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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수 교육부장관님, 대체 뭐 하고 계시나요?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를 지켜보면서

등록|2014.01.04 15:57 수정|2014.01.06 08:38
서남수 교육부장관에게

새해 새 날이 밝았습니다.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안녕치 못해 새해 벽두에 이 글을 씁니다. 사실 나는 1971년 7월 10일부터 2004년 2월 29일까지 일선 교단에 선 사람으로, 교육 현장을 잘 알면서도 가능한 교육 현안문제는 관여치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긴 바, 교육문제를 여러 사람이 흔들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어리석음도 저지를 수도 있고, 또한 교육계의 모순과 비리를 말하면 30여 년 몸 담은 나 또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새는 깃털을 남기지 않고, 아름다운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처럼 한두 발 떨어져서 우리 교육계가 날로 발전하길 기원해온 사람입니다. 그런 가운데 2013년 9월 13일 아침, 같은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평소 친분이 있는 도종환 의원한테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요지는 당시 교학사 313쪽에 수록된 '학도병 이우근'의 사진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교과서를 보지 못한 상태이기에 답변하기가 조심스럽다고 말하면서 그 부분만이라도 스캔하여 보내주면, 이를 확인한 다음 그에 대해 적확한 답변을 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시간 뒤쯤 도종환 의원은 문제의 교과서를 스캔하여 제 메일로 보냈습니다. 나는 교학사 교과서에 수록된 '학도병 이우근'의 사진을 보는 순간, 무척 낯익은 사진임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그 사진은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애써 찾은 사진 가운데 한 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정확한 출처를 알고자 책장 깊이 갈무리해 둔 그때의 자료를 모두 꺼내 살펴보았습니다.

▲ 이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313쪽에 실린 학도병 이우근 관련 사실과 사진 ⓒ 교학사


전사 5개월 후에 사진을 찍다(?)

나는 2004, 2005, 2007년 세 차례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가서 70여 일간 한국전쟁 사진을 검색한 바 있습니다. 그때 1차 578컷, 2차 794컷, 3차 584컷 등 모두 1956컷을 수집 스캔해 왔는데, 이 가운데는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서 검색 입수한 100컷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사진 가운데 일부는 <사진으로 본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30회 연재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사진을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시리즈로 세 권을 엮은 바 있고, 최근에는 <한국전쟁·Ⅱ>라는 제목으로 이들 사진을 집대성해 펴냈습니다(최근에는 그때 이야기를 '어떤 약속'이라는 장편소설로 <오마이뉴스>에 연재하였습니다).

나는 영어도 잘 모른 채 백범 암살 진상규명 차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맥아더기념관에는 갔을 때 한국전쟁 사진이 엄청 많은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나는 그 가운데 역사적 자료가 될 만한 사진을 고른 뒤, 동행한 박유종(박은식 대통령 손자) 선생이 일일이 영문 캡션을 번역해 주면 다시 사진을 보면서 수집 여부를 확정한 다음, 스캔하여 내 노트북에 저장해 왔습니다. 마치 고려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온 것처럼, 이 사진들을 가져다가 한국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된 이 사진은 내가 2004년 2월 12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진 자료실에서 찾았습니다. 그날 우리가 검색한 사진은 한국전쟁 관련 문서상자 186, 192, 195, 201 네 상자를 열어봤기에 이 사진은 그 가운데 담겨 있었습니다. 그날 박유종 선생님이 번역해 준 이 사진 영문 캡션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신발, 겉옷, 모자; 한국제. 코트, 무기(M1소총), 탄알 모두 미제."


▲ 한 국군의 동복 차림으로 신발, 겉옷, 모자는 한국제이고, 코트와 무기(M1소총) 그리고 실탄은 미제다(1951. 1. 5.). ⓒ NARA, 눈빛출판사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이 사진을 다시 유심히 살폈습니다. 당시 우리 국군은 총도, 옷도 우리 몸에 맞지 않을 뿐더러, 이것이 바로 그 무렵 우리 국군의 처지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내가 이 사진을 수집하게 된 동기는 당시 우리 국군은 유엔군 소속으로 미군들이 제공한 무기로 싸웠기에 그 모습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북한 인민군 역시 소련제 탱크나 소총으로 무장하여, 같은 겨레끼리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미제 소련제 무기를 끌어다 대판 싸웠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 있는 나는 한 작가의 양심으로, 한 핏줄인 남북한 병사가 남의 나라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운다는 것을 역사에 실증으로 남기고자 이 사진을 수집해 왔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학훈단(102 ROTC) 후보생시절, 광주보병학교 시절, 그리고 전방 소총소대장시절, 이 M1 소총을 아주 지겹게도 매만지고 들고 다니며 사격하고 총검술을 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 M1 소총은 한국인 체격에는 무리가 가는 소총으로 우리 선배 국군용사들은 총무게가 버거워 엄청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저런 추억으로 이 사진을 스캔하여 저장해 왔던 것입니다.

