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이 경악한 교회, 이유는?
서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중심지를 가다 (2)
그건 세기의 방문이었다.
1665년부터 1807년까지 200년이 넘는 동안 이 곳 해안가에서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그 후로도 식민지배는 계속돼 가나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은 때는 1957년이었다. 그로부터 50여 년 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리고 2009년 7월 11일, 그 미국 대통령은 드디어 바로 이곳 가나의 케이프코스트 성을 방문했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 부인인 미셸 오바마의 고조 할아버지는 이렇게 팔려온 노예였다. 이쯤 되면 케이프코스트 성은 오바마에게 흑인 조상들의 비극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가족의 역사, 그것도 불과 5대 전에 있던 가계의 비극의 현장인 것이다.
이날 방문에서 오바마는 특히 지하감옥 위에 있는 교회를 보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가 케이프코스트 성 광장에서 피력한 소회는 매우 간결하지만 분명하고 강렬하다.
"지하 감옥 위에 교회가 있다니,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때로 악을 바로 앞에서 마주합니다. 그런데 그 악에 눈을 감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백인들이 얼마나 많이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했길래 천만 명이 넘는 사람을 '사냥'할 수 있었단 말인가? 말라리아, 황열병 등 온갖 풍토병이 창궐했을 테고, 이렇다 할 예방접종도 없었을 텐데 그게 가능이나 한 이야긴가?
비밀은 여기에 있다.
식민지 시대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자들에게 빌붙거나 야합하는 무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백인들에게 노예 사냥은 손쉬운 일이었다. 왜냐면, 바로 이들에게 총과 술을 사는 족장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족장들은 백인들과 거래를 했다. 총과 술을 받는 대신에 자신들의 이웃 부족민들을 사냥해 백인들에게 그 대가로 제공한 것이다. 술맛을 본 사람들은 점점 중독이 되어 갔고, 술은 더 깊숙이 내륙으로 퍼져갔다. 이 손쉬운 거래의 단맛을 본 일부 족장들은, 중독되는 강도만큼이나 더 많은 수의 노예들을 사냥해갔다. 그들에게 총이 생기면서, 무기라고는 창과 칼밖에 차지 않은 다른 부족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백인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으면서 수백만 명이 넘는 노예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식민 지배자들과 야합해 이웃 부족을 노획하고 백인에게 팔아 넘긴 부족이 어딘지,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사람마다 이야기가 달라 확실치 않다. 특히나 정확한 기록자료가 많지 않아 그 진위 여부를 알기가 어렵다. 한 안내 서적에는 아샨티 부족이라고 나오는데, 아샨티 부족은 현재 가나 내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여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이 있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단지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가나의 친구들에게 식민지 지배, 노예 무역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면 놀랍게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가 아주 많다. 3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식민지배를 하며 자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도 수탈해간 서유럽, 특히 영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간혹 묻곤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매우 놀라웠다.
"글쎄... 뭐, 별로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음, 식민지 지배는 분명 나쁜 거지. 그렇지만 영국이 우리에게 서구 문물도 전파해줬고, 바깥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준 것도 사실이니까. 철도 같은 것도 그 때 생긴 거고."
식민지배를 겪어본 어느 민족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그나마 지식층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렇다면?
처음이 가나 친구들의 이런 반응이 혼란스러워, '분노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하기도 했다.
"분노도 어느 정도 대항해볼 힘이 있을 때 하는 거야. 이들은 유럽에 대해 대항하기에는 너무 격차가 벌어져 있어서, 아예 체념하는 것일지도 몰라. 왜냐? 그러는 게 훨씬 건강에 이롭거든."
가나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한국 친구의 이야기다. 역사를 잃지 않는 것은 한편으로는 '분노한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왜일까? 케이프코스트 성 관광 가이드의 '분노 섞인 안내'는 가나 입국 후에 처음 보는 것이라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 '어색한 분노'가 가이드로서의 연출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를 향한 지나친 모독일까?
누군가는 또 "16세기부터 있었던 과거 역사에 대해 지금 분노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테러리스트라도 조직해야 하는 겁니까?"라며 반문할지 모른다. 글쎄, 꼭 테러리스트를 조직하거나 아니면 짐바브웨처럼 백인들을 모두 몰아내야만 하는 것만이 분노의 표현일까? 얼마든지 '건강한 분노의 표출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가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의 어려움을 박차고 넘어갈 의지, 그것은 이런 분노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도 이 분노를 달래기 위해 영국은 더 많은 금광을 캐가는 대신, 가나에 가장 많은 원조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나라 중 하나로 자국민의 양심을 달래고 있고, 가나국민들에겐 '고마운'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아무리 역사와 정치, 그리고 현실이 서로 다른 영역이라 해도 이건 참 아무리 봐도 쉽게 납득이 되지가 않는다.
