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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6시간을 앉은뱅이 자세로... 잘 때도 불켜고"

[인터뷰] 병역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박배근씨

등록|2013.12.28 17:34 수정|2014.01.02 13:47
박배근(37)씨는 여호와의 증인이다. 안양역 근방에서 연말을 맞아 부지런히 전도 활동(그들 말로는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지나가던 내게도 파수대를 전해 주었다. 파수대는 여호와의 증인에서 만드는 성경 이해를 위한 보조 책자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는 전국적으로 10만 명에 이른다(그들은 자신들을 신자라고 하지 않고 증인이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239개국에서 700만 명 정도가 믿고 있다. 외국에선 여호와의 증인을 그냥 종교의 하나로 본다. 이들에 대한 시선도 호의적인 편이다. 비교적 모범적인 활동을 하는 종교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오랜 시간 이단으로 불리며 '천대' 당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증인은 집총을 거부하는 것으로 주목받아 왔다. 박배근씨도 1997년에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했다. 한반도 땅에서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 증인에 대한 탄압의 역사는 참혹했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인권 상황이 나아졌다지만, 병역을 거부하는 많은 청년들이 교도소로 가고 있는 현실은 여전하다. 전세계 양심적 병역거부자 중 90% 이상이 한국인이며, 매년 750명 가량의 청년들이 군대 대신 감옥으로 가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다.

지난 21일, 안양역 근처 카페에서 박배근씨와 마주 앉아 복역 경험을 중심으로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회중 감독자이다. 감독자란 기독교를 예로 들면 목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목사와는 많이 다르다. 여호와의 증인에 목사같은 1인 지도자는 없다. 회중(여호와의 증인이 집회를 보는 단위)내 몇 명의 감독자들이 회중과 관련된 업무를 분담해서 맡는다. 여호와 증인에겐 종교 활동과 관련한 금전적인 보수나 대가는 전혀 없다. 감독자도 마찬가지다. 감독자들은 가장 모범적인 증인들로 추천받아 미국에 있는 협회 본부에서 승인이 떨어지면 활동할 수 있다. 정확히 규정된 건 없지만 회중별로 보통 5~9명 정도가 활동한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믿음을 지니게 되면서 저도 믿게 되었어요. 부모 입장에서는 좋은 것을 자녀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 아닌가요?"

그는 여호와의 증인 2세다. 안양에서 나고 자랐다. 어머니를 따라 회중에 드나든 것이 증인이 된 계기다. 성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세상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이 조금씩 풀렸다. "세상의 이런 모습들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그에겐 항상 의문이었다. "인간 세계 넘어 이 모든 것을 만든 존재가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 "이 놀라운 세상을 만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믿음이 굳어지게 되면서 성서 공부를 더욱 파고들었다.

"다른 종교를 믿어보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어머니의 영향이 크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진리라는 느낌이 왔으니 다른 종교를 볼 필요가 없었어요. 만약 여호와의 증인에 뭔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믿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원시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만큼 기독교적 순수성을 중시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세상 모든 전쟁을 반대한다. 그것이 장난감 총이라고 해도 그것을 들고 살상 행위를 훈련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이는 병역 거부로 이어진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에 있는 한 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을 마친 후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병역거부는 그에겐 자연스런 과정이었다(여호와의 증인은 병역거부에 따른 복역을 '중립 갔다 온다'고 말한다).

"병역거부가 군대이탈·성폭행·도둑질보다 중죄인가"

여호와의 증인 감독자인 박배근씨그도 병역거부로 얀양교도소에서 징역을 살았다. ⓒ 김재용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어린시절부터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 갈등은 없는 편이었어요. 선배들도 다들 그렇게 했으니까. 한국 사회에서 군대를 거부했을 때 발생하는 사회적 편견과 갖가지 불이익은 무섭지 않았어요. 신념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더 무서웠어요."

1996년 12월 10일 보충대에 입소했다. 지금은 입영 날짜에 입대를 하지 않고 있으면 경찰서로 출두한 후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하지만 당시는 일단 입대한 상태로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항명죄로 처벌받았다.

