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12·12 쿠데타 맞선 김오랑 중령에 훈장?
[단독] 오늘 국무회의에서 보국훈장 추서 건 심의
▲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12.12쿠데타 과정에서 희생된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 박윤관 상병에 대한 33기 추도식이 지난 2012년 12월12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29번 묘역 깅오랑 중령 묘소에서 열리고 있다. ⓒ 권우성
12·12 군사 쿠데타 당시 반란군으로부터 상관을 보호하려다 순직한 군인의 명예는 회복될 수 있을까?
정부는 14일 국무회의를 열어 고 김오랑 육군 중령에 대한 훈장 추서 건을 심의한다. '참 군인 김오랑 기념사업회' 김준철 사무처장은 1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김 중령에 대한 훈장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던 민홍철 민주당 의원실로부터 훈장 추서 건이 14일 국무회의에 정식안건으로 상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김 중령이 순직한 지 35년만의 일이다.
앞서 지난해 4월 국회는 민홍철 의원이 대표 발의한 '고 김오랑 중령 훈장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을 재석 227명에 기권 6명, 찬성 221명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시킨 바 있다.
김 중령에 대한 추서안이 국무회의에 올라오기까지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
무공훈장 아닌 '보국훈장' 추서 검토
김 중령에 대한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결의안은 지난 17대 국회와 18대 국회에서도 각각 발의된 바 있지만 국방부와 안전행정부의 비협조로 빛을 보지 못했다. 김 중령이 '전투 참가' 등 상훈법의 규정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국회 국방위원회는 심사보고를 통해 상훈법에 따르더라도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으로 무공을 세운 사람'에 무공훈장을 수여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김 중령의 서훈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당초 결의안에 '무공훈장'으로 적시했던 추서 건은 '훈장'으로 완화시켰다. 일부 군 출신 의원들과 국방부의 반발을 고려한 일종의 절충안이다.
실제 정부는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무공훈장'이 아니라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보국훈장'을 고 김 중령에게 추서하는 안을 심의할 예정이다.
국방부, 추모비 건립에는 여전히 부정적
하지만 김 중령이 온전하게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방부가 추모비 건립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
추모비를 김 중령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아래 육사) 안에 건립하는 방안에 대해 육사 측은 "현재 육사에는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 강재구 소령, 심일 소령 3명만 동상이 건립되어 있는 바, 그 대상은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부정적 의견을 냈다.
김 중령이 순직당시 근무했던 육군 특수전사령부 측도 "순직한 모든 장병의 이름을 새겨두고 있는 부대 내 충혼탑에 김오랑 중령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추모비는 의미가 없으며, 부대 내에 특정인의 추모비는 세워져 있지 않기에 (건립이) 어렵다"는 답변을 했다.
사실 국방부는 국회에서 통과된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안에 대해 그동안 여러 차례 난색을 표명해왔다. 지난해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상훈법상 무공훈장 추서는 전투 또는 전투에 준하는 직무 수행으로 무공을 세운 자에 해당된다"면서 국회 국방위가 여야 합의로 권고한 김 중령에 대한 무공훈장 추서 결의를 거부했다.
반란군에게 수여됐던 무공훈장 회수에는 소극적인 정부
하지만 국방부의 이같은 논리는 전형적인 이중잣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2·12군사반란과 5·18광주민주화 운동 무력진압의 공로로 수 십명의 장교들이 무공훈장을 받았다. 법원이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한 이후 정부가 서훈을 박탈한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씨를 비롯한 반란수뇌부 16명뿐이다. 그마저도 무공훈장을 반납한 사람은 고작 전두환, 장세동씨 2명뿐이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해 10월 국회 안전행전위원회 소속 김현 민주당의원이 안전행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드러났으며 대상자들은 분실 등을 이유로 무공훈장 반납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상훈법에 따라 2006년 두 전직 대통령과 관련자 14명의 서훈을 모두 취소하고 반환요구 발송 2차례, 자택방문 4차례 등 반납절차에 들어갔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합법적 지휘계통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반란군에게 수여되었던 무공훈장은 적극적으로 회수하지 않으면서,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산화한 김오랑 중령에 대한 무공훈장 수여에는 인색했던 것이다.
기념사업회 "육사발전기금 전·현직 이사장 모두 군사반란 주역들"
김준철 사무처장은 "육사의 추모비 검토과정에서 육사의 발전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설립한 육사발전기금에 의견을 묻는 과정을 거쳤을 것인데, 정호용 전 이사장과 김진영 현 이사장은 모두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이라며 "육사발전기금의 의사결정구조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오랑 중령은 동문이고 전우라기보다는 잊혀지고 외면해야하는 인물로 낙인찍힌 상황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김 사무국장은 또 "부대의 모든 간부들이 반란세력화 되었을 때 김오랑 중령이 상급자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위해 반란세력에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행위는 단순히 상관을 엄호한 것을 뛰어넘어 국가체제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군인정신의 발로였다"며 "생도 교육 차원에서 고인의 모교인 육사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맞서다 순직한 고 김오랑(당시 소령, 35세)중령은 '참 군인'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79년 12월 13일 오전 0시 20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끈 신군부는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를 급습, 군사 반란을 진압하려는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를 시도했다.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던 김오랑 소령은 권총을 들고 쿠데타군과 총격전을 벌였고, 여섯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김 소령은 지난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다. 배우자인 백영옥씨가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기 1년 전, 국방부를 상대로 제기했던 수차례 민원에 대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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