카롭고 무자비한 구절들을 묵묵히 참아 냈다. 키케로는 모든 감정을 이용했다. 그는 국가를 공동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카틸리나를 부모 살해를 의도한 자라고 말했다. 키케로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그리고 넌지시 국가에 대한 음모, 도적질, 간통, 변태성욕이라는 죄목으로 카틸리나를 기소했다. 마지막으로 키케로는 유피테르 신에게 로마를 지켜달라고, 카틸리나를 영원한 형벌로 다스려 달라고 간청했다." (<문명이야기 3-1>, 250쪽)

이렇게 되자 카틸리나는 로마를 탈출하여 그의 지지자와 함께 에트루리아로 도주한다. 이에 키케로는 원로원으로 하여금 이 역모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케 한다. 그 후 로마군은 카틸리나 반역군과 싸워 그 모두를 소탕한다. 이 소탕으로 카틸리나와 그의 추종자 3천여 명이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키케로는 로마를 구한 인물, '조국의 아버지'(국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키케로가 이석기를 탄핵한다면?

국정원 직원에 끌려가는 이석기 의원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지난해 9월 4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 있던 이 의원이 국정원의 구인영장 집행에 응하고 있다. ⓒ 남소연


나는 키케로가 카틸리나 음모를 분쇄하는 과정을 보면서 세기의 재판이라고 불리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떠올린다. 만일 키케로가 카틸리나 음모 대신 '이석기 음모'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보수우익의 첨병이었던 키케로가 지금 이 땅에 나타나 이 사건을 본다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과연 그가 이 사건을 내란음모로 단정하고 법정에서 엄벌을 구하는 열변을 토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러지는 못했으리라 판단한다. 그는 적어도 법률가였고, 그것도 이성의 힘을 믿는 자연법의 옹호자였다. 그런 그가 이석기의 '음모'를 카틸리나의 그것과 동일시했을 리는 없다.

무릇 한 국가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내란음모죄는 이른바 위험범이다. 위험범은 어떤 법익(법으로 보호하는 이익)을 현실적으로 침해하지 않아도 위험이 있다는 그것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다. 따라서 위험범은 속성상 처벌자의 자의(恣意)가 개입될 수 있는 범죄유형이라 그 처벌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죄의 성립요건을 미리 법률에 규정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헌법원칙인 죄형법정주의는 자칫 파산을 맞이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을 때 그것을 범죄로 처벌하는 것이 용인될까. 그것은 그 음모의 실현가능성 및 명백현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 음모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실현가능성이 없으면 그것은 처벌할 수 없는 불능범에 해당하고,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이 없다면 그것은 반체제인사들의 공상적 토론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석기의 사상이나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사실 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만일 그가 어떤 모임에서 혐의사실과 같은 말을 해서 사람들을 선동했다면 내겐 일고의 가치도 인정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그저 이 땅에 돈키호테 한 명이 나타나 사람들을 웃겼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건전한 상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결코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동을 내란음모죄로 처벌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내란음모는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한 음모로 이 나라의 안위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국가 대역 범죄다. 카틸리나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원로원 의원과 키케로를 살해하고 로마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에겐 동조자 수천 명이 있었으며 외세인 에트루리아와도 연계되었었다. 그러니 그의 음모는 누가 보아도 실현가능했으며, 목전의 위험도 있었다. 만일 그것을 막지 않았다면 여지없이 로마는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석기 음모'는 어떤가. 그와 몇몇 사람들이 어느 회합에서 이야기했다는 것이 모두 사실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카틸리나의 음모와 비교할 수 있을까. 법률가 이전에 평범한 시민으로서, 또한 역사의 교훈을 중시하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만고의 웅변가 키케로가 지금 환생하여 국정원, 그리고 검찰을 대신하여 이석기를 탄핵한들 이 사건을 카틸리나 음모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키케로에게서 법의 기원, 자연법을 배운다

키케로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자연법 사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난 김에 법의 기원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법은 우리를 강제한다. 법은 우리에게 금(禁)하고 명(命)한다. 법은 때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러니 법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나에겐 거추장스런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이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다. 법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말이다. 법의 존재를 부정하고서는 하루도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의문을 품는다. 나에게 주어진 이 법을 꼭 지켜야 하는가. 내가 이 법에 굴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법이 정당한 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법이 정당하지 못할 때 사회는 위태롭다. 항상 그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나타나며 그런 법은 언젠가는 생명력을 다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법은 어떤 경우에 정당하다고 할 것인가, 그 정당성의 근거는 무엇일까.

