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고교생이 심상치 않다
철도 파업 놓고 토론수업 했더니... "정부가 노조 설득해야"
▲ 교육부 공문을 일선 고교에 이첩한 서울시교육청 공문. ⓒ 서울교육청
정부는 교사를 '개'로 보는 듯하다. 물라면 무는 충직한 개. 얼마 전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안팎에 게시한 대자보가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고 막으라고 하더니, 이젠 아예 교사의 수업 내용까지 간섭하려는 모양새다. 공문을 내려 민영화와 관련된 계기수업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민영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자보의 원인이라는 진단에서 나온 조치다.
들불처럼 번져가는 대자보 열풍을 어떻게든 차단해 보려는 무리수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근본적으로는, 온갖 방해에도 서서히 전모가 드러나고 있는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연이은 강수이며 고육지책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이젠 가래로도 도저히 막지 못할 지경에 빠져들고 있다. 백약이 무효인 정부의 헛발질에 이젠 측은한 마음마저 들 지경이다.
지금, 고교생이 심상치 않다
당선 직후 일성이 '국민 통합'이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 편은 오직 공안 검사들밖에 없다는 조롱이 쏟아지고 있다.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가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라는 것에서 보듯, 시민단체와 학계는 일찌감치 역사의 퇴행을 우려하고 있고, 종교계와 노동계도 '자랑스러운 불통'을 내세운 정부의 강공 드라이브에 등을 돌리고 있다.
지난 십수 년간 신자유주의에 길들여진 대학생들조차 '안녕'을 묻는 대자보 한 장에 '안녕하지 못하다'며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리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고비 때마다 기꺼이 도화선 역할을 했던 대학가가 봇물 터지듯 술렁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대선 불복'이라는 한마디에 안절부절 못하는 겁쟁이 야당, 민주당이 되레 정부 편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돌고 있다.
지금 고등학교의 분위기도 심상찮다. 상명하복에 길들여져 무기력에 빠진 교사들도, 대학입시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해본 적 없는 아이들도 하나 둘씩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라꼴이 이게 뭐냐'는 한탄에는 전교조와 교총의 구분이 없다. 돌아가며 1인 시위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현 상황을 심각하게 주시하고 있다.
수석교사제 도입과 교장선출 보직제, 학교 간-교사 간 성과급 지급 문제 등으로 학교 안팎이 시끄러웠을 때도, 심지어 얼마 전 정부가 전교조를 무리하게 법외노조로 규정했을 때조차도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명색이 미래세대를 가르친다는 교사가 엄혹한 현실에 눈 감은 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그야말로 양심의 발로에서 나온 공감이다.
여전히 정부는 전교조를 눈엣가시로 여겨 뭇매를 가하고 있지만, 요즘처럼 학교 안팎에서 전교조에게 우군이 많은 적은 없었다. 역사가 수십 년 전으로 퇴행하면서 존재감이 커졌다고나 할까. 한껏 위력을 발휘하던 종북 세력 운운하는 것도 이제는 잘 먹히지 않고 있다. 수년 동안 하도 익숙해져서 식상해진 탓이다.
아이들의 '시국 걱정'은 놀랍기보단 차라리 낯설다. 학교만 오면 스포츠와 연예 기사를 가십거리 삼아 키득거리던 아이들이, 요즘 들어선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민영화와 파업, 자본과 시장 등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지금껏 그런 이야기들은 아이들에게 '듣보잡'이었거나, 공부 깨나 하는 '범생이'들만의 분야였다.
▲ 김명환 위원장 민주노총 재진입, 강화된 경찰 검문검색철도노조 파업과 관련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이 민주노총 건물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26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앞에서 경찰들이 철도노조 체포영장 발부자의 수배 전단지를 쥔 채 검문검색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대학가를 넘어 불붙은 대자보 열풍이 고등학교 교실에서 이렇듯 진화하고 있다. 전교조 교사들이 계기수업을 통해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우리 사회의 '상식'은 그릇된 편견임이 밝혀지고 있다. 요즘엔 외려 아이들이 계기수업을 하자고 조를 정도다. 예년 같으면 기말시험이 끝나 들뜬 마음에 수업 자체가 불가능했다.
토론이 시작될 무렵이면,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와 '오유(오늘의 유머)'가 자연스럽게 찬반으로 갈라진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누가 '일베'고, 누가 '오유'에서 활동하는지 대개 알고 있다. 극우 성향의 '일베충'이라고, 또 종북 좌빨이라고 서로 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들이 정한 기준일 뿐, 아이들에게는 두 곳 모두 그저 스트레스 해소의 장일 뿐이다.
처음엔 예상대로 한쪽은 정부 편에 서고, 다른 한쪽은 노조를 두둔하지만, 토론이 이어지다 보니 첨예했던 주장이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수렴됐다. 치킨게임인양 마주보고 다투다 결국엔 똑같은 질문을 서로에게 던진 것이다.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하는 현실에서, 서로의 주장만을 따로 들어서는 어떤 게 진실인지 국민 입장에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에요. 왜 정부는 노조가 요구하는 대화와 토론을 거부할까요? 철도공사 사장과 노조위원장이 TV 앞에서 맞장 토론을 하면, 국민들이 갈등에 대해 잘 이해하고 현명하게 판단하게 될 텐데요.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쟁점에 대해 토론하다 보면 서로에게 갖는 불신도 저절로 사그라질 텐데 말이죠."
아이들도 아는 대화의 중요성, 왜 정부만 모를까
사사건건 데모하고 파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노조의 관행을 문제 삼았던 아이들도, 노조가 파업만 했다 하면 불법으로 몰고 전가의 보도처럼 체포영장 남발하는 정부의 무능함을 나무라던 아이들도, 오로지 대화와 토론만이 답이라고 강조했다. 개중에는 타협을 위해 시간이 걸리고, 불편함을 참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머리 굵은' 아이도 있었다.
▲ 김명환 위원장 등 철도노조 집행부에 대한 경찰의 체포영장 강제 집행이 시작된 22일 오전 서울 정동 민주노총 건물 1층에서 경찰 저지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연행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수업시간 아이들의 질문에 답변하기 궁색하면 버럭 화부터 내는 선생님들 있거든요. 보통 실력 없는 선생님들이 무슨 일이든 매로 해결하려 들죠. 파업 주동자 몇명 잡겠다고 백주대낮에 수천 명의 경찰을 풀어 전쟁 치르듯 하는 게 꼭 그런 모습이에요. 그깟 노조 하나 말로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건 정부가 무능한 거죠."
요즘 벌어지고 모습을 보노라면, 이 아이의 표현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함께 듣던 아이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좀비'라 불리던 고등학생들조차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여태껏 불우이웃돕기조차 학교가 '삥 뜯는다'며 조롱하던 아이들이 사회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이 교사로서 대견하기까지 하다. 다만 걱정되는 건, 이러다간 사회 전체에 큰 사달이 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온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가 넘쳐흘렀던 지난 성탄절, 경찰에 쫓기던 철도 노조 부위원장 등이 조계사로 피신했다. 기자들 앞에서 정부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외쳤고, 종교계에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정부는 저들의 간절한 요구에 응하기는커녕 사찰 경내에 사복경찰을 몰래 잠입시키는 등 기본적인 신뢰조차 무너뜨리고 있다. 아이들도 다 아는 '답'을 왜 정부만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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