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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하던 50대 가장의 선택, 안타깝네

['빚'나는 인생-50대] 빚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질서도 위협한다

등록|2014.01.31 11:52 수정|2014.01.31 11:52
'가계부채 1000조 원' 시대입니다. 등록금 때문에, 결혼자금 때문에, 내 집 마련 때문에, 사업자금 때문에…. 빚을 지게 되는 까닭도 각양각색이겠죠. 빚이 많은 사람만 힘든 건 아닙니다. '빚 권하는 사회'에서 빚 없이 살려는 사람도 참 힘듭니다. 이래저래 빚 때문에 달라지는 우리 삶의 모습, 20대·30대·40대·50대 시민기자의 이야기로 직접 한번 들여다봅니다. [편집자말]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빚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그중에서도 오십대에게 가장 치명적이다. 자녀들이 대학에 다닐 나이고, 머잖아 혼사까지 떠안아야 할 연령대로 목돈 지출이 가장 큰 세대이다.

그렇기에 목돈은커녕 빚까지 진 오십대 가장의 정신적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된 진술이다. 빚과 관련된, 내 주변 오십대 지인들의 이야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구성해 보았다.

▲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전화다.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내 가슴은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 sxc


[사례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전화다.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내 가슴은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내가 명대로 못 산다면 그건 틀림없이 가슴에 맺힌 멍 때문일 것이다. 전화를 없애면 되겠지만 그런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내가 놀라는 이유가 전화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화하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지만 진짜로 전화를 없애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전화를 안 받을 수 없다. 그랬다가는 더 큰 화를 자초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 전 전화기를 꺼놓았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 왜 전화를 안 받느냐고 다그치기에 전화기를 놓고 나왔다니까 다음번부터는 연락이 안 되면 집으로 전화하고 그래도 안 되면 찾아가겠다고 한다. 그들은 집요하다.

오늘도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디서 돈을 빌리지'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나의 신용은 바닥이다 못해 지하까지 내려간 지 오래다. 주위에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내 말은 믿지 않는다. 나란 인간이 애초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나도 한때는 그럴 듯한 직장에 다니면서 통장에 월급이 매달 꽂힐 때마다 아내 앞에서 어깨를 피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사십대 중반 직장에서 나왔다. 구조조정 당하며 불명예 퇴직하느니 명퇴금이라도 챙기자는 심산에서 옷을 벗었다. 속내에는 지방대 출신인 내가 진급에 한계가 있고 자리에 앉아 버틴들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계산이 있었다.

알량한 명퇴금을 가지고 자영업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내 인생에서 떠나가진 않았다. 요지의 지하상가에 그럴듯한 자동차 액세서리 용품점을 차릴 때만 하더라도 재벌까지는 안 되더라도 먹고사는 덴 지장 없을 줄 알았다. 상관의 눈치나 살피던 쫀쫀한 직장생활을 벗어나 내 뜻대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좀 더 일찍 시작할 걸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자동차 액세서리 가게-곰탕집... 자영업 순례 시작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요 액세서리가 자동차에 기본 옵션으로 장착돼 출고되기 시작하면서 사업은 기울기 시작했다. 명퇴금이 고스란히 들어간 본전은커녕 약간의 빚까지 진 채 문 닫았다. 뭐니 뭐니 해도 장사는 음식장사다.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하여 곰탕집을 시작했다. 나름 유명세를 타는 원조집에서 수업료까지 지불하며 배웠건만 가게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곰탕집을 접고 다른 장사를 시작했다. 자영업 순례의 시작이었다. 인테리어 비용이 억 단위에서 천 단위로 내려가는 만큼 가게의 규모도 작아지고 초라해져 갔다. 반면에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집은 은행에 넘어가고 전세에서 월세로 옮겼다. 애들은 대학생이 되었건만 학비를 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큰놈은 대학합격증을 받자마자 알바를 시작하여 한 학기 등록금만 겨우 내고는 입대해버렸다. 작은 녀석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 내심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업자금 명목으로 빌리다가 나중에는 생활비 명목이 되었다. 규모도 몇 천만 원에서 몇 십만 원으로 내려갔다. 빌리는 사람도 형제에서 가까운 친척, 친구, 옛 동료, 친밀도의 동심원은 점점 커져 갔지만 돈을 빌리는 확률은 반비례로 떨어졌다. 마침내 누구하나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말이 들려왔다. 아니 실제로 내 귀에 닿기보다는 그런 말들을 했음에 틀림없다. 왜냐면 나 역시도 왕년에 지금의 내 처지와 비슷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연락해선 안 될 곳까지 연락하고 말았다. 나도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내일의 위험보다는 오늘의 호구가 더 급했다. 내일은 생각하기 싫었다. 나에게 내일이 있을까.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떨리는 손가락을 남의 손인 듯 바라보며 전화번호를 눌렀다. 사채의 지뢰밭에 나는 내발로 들어갔다. 끝까지 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조금 더 있다가 터질 줄 알았다. 하지만 지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터졌다.