지하감옥에서 바다로 가는 길은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케이프코스트 성 출구까지 지하통로로 이동한 다음 바다로 향하는 문을 통과한 후, 쪽배를 타고 노예선까지 이동한다. 주민들은 이 쪽배를 카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지하 감옥에서 이 쪽배까지 가는 길마저 햇볕을 볼 수 없는 어두운 지하 통로를 통해서 가야 한다.
쪽배를 타기 위해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해서 '돌아오지 않는 문'이라고 부른다. 쾌쾌하고 메스꺼운 이 노예의 성을, '돌아오지 않는 문'을 따라 밖으로 나서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하얀 백사장을 따라 해안가 마을이 언덕까지 계속 이어져있다. 이제는 낡아 빛이 바랬지만, 한때 권세를 좀 누렸을 법한 집들이 언덕 뒤를 따라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이 식민지 시대, 노예든 광물이든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바닷가를 따라 사람들이 헝겊으로 만든 돛을 단 고기잡이 배들이 마치 요트 경기를 하듯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동네 청년들 몇이 성벽 끝자락에 걸터앉아 한낮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바로 뒤 지하 감옥, 몇 세기 동안 울부짖었던 조상들의 절규와 아픔을 느끼기엔 참 힘든 풍광이다.
방금 전까지 역사의식을 떠올렸던 게, 내가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밑도 끝도 없는 무한한 낙천주의, 그게 이들을 분노하지 않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뭔가? 이들은 '인생은 결국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을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1665년부터 1807년까지 200년이 넘는 동안 이 곳 해안가에서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그 후로도 식민지배는 계속돼 가나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은 때는 1957년이었다. 그로부터 50여 년 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리고 2009년 7월 11일, 그 미국 대통령은 드디어 바로 이곳 가나의 케이프코스트 성을 방문했다.
▲ 케이프코스트 성 지하감옥을 방문한 오바마2009년 7월 11일, 오바마는 케이프코스트 성을 방문했습니다. ⓒ obama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 부인인 미셸 오바마의 고조 할아버지는 이렇게 팔려온 노예였다. 이쯤 되면 케이프코스트 성은 오바마에게 흑인 조상들의 비극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가족의 역사, 그것도 불과 5대 전에 있던 가계의 비극의 현장인 것이다.
▲ 세기의 방문케이프코스트 성을 방문한 오바마 가족 ⓒ obama
▲ 채찍에 맞은 흑인 노예흑인 노예의 등이 온통 채찍 흔적입니다. 미셸 오바마의 고조부가 실제 이렇게 미국(남캐롤라이나)으로 팔려 간 흑인노예입니다. (캐이프코스트 박물관, 허가받은 촬영입니다.) ⓒ 차승만
이날 방문에서 오바마는 특히 지하감옥 위에 있는 교회를 보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가 케이프코스트 성 광장에서 피력한 소회는 매우 간결하지만 분명하고 강렬하다.
"지하 감옥 위에 교회가 있다니,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때로 악을 바로 앞에서 마주합니다. 그런데 그 악에 눈을 감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백인들이 얼마나 많이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했길래 천만 명이 넘는 사람을 '사냥'할 수 있었단 말인가? 말라리아, 황열병 등 온갖 풍토병이 창궐했을 테고, 이렇다 할 예방접종도 없었을 텐데 그게 가능이나 한 이야긴가?
비밀은 여기에 있다.
식민지 시대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자들에게 빌붙거나 야합하는 무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백인들에게 노예 사냥은 손쉬운 일이었다. 왜냐면, 바로 이들에게 총과 술을 사는 족장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케이프코스트 성곽의 대포천만 명이 넘는 "노예 사냥"이 가능했던 건 백인들에게 술과, 총을 받는 대가로 이웃 부족민들을 팔아넘긴 일부 부족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차승만
족장들은 백인들과 거래를 했다. 총과 술을 받는 대신에 자신들의 이웃 부족민들을 사냥해 백인들에게 그 대가로 제공한 것이다. 술맛을 본 사람들은 점점 중독이 되어 갔고, 술은 더 깊숙이 내륙으로 퍼져갔다. 이 손쉬운 거래의 단맛을 본 일부 족장들은, 중독되는 강도만큼이나 더 많은 수의 노예들을 사냥해갔다. 그들에게 총이 생기면서, 무기라고는 창과 칼밖에 차지 않은 다른 부족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백인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으면서 수백만 명이 넘는 노예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식민 지배자들과 야합해 이웃 부족을 노획하고 백인에게 팔아 넘긴 부족이 어딘지,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사람마다 이야기가 달라 확실치 않다. 특히나 정확한 기록자료가 많지 않아 그 진위 여부를 알기가 어렵다. 한 안내 서적에는 아샨티 부족이라고 나오는데, 아샨티 부족은 현재 가나 내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여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이 있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단지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가나의 친구들에게 식민지 지배, 노예 무역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면 놀랍게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가 아주 많다. 3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식민지배를 하며 자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도 수탈해간 서유럽, 특히 영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간혹 묻곤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매우 놀라웠다.
