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째 "3부문모형 설명하라"... 대학 내 족보를 아시나요?
시험기간 등장하는 일명 '족보', 못 본 학생들은 애꿎은 피해
"여러분들은 족보를 구해다 봐서 평균이 80점 대인데, 중국인 학생들은 평균 20점대예요."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서 한 교수가 수업 중 한 말입니다. 이 과목을 수강하는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족보(시험 기출문제)'를 구해서 봤습니다. 반면 10명의 중국인 학생들은 족보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한국 학생들에 비해 평균점수가 낮게 나왔습니다.
이 수업을 듣는 친구는 총 3장의 족보가 있었습니다. 2009년, 2011년, 2012년 기출문제가 그것입니다. 친구에게 부탁하여 당시 학생들이 봤던 족보와 올해 중간고사 시험지를 비교해 봤습니다.
2. 가계, 기업, 정부를 포함하는 3부문모형의 소득순환과정을 그려라(10점). - 2009년 중간고사
2. 가계, 기업, 정부를 포함하는 3부문모형의 국민소득 순환과정을 그리시오(5점) - 2011년 중간시험
2. 가계, 기업 정부를 포함하는 3부문모형의 소득순환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라(10점) - 2013년 중간고사
2009년, 2011년, 2013년 중간고사 2번 문제가 이처럼 모두 똑같습니다. 제가 2009, 2011, 2012, 2013년 중간고사 문제를 비교해 보니 상당수의 같은 문제가 그대로 출제됐습니다. 심지어 2009년과 2013년 중간고사 문제는 9문제 중 2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문제가 출제 됐습니다.
친구 녀석은 "우리 학과 수업을 듣지 않는 학생이라도 족보만 풀어본다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중국 학생들의 평균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당연하다"고 수긍하더군요.
족보, 네 잘못은 아닌데...그럼 누구의 잘못일까?
족보, 대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가족 혈연관계'를 정리한 가계도가 아닙니다. 자상한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덕(德)이자, 동기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정(情)이 됐습니다. 족보는 같은 과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기 때문에 타과 학생들은 여간해서 구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족보가 많은 학과로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하기가 내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까요. 제 선배 중 한 명은 "듣고 싶은 과가 있어서 복수전공을 하고 싶은데 그 과에 족보가 많아 고민이다"라며 고민했습니다. 지금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제 선배만이 아닐 것입니다.
학생들은 족보가 있는 과목을 선호하고, 시험기간만 되면 복사실은 족보를 사려는 학생들로 분주합니다. 복사실에서 족보가 어떻게 유통되는지, 한 단과대학 복사실 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직원은 "갖고 있는 족보들을 기사에 유출하기 싫다"며 꺼리더니 이내 다른 유통 경로를 알려줬습니다. 한 학과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과목별로 기출문제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들 다 학생들이 알려준 거야. 학생들이 하도 족보를 구하려고 하니까 교수들이 (학과 홈페이지에)올린거지. 우린 이걸 뽑아서 보관해 놓는 거야. 친하게 지내던 학생들이 졸업하고 찾아와서 시험지를 주고 가기도 하고. 그런데 강사들도 있으니까 학기가 끝나고 강사가 바뀌면 갖고 있는 시험지가 필요가 없어. 강사가 바뀌면 시험 유형도 바뀌니까. 필요 없는 족보가 있기도 하고 필요 있는 족보가 있기도 해."
직원은 학생들이 족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였습니다.
"족보 없는 학생들이 없더라. 족보 없는 복사실도 없고 족보 모르는 학생들도 없다. 이거(족보) 모르는 애들은 학생들 이기주의 때문에 모르는 거지. 서로 공유 안 하고 자기만 알려고 하니까 상대적으로 시험점수가 낮은 피해자가 생기는 거 아냐."
족보 있는 과목 찾아 수강신청... "모르면 피 본다"
족보가 있는지 모른 채 중간고사를 치른 중국인 학생 10명 중 6명에게 물었습니다. 기자가 "족보를 어떻게 생각 하세요?"라고 묻자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족보가 있으면 좋아요. 이번 중간고사는 족보가 있는지 몰랐지만 다음 기회에는 서로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이들은 중간고사 평균점수가 족보로 인해 낮게 나온 사실보다 족보라는 기출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묻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며칠 전 선배 두 명과 카페에 모여 각자의 겨울방학 계획을 얘기했습니다. 한 선배가 타 대학교 계절학기를 듣는다길래 호기심에 무슨 과목이냐고 물었습니다. 선배는 경상계열의 한 과목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선배가 한 마디 덧붙이더군요.
"그거 족보 판치지 않아? 모르면 피 볼 텐데."
다른 선배가 타대학교 족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족보를 보여줬습니다. 블로그나 대학생들이 모인 카페 등 여러 곳에 족보가 있었습니다.
이 수업을 신청한 선배는 "나도 족보 있는 거 아니까 신청 했어"라며 "E-Learning 수업이라 (인터넷으로) 틀어만 놓고 족보 봐서 A+받으면 돼. 우리 학과 사람들이 많이 듣더라"고 설명했습니다.
"교수들이 몇 년 째 계속 같은 문제 내는 건 문제가 있고 족보를 몰라서 피해보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이지."
그러면서도 선배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내 점수를 올릴 수 있다면 족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사람들이 이기적인거지. 내가 좋으면 좋고, 피해보면 싫고"라고 말하더군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족보를 보는 학생들. 그리고 족보를 몰라서 손해 보는 학생들. 교수들이 몇 년째 시험유형을 바꾸지 않고 족보가 학생들 사이에서나 복사실에서 오고간다면, 이 현상은 멈출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서 한 교수가 수업 중 한 말입니다. 이 과목을 수강하는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족보(시험 기출문제)'를 구해서 봤습니다. 반면 10명의 중국인 학생들은 족보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한국 학생들에 비해 평균점수가 낮게 나왔습니다.