보충대에 가니까 소대장이 여호와의 증인 있으면 나오라고 호명을 했다. 4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혼자가 아니어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보충대에서 일주일간 신체검사를 받는 동안 그들은 종종 불려나가서 얼차려를 받았다. 항명에 대한 죗값이라고 했다. 보충대에서의 대기 기간이 끝날 무렵, 소대장이 집총을 명령했다. 밖으로 불러내서 총을 내밀어 잡으라고 했다. '군대에서 총을 잡으라는 건 정당한 명령'이기에 거부하면 그것을 증거 삼아 기소하기 위해서다. 소대장이 총을 내밀었을 때 잡으면 그냥 내무반으로 돌아가 정상적으로 복무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총을 거부했다.

보충대 대기 생활이 끝나고 다들 훈련소로 갈 때 그들은 선고가 날 때까지 또 다시 대기하기 위해 영창으로 들어갔다. 영창 생활은 가혹했다. 하루 종일 앉은뱅이 자세로 팔에 각을 세우고 있어야 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그 자세로 있어야 했다. 헌병이 수시로 가하는 인격적인 모욕감도 참아야 했다. 자살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취침 시간에 소등도 하지 않았다. 정자세로 누워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며 잠을 자야 했다.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기상하는 6시까지 화장실 이용도 금지였다. 아무리 급해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군대의 영창이라는 곳은 꽤 비인간적인 곳이에요. 제가 있을 때 한 명이 못 참고 밤에 실례를 하기도 했어요."

움직이는 시간은 식후 30분이 전부다. 다만 책을 읽을 순 있었다. 팔에 각을 잡고 읽어야 해서 책을 들고 읽는 자세가 된다. 그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재판 때는 줄줄이 불러내서 일렬로 세워놓고 판사가 간단히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판결을 내렸다. 지금은 병역법이 개정되서 1년 6개월을 복무한지만, 그때는 어떤 사정도 참작되지 않고 무조건 3년을 선고받았다. 10명에 대한 재판을 끝내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대표자 한 명에게 최후 진술권을 한 차례 주는 게 전부였다.

"군대에서 3년은 엄청나게 큰 형량이더라고요. 여호와 증인이 아닌 사람도 비슷한 시간대에 재판을 받았거든요. 한 명은 군대 이탈해서 성폭행 저지르고 도둑질을 했는데 판결을 보니까 2년 6개월이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무조건 3년 이었죠. 양심을 지키려는 우리가 그런 중범죄자 보다 더 큰 처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참 허탈하더라고요."

선고가 끝나자 한 달간의 영창 생활이 끝나고 그들은 육군 교도소로 갔다. 그곳에서 기다리며 병역증(불명예 제대)이 나오면 각자 흩어진다. 육군 교도소는 2년 이하의 형량을 선고받은 군인이 수감되는 곳이다. 그 이상의 형량은 받은 사람은 일반 교도소로 갔다. 그는 안양교도소로 갔다. 1997년 4월이었다. 교도소에 발을 들여 놓자 처음에는 두려움이 생겼다.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운동을 하고 있었어요. 몸에 울긋불긋 문신을 한 덩치 큰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아, 내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출력을 하기 전까지 방에서 대기했다. 출력이란 사회에서 직장을 얻는 것처럼 수감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각자 할 일을 배정 받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한다. 취장이라고 해서 식당에서 일하는 것도 있고, 하방 청소라고 해서 청소하고 밥 하고 심부름해주는 일도 있다. 간병이라고 해서 교도소 내 의사의 진료 활동을 보조해주는 일도 있다.

"취장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당시 3000명 분의 식사를 해야 했어요. 육체적으로도 매우 고된 데다 처음에 일을 할 때 엄청나게 맞는다고 해요. 저랑 같은 시기에 수감되서 다른 방에 있던 증인을 면회 때 한 번 봤는데 어찌나 맞았는지 제대로 걷지를 못하더라고요. 근데 또 맞았다는 말도 못해요. 그러면 당연히 보복이 돌아오니까요. 그리고 3일에 한 번씩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알람도 없고 깨워주는 사람도 없어요. 늦게 오면 또 맞지요."

