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원했던 건... 단지 '인간적인 삶'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읽고
1970년대 대한민국은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게 된다. 유신체제가 성립되고, 정부는 오직 경제 부흥만을 위해 새마을 사업과 공업화 추진을 감행한다. 목표는 '고도 경제 성장'이라는 신념아래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복지가 무엇인지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7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이 다각적으로 파헤쳐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구체적인 문제들은 근대화를 급격히 촉진시키고 있는 사회에서 흔히 발생되는 가치관의 부재라든가, 혹은 삶의 기반을 갖지 못하고 도시의 변두리에 밀려나 있는 하층민들의 삶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이다.
이 작품에서는 권기용이라는, 연약하면서 또한 충동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 등장 한다. 그의 행위는 비교적 온건하고 아니 온건하려고 노력하는데, 사려 깊은 오 선생의 관점을 통하여 서술된다. 윤흥길 작가는 화자의 입장에 서기도 하지만, 동시에 권기용의 입장에 서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1970년대는 급격한 산업화의 소치로 가치관의 부재, 도시 하층민들이 사회와 빚는 여러 가지 갈등들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개인과 사회의 심홍을 작중인물들을 통해 잘 묘사해 준다. 바로 그 인물이 '권기용'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권기용은 성남시의 한 성실한 시민으로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애를 쓴다. 계속되는 국가의 막무가내 식 횡포에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집과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의 정책에 휩쓸려 좌절하게 된다. 또한 얼떨결에 광주단지 사건의 극렬한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주목되어 중상모략을 당하게 된다.
그가 대범한 성격을 지니고 일찍부터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적극적 개혁 의지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그로서는 당국의 주목을 받는 일쯤은 떳떳하고 예사롭게 넘겨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십자포화를 견디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밀어닥치는 당국의 횡포를 견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이 지고 있는 현실의 무게도 감당을 못하는 능력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관성 없는 행동을 계속하게 되고 오 선생에게 자주 빚을 지게 된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의 아내가 해산할 무렵이 됐지만, 수술비를 감당 할 수 없게 되자 말도 안 되는 강도 행위를 벌인 후 6일 동안 사라져 버린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필자는 필자 자신이 얼마나 졸렬한 사람인가를 깨닫게 됐다. 잘못된 사회라는 것을 알고 그 사회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그 의도를 실현시키지 못하여 고민하는 '연약한 사람'이 과연 권기용 뿐일까? 필자 역시 권기용과 비슷한 상황이였더라면, 아끼던 아홉 켤레의 구두를 태우며 허망하게 웃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과 꿈의 커다란 장벽을 의식하면서도 그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거나 서로간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연약한 성격의 소유자'는 바로 '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적인 삶', 사람답게 살도록 보장만 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도감에 젖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고 그들의 이상은 회진 되었을 것이다.
2013년인 지금도 도시의 변두리에서 밀려난 소외된 사람들은 절실하게 '인간적인 삶'을 찾기 위해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알고 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고작 해줄 수 있는 무엇인가? 불우 이웃 성금이나 쌀을 보내 주는 것이 전부 아닌가?
우리 대한민국은 너무 급하게 뛰어만 왔다. 그렇다 해서 대한민국이 일류 선진국이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때 그 시절, 그들이 힘들게 살아오면서 바랐던 것은 바로 '인간적인 삶' 이다. 이제는 그들에게 아니 소외된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인간적인 삶', 사람다운 삶을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은 뛰기 바쁘다. 70년대는 그렇다 치고 2000년대인 지금도 우리는 살기 바쁘다.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 소외된 그들 모두를 감싸 안기에는 버겁다. 진정한 일류 선진국이 되길 원한다면, 국가적으로 대한민국의 수많은 '권씨'를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7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이 다각적으로 파헤쳐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구체적인 문제들은 근대화를 급격히 촉진시키고 있는 사회에서 흔히 발생되는 가치관의 부재라든가, 혹은 삶의 기반을 갖지 못하고 도시의 변두리에 밀려나 있는 하층민들의 삶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이다.
이 작품에서는 권기용이라는, 연약하면서 또한 충동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 등장 한다. 그의 행위는 비교적 온건하고 아니 온건하려고 노력하는데, 사려 깊은 오 선생의 관점을 통하여 서술된다. 윤흥길 작가는 화자의 입장에 서기도 하지만, 동시에 권기용의 입장에 서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1970년대는 급격한 산업화의 소치로 가치관의 부재, 도시 하층민들이 사회와 빚는 여러 가지 갈등들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개인과 사회의 심홍을 작중인물들을 통해 잘 묘사해 준다. 바로 그 인물이 '권기용'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권기용은 성남시의 한 성실한 시민으로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애를 쓴다. 계속되는 국가의 막무가내 식 횡포에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집과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의 정책에 휩쓸려 좌절하게 된다. 또한 얼떨결에 광주단지 사건의 극렬한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주목되어 중상모략을 당하게 된다.
그가 대범한 성격을 지니고 일찍부터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적극적 개혁 의지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그로서는 당국의 주목을 받는 일쯤은 떳떳하고 예사롭게 넘겨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십자포화를 견디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밀어닥치는 당국의 횡포를 견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이 지고 있는 현실의 무게도 감당을 못하는 능력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관성 없는 행동을 계속하게 되고 오 선생에게 자주 빚을 지게 된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의 아내가 해산할 무렵이 됐지만, 수술비를 감당 할 수 없게 되자 말도 안 되는 강도 행위를 벌인 후 6일 동안 사라져 버린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필자는 필자 자신이 얼마나 졸렬한 사람인가를 깨닫게 됐다. 잘못된 사회라는 것을 알고 그 사회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그 의도를 실현시키지 못하여 고민하는 '연약한 사람'이 과연 권기용 뿐일까? 필자 역시 권기용과 비슷한 상황이였더라면, 아끼던 아홉 켤레의 구두를 태우며 허망하게 웃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과 꿈의 커다란 장벽을 의식하면서도 그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거나 서로간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연약한 성격의 소유자'는 바로 '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적인 삶', 사람답게 살도록 보장만 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도감에 젖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고 그들의 이상은 회진 되었을 것이다.
2013년인 지금도 도시의 변두리에서 밀려난 소외된 사람들은 절실하게 '인간적인 삶'을 찾기 위해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알고 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고작 해줄 수 있는 무엇인가? 불우 이웃 성금이나 쌀을 보내 주는 것이 전부 아닌가?
우리 대한민국은 너무 급하게 뛰어만 왔다. 그렇다 해서 대한민국이 일류 선진국이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때 그 시절, 그들이 힘들게 살아오면서 바랐던 것은 바로 '인간적인 삶' 이다. 이제는 그들에게 아니 소외된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인간적인 삶', 사람다운 삶을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은 뛰기 바쁘다. 70년대는 그렇다 치고 2000년대인 지금도 우리는 살기 바쁘다.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 소외된 그들 모두를 감싸 안기에는 버겁다. 진정한 일류 선진국이 되길 원한다면, 국가적으로 대한민국의 수많은 '권씨'를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창모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blog.naver.com/ccm3018)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 작성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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