▲ 미국 국립기록문서관리청 5층 사진자료실에서 박유종 선생(좌)과 기자(2004. 2.) ⓒ 박도


귀신 곡할 노릇

이 사진의 영문 캡션에는 분명히 사진 촬영일자가 1951년 1월 5일로 돼 있습니다. 나는 영어가 서툰지라 영문 캡션은 오역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사진 촬영 날짜 아라비아 숫자만은 오역할 수 없습니다. 그 무렵(2013. 9.) 검인증을 통과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기록에 따르면 이우근을 비롯한 학도병 48명은 1950년 8월 10일부터 이튿날 11일까지 모두 전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종군사진작가일지언정 그때 돌아가신 분을 그 이듬해 1월 5일 추운 겨울날 동복을 입혀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사진이 이미 고인이 되신 이우근 학도병 사진으로 교과서에 버젓이 실었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정녕 대한민국의 교육부 수준이 이 정도입니까?

그래서 나는 이 사진을 실은 교학사출판사와 편집자 그리고 이를 감수한 교육부 관계자 등이 사진을 입수한 경위와 이를 '학도병 이우근'으로 단정한 까닭과 이를 교과서에 게재한 경위에 대한 솔직한 해명을 해주기 바란다는 기사 '5개월 전 죽은 학도병, 누가 그를 환생시켰나(13.09.12.)'를 써서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학도병 이우근'님의 거룩한 희생에 대한 심대한 모독이요, 한 지성인으로서 양심을 의심치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보도가 나가자 곧 학도병 이우근의 조카 되시는 분이 분개하여 저에게 메일을 보내온 기사 '학도병 이우근 조카의 메일을 받았습니다(13.09.14)'를 써서 보도했습니다. 그 기사에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있을 수 없고, 현재 없는 미래 또한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역사교과서는 진실하고 정확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현실을 바로 본 뒤 나라와 겨레의 불행을 단절시키거나 미리 예방할 것이다.…

관계 당국은 들불 같은 민심의 분노가 일어나기 전에 불씨를 꺼라. 사후 약방문이 되지 않게 관계자의 맹성과 민심을 존중하는 결단을 보여라.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면….

그 기사 이후에도 아무런 해명이나 사과의 말도 없기에 정식 공문으로 '교육부장관과 교학사 대표에게 드리는 공개 질의서(13.09.17)'를 만들어 원주중앙우체국에서 익일특급우편물로 발송하였습니다.

▲ 교학사가 보낸 답변서 ⓒ 교학사


그러자 2013년 9월 30일 교학사로부터 그에 대한 답변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에서는 여전히 '꿩 구워 먹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가 발생한지 1달 후 '학도병 사진 문제 한 달 ... 교육부는 묵묵부답(13. 10. 10.)'이라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백성을 위한 진정한 정부입니까?

그 이후 오늘까지 80여 일이 지나고 해도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분노합니다. 교육부장관은 대한제국시절 학부대신입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백성은 관에다가 진정도 하고, 질의도 할 수 있습니다. 관에서는 그에 대한 답을 하는 게 당연한 의무가 아닙니까? 설사 백성이 무식하여 얼토당토하지 않는 진정이나 질문을 할 수도 있을 테지요. 그래도 거기에 따르는 답을 하는 게 백성을 위한 진정한 정부가 아닙니까?

한 걸음 물러서 교육부장관은 바빠서 그런 질의서를 보지도 못할 수가 있을 테지요. 그렇다면 장관실 비서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교육부 민원실은 낮잠이나 자며 국민의 혈세로 거둔 세금을 축내는 무위도식꾼들입니까?

사실은 교학사보다 더 나쁘고 근무태만 곳이 교육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뜻있는 백성들은 그동안 지켜본 결과 오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 1%미만의 사태에 이른 것입니다. 요즘은 고교생들도 모두 인터넷을 볼 줄 알기에 이를 다 알고 계속 지켜볼 것입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경천애민(敬天愛民)'의 말을 당신에게 하기는 이미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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