"글쎄... 뭐, 별로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음, 식민지 지배는 분명 나쁜 거지. 그렇지만 영국이 우리에게 서구 문물도 전파해줬고, 바깥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준 것도 사실이니까. 철도 같은 것도 그 때 생긴 거고."
식민지배를 겪어본 어느 민족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그나마 지식층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렇다면?
처음이 가나 친구들의 이런 반응이 혼란스러워, '분노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하기도 했다.
"분노도 어느 정도 대항해볼 힘이 있을 때 하는 거야. 이들은 유럽에 대해 대항하기에는 너무 격차가 벌어져 있어서, 아예 체념하는 것일지도 몰라. 왜냐? 그러는 게 훨씬 건강에 이롭거든."
가나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한국 친구의 이야기다. 역사를 잃지 않는 것은 한편으로는 '분노한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왜일까? 케이프코스트 성 관광 가이드의 '분노 섞인 안내'는 가나 입국 후에 처음 보는 것이라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 '어색한 분노'가 가이드로서의 연출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를 향한 지나친 모독일까?
누군가는 또 "16세기부터 있었던 과거 역사에 대해 지금 분노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테러리스트라도 조직해야 하는 겁니까?"라며 반문할지 모른다. 글쎄, 꼭 테러리스트를 조직하거나 아니면 짐바브웨처럼 백인들을 모두 몰아내야만 하는 것만이 분노의 표현일까? 얼마든지 '건강한 분노의 표출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가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의 어려움을 박차고 넘어갈 의지, 그것은 이런 분노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도 이 분노를 달래기 위해 영국은 더 많은 금광을 캐가는 대신, 가나에 가장 많은 원조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나라 중 하나로 자국민의 양심을 달래고 있고, 가나국민들에겐 '고마운'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아무리 역사와 정치, 그리고 현실이 서로 다른 영역이라 해도 이건 참 아무리 봐도 쉽게 납득이 되지가 않는다.
▲ 돌아오지 않는 문노예들은 이 '돌아오지 않는 문'을 마지막으로 지나 작은 쪽배를 타고 노예선까지 갑니다. ⓒ 차승만
▲ 돌아오지 않는 문이 문을 오바마 대통령은 '전 세계에 흩어진 흑인 동포들의 관문'이라 했습니다. ⓒ 차승만
지하감옥에서 바다로 가는 길은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케이프코스트 성 출구까지 지하통로로 이동한 다음 바다로 향하는 문을 통과한 후, 쪽배를 타고 노예선까지 이동한다. 주민들은 이 쪽배를 카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지하 감옥에서 이 쪽배까지 가는 길마저 햇볕을 볼 수 없는 어두운 지하 통로를 통해서 가야 한다.
쪽배를 타기 위해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해서 '돌아오지 않는 문'이라고 부른다. 쾌쾌하고 메스꺼운 이 노예의 성을, '돌아오지 않는 문'을 따라 밖으로 나서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 성 밖의 풍경'돌아오지 않는 문'을 나서면, 지금은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평화로운 케이프코스트 어촌 모습입니다. ⓒ 차승만
▲ 성곽의 청년들성 외곽을 따라 청년들이 한낮 무료함을 이렇게 달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갔고, 이 '밑도 끝도 없는 낙천주의'만 남아있습니다. ⓒ 차승만
하얀 백사장을 따라 해안가 마을이 언덕까지 계속 이어져있다. 이제는 낡아 빛이 바랬지만, 한때 권세를 좀 누렸을 법한 집들이 언덕 뒤를 따라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이 식민지 시대, 노예든 광물이든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바닷가를 따라 사람들이 헝겊으로 만든 돛을 단 고기잡이 배들이 마치 요트 경기를 하듯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동네 청년들 몇이 성벽 끝자락에 걸터앉아 한낮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바로 뒤 지하 감옥, 몇 세기 동안 울부짖었던 조상들의 절규와 아픔을 느끼기엔 참 힘든 풍광이다.
방금 전까지 역사의식을 떠올렸던 게, 내가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밑도 끝도 없는 무한한 낙천주의, 그게 이들을 분노하지 않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뭔가? 이들은 '인생은 결국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을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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