수도권의 지역의 한 교정시설 간부는 여호와의 증인 수감자들을 '특급수'라고 했다. "교정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취장 등 일반 제소자들이 기피하는 일은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들 몫"이었다. 제소자들이 기피하는 만큼 취장은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는 다행히도 간병에 배정됐다. 당시 안양교도소에는 40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를 포함해 총 6명이 모두 담당했다. 일하는 인원이 적다보니 그들도 상당히 바빴지만, 그래도 취장에 있는 증인보단 편했기에, 그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지냈다고 한다.

증인들은 담배를 피지 않는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외통이라고 해서 모범적인 수감자들은 외부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는 혜택을 준다. 그럼 공장에서 한 달에 20만 원 씩 줬다. 일을 마치고 교도소로 들어올 때 담배 등 반입 금지 물품을 숨겨오지는 않는지 소지품 검사를 받는다.

그를 포함해 여호와의 증인들은 외통을 많이 나갔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담배도 피지 않을뿐더러 속이는 행위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검사는 그리 꼼꼼하게 하지 않았다. 그것을 이용해서 같은 방에 있는 덩치 큰 수감자가 담배를 가져오라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다. 당연히 그는 거부했고 아무리 위협을 해도 말을 듣지 않자 그 사람은 결국 제풀에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그나마 운이 편이이서 같은 방에 있는 수감자에게 시달림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다른 방에 있던 증인들은 심한 고통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어떤 증인에겐 같은 방에 자신을 심하게 괴롭히는 사람이 있었대요. 밤에 잠도 못 자게 하는 등 어찌나 시달림을 받았던지 '아 이러다 죽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대요."

당시 한자 시험을 봐서 합격하면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는 정책이 있었다. 시험 일이 촉박했지만 그는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결국 시험에 합격하고 이감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부정한 일도 많이 목격했다. 그 중 하나가 유력한 인사에 대한 특별한 처우였다. 마침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안양교도소에 잠시 수감된 적이 있었다. 교도소 측은 그에게 한 개의 사동 전체를 사용하도록 해주었다. 운동기구도 비치해 주며 갖가지 특혜를 베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저런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도  편하게 사는구나."

나의 안녕함을 위해 그들의 안녕함을 바란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 1주년 특사로 9개월 가석방을 받아서 2년 3개월 형기를 마쳤다. 1999년 2월 25일 출소한 후 복학해서 3학년 까지 학교를 다니다가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해 중퇴했다. 그나마 지금은 출소 후 5년이 지나면 전과기록은 삭제된다고 한다지만, 여전히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것은 어렵다. 학습지 교사나 청소 등의 불안정한 직업에 오래 종사했다.

최근에는 도시락을 납품하는 배달 일을 구할 수 있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일자리라 다행이라고 한다. 2007년에 결혼해서 현재는 3살 짜리 딸아이도 있다. 사진으로 본 그의 딸은 인형처럼 너무 귀여웠다.

"저는 지금 생활에 너무 만족하고 있어요. 세상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보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삶이 너무 행복하거든요. 또 여호와 하나님은 가정에 충실하라고 하셨거든요.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저의 소중한 보물입니다(웃음). "

그는 커피를 마신 후 해맑게 웃으면서 "커피 잘 마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전도하러 가야 해요"라고 말하며 총총히 거리로 나섰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호와 증인의 교리에 무조건 동의하는 입장은 아니다. 병역거부만이 양심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폭력적인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고, 내 아이에게도 그런 사회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폭력적인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한나 아렌트(파시즘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는 '폭력은 침묵과 순응이라는 괴물을 낳고, 그 괴물은 다시 악의 진부함을 배태한다'고 말했다. 나의 안녕함을 위해 그들의 안녕함을 바라는 이유다.

한국의 소수자들이 새해에는 더 많이 안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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