옛날부터 이런 논쟁은 수없이 존재한다. 인간사회의 범주에서 구할 때는 그 근거를 절대적인 왕에게서 구하기도 했다. 왕의 명령은 신성한 것이니 그것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권이 신장되면서 법의 근거는 국가 공동체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에서 찾았다. 민주국가에서 법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민의 뜻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루소는 이를 인민의 일반의지(general will)라고 말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해 보자. 민주국가에서는 다수 인민의 뜻이 법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정당성이 있는 법이라고 한다. 국민의 뜻은 평상시 대의기관인 국회가 대신하니 국회가 법률을 만들면 그것이 곧 정당성 있는 법이 된다. 국민은 국가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기본법을 만든다. 그것이 헌법이다. 헌법은 모든 법의 상위법으로 하위법의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모든 하위법은 헌법의 이념에 맞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인민(국민)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인민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국회가 국민의 뜻을 대신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 기관을 움직이는 것 역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언제든지 국민을 배반할 수 있으니 국회는 자칫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기관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치즘이나 파시즘도 대부분 국회라는 대의기관의 법률을 통해 전체주의를 만들었다. 그 경우에도 그 법이 우리가 지켜야 할 정당한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법의 정당성의 근거를 오로지 국민 혹은 인민의 뜻이라고 하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은 국민의 뜻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인류 지성이 발견한 바로는 그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이 자연법 사상은 역사가 길다. 이 사상은 절대 왕정에서 벗어나면서 근대시민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성행한 법이론이지만 시민사회와 관계가 없었던 고대에도 많은 지성인들에게 각광받던 이론이었다. 그 체제가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법률의 근본적 출발은 자연본성에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본성은 신과도 연결되니 법은 인간사를 떠나 신의 본성으로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글의 주인공 키케로는 2천 년 전에 이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했다.

▲ 휴고 그로티우스 초상, Michiel Jansz. van Mierevelt, 1631. 그로티우스는 근대 자연법 사상을 연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네덜란드의 법률가로 자연법에 입각하여 국제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 위키피디아



"무릇 법률이란 자연본성의 위력이고, 현명한 인간의 지성이자 이성이며, 정의와 불의의 척도네…. 우리는 법이 성립하는 출처를 저 최고법에서 포착해야 할 것이니, 최고법은 여하한 성문법도 생기기 이전에, 심지어 어떤 도시 국가도 성립되기 이전에 아주 오랜 세월 전에 먼저 생겨났네." "법은 여론에 의해서 성립되지 않고 자연본성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는 일만큼 훌륭한 일은 아무것도 없네." (<법률론>, 성염 옮김, 71, 78~79쪽)


자연법적 시각에서 보면 최고법은 헌법이 아니다. 최고법은 자연본성과 인간이성 그 자체로 헌법을 능가한다. 헌법이 사람들에 의해 농락될 때 그 헌법을 폐할 수 있는 것은 여론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자연본성에 입각한 법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본성에 입각한 법, 곧 자연법에서는 악법은 결코 법이라 불릴 수 없다.

이런 사고에서는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 법이 자연본성과 인간이성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당성을 잃은 법이다. 이 말이 주는 엄중성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과제를 던져 준다. 대한민국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법, 오늘도 내일도 만들어질 수많은 법, 이 법들 중에서 과연 자연본성과 인간이성에 반하는 그런 법은 없는가. 법률가들을 비롯한 지성인들의 깨어 있는 태도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