이 수업을 듣는 친구는 총 3장의 족보가 있었습니다. 2009년, 2011년, 2012년 기출문제가 그것입니다. 친구에게 부탁하여 당시 학생들이 봤던 족보와 올해 중간고사 시험지를 비교해 봤습니다.
▲ 시험 기출문제, 일명 족보(왼쪽)와 올해 중간고사 시험문제입니다. 색연필로 칠한 부분이 같은 문제입니다. 총 9문제 중 2문제를 제외하고 같은 문제가 출제됐습니다. ⓒ 이남경
2. 가계, 기업, 정부를 포함하는 3부문모형의 소득순환과정을 그려라(10점). - 2009년 중간고사
2. 가계, 기업, 정부를 포함하는 3부문모형의 국민소득 순환과정을 그리시오(5점) - 2011년 중간시험
2. 가계, 기업 정부를 포함하는 3부문모형의 소득순환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라(10점) - 2013년 중간고사
2009년, 2011년, 2013년 중간고사 2번 문제가 이처럼 모두 똑같습니다. 제가 2009, 2011, 2012, 2013년 중간고사 문제를 비교해 보니 상당수의 같은 문제가 그대로 출제됐습니다. 심지어 2009년과 2013년 중간고사 문제는 9문제 중 2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문제가 출제 됐습니다.
친구 녀석은 "우리 학과 수업을 듣지 않는 학생이라도 족보만 풀어본다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중국 학생들의 평균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당연하다"고 수긍하더군요.
족보, 네 잘못은 아닌데...그럼 누구의 잘못일까?
족보, 대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가족 혈연관계'를 정리한 가계도가 아닙니다. 자상한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덕(德)이자, 동기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정(情)이 됐습니다. 족보는 같은 과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기 때문에 타과 학생들은 여간해서 구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족보가 많은 학과로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하기가 내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까요. 제 선배 중 한 명은 "듣고 싶은 과가 있어서 복수전공을 하고 싶은데 그 과에 족보가 많아 고민이다"라며 고민했습니다. 지금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제 선배만이 아닐 것입니다.
학생들은 족보가 있는 과목을 선호하고, 시험기간만 되면 복사실은 족보를 사려는 학생들로 분주합니다. 복사실에서 족보가 어떻게 유통되는지, 한 단과대학 복사실 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직원은 "갖고 있는 족보들을 기사에 유출하기 싫다"며 꺼리더니 이내 다른 유통 경로를 알려줬습니다. 한 학과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과목별로 기출문제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들 다 학생들이 알려준 거야. 학생들이 하도 족보를 구하려고 하니까 교수들이 (학과 홈페이지에)올린거지. 우린 이걸 뽑아서 보관해 놓는 거야. 친하게 지내던 학생들이 졸업하고 찾아와서 시험지를 주고 가기도 하고. 그런데 강사들도 있으니까 학기가 끝나고 강사가 바뀌면 갖고 있는 시험지가 필요가 없어. 강사가 바뀌면 시험 유형도 바뀌니까. 필요 없는 족보가 있기도 하고 필요 있는 족보가 있기도 해."
직원은 학생들이 족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였습니다.
"족보 없는 학생들이 없더라. 족보 없는 복사실도 없고 족보 모르는 학생들도 없다. 이거(족보) 모르는 애들은 학생들 이기주의 때문에 모르는 거지. 서로 공유 안 하고 자기만 알려고 하니까 상대적으로 시험점수가 낮은 피해자가 생기는 거 아냐."
▲ 한 학과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과목별로 기출문제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 이남경
족보 있는 과목 찾아 수강신청... "모르면 피 본다"
족보가 있는지 모른 채 중간고사를 치른 중국인 학생 10명 중 6명에게 물었습니다. 기자가 "족보를 어떻게 생각 하세요?"라고 묻자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족보가 있으면 좋아요. 이번 중간고사는 족보가 있는지 몰랐지만 다음 기회에는 서로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이들은 중간고사 평균점수가 족보로 인해 낮게 나온 사실보다 족보라는 기출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묻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며칠 전 선배 두 명과 카페에 모여 각자의 겨울방학 계획을 얘기했습니다. 한 선배가 타 대학교 계절학기를 듣는다길래 호기심에 무슨 과목이냐고 물었습니다. 선배는 경상계열의 한 과목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선배가 한 마디 덧붙이더군요.
"그거 족보 판치지 않아? 모르면 피 볼 텐데."
다른 선배가 타대학교 족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족보를 보여줬습니다. 블로그나 대학생들이 모인 카페 등 여러 곳에 족보가 있었습니다.
이 수업을 신청한 선배는 "나도 족보 있는 거 아니까 신청 했어"라며 "E-Learning 수업이라 (인터넷으로) 틀어만 놓고 족보 봐서 A+받으면 돼. 우리 학과 사람들이 많이 듣더라"고 설명했습니다.
▲ 선배가 타 대학교 족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족보를 보여줬습니다. 블로그나 대학생들이 모인 카페 등 여러 곳에 족보가 있었습니다. ⓒ 이남경
"교수들이 몇 년 째 계속 같은 문제 내는 건 문제가 있고 족보를 몰라서 피해보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이지."
그러면서도 선배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내 점수를 올릴 수 있다면 족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사람들이 이기적인거지. 내가 좋으면 좋고, 피해보면 싫고"라고 말하더군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족보를 보는 학생들. 그리고 족보를 몰라서 손해 보는 학생들. 교수들이 몇 년째 시험유형을 바꾸지 않고 족보가 학생들 사이에서나 복사실에서 오고간다면, 이 현상은 멈출 것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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