원금 날린 고객들에게 멱살 잡히고 월급은 차압

[사례②] 나는 펀드매니저다.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알고 보면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노름꾼에 불과하다. 아니 노름꾼이라면 자기 돈만 탕진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돈까지 베팅한다. 경제 현황, 시장 분석, 경기 흐름, 기업진단, 기술적 분석,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단히 전문적이고 뛰어난 지력의 소유자라고 보기 쉽다. 모두 개나 줘버려라. 이들의 본질은 노름이다. 주식시장이란 노름판에 기관과 사람이 각자가 판돈을 걸고 하는 게임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기관에 소속된 노름꾼이다.

나도 한때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좋을 때는 대학을 막 졸업할 때였다. 흔히 말하는 스카이 대학 법학과 출신인 나는 몇 장의 입사 합격증을 놓고 즐거운 고민을 했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최고의 보수를 자랑하고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던 증권회사로 진로를 정하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내가 입사할 80년대 말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자본시장은 팽창단계에 있었다. 말 그대로 눈 감고 신문 주식시세란의 아무 회사나 찍어 그 회사의 주식만 사도 오를 때였다.

나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강남의 고급술집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 동력이 90년대 중반부터 주춤하더니 IMF 때 직격탄을 맞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약간의 빚을 졌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고객 예탁금에 손을 댄 것이다. 바닥인 줄 알고 투자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바닥마저 한없이 높은 천장이었다. 원금을 날린 고객들한테 멱살까지 잡히고 월급은 차압당했다.

다시 만회할 기회를 노리며 메이저 증권사에서 중견 증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시장은 늘 나의 인식 범위 바깥에 있었다. 일시적인 성과는 있었지만 그 성과를 상회하는 손실이 늘 뒤따랐다. 시스템에 의한 통제가 심한 중대형 증권사보다 재량이 좀 더 보장되는 소형증권사로 자리를 옮겼다. 리스크가 크지만 수익 역시 큰 옵션과 외환거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들 거래는 지렛대 효과가 커서 널뛰기가 아주 심했다. 천당과 지옥을 운행하는 롤러코스트를 타고 거래를 했다. 여기서도 성과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단기적인 성과 뒤엔 장기적이고 고질적인 실적 악화가 뒤따랐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결정타를 맞았다. 고객 예탁금은 물론이고 나의 재산까지 다 날렸다.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개인펀드매니저로 활동했다. 지인들의 자금을 모아 투자활동을 한 다음 일정기간이 지나면 수익을 챙겨주었다. 물론 실제수익이 난 건 아니다. 고객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원금 손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짜로라도 수익을 만들어 줄 수밖에.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자금을 회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그야말로 깡통을 차게 된다.

이익이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수익금을 챙겨준단 말인가. 그러나 알고 보면 간단하다. 고객들은 수익률만 챙겨주면 굳이 원금을 회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원금은 그대로 두고 계속 수익만 뽑아먹으려 한다. 손 안대고 코를 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수익이 난다는 소문이 나면 다른 투자자까지 소개시켜 준다.

내 개인펀드의 전체 수익률은 마이너스이지만 새로운 투자자금이 들어오는 한 자금을 운용하는 데 문제는 없다. 모두가 한꺼번에 원금을 회수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의 펀드는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아야 하는 자전거처럼 외부에서 끊임없이 자금이 들어와 줘야 유지된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자전거가 언젠가는 벼랑 끝에 닿게 되리라는 것을. 그 언젠가가 당장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벼랑이 훨씬 빨리 나타날 줄이야.

내 나이에 억 단위 빚을 진다는 게 부담스럽다

▲ 인천 소재 한 아파트 전경 ⓒ 선대식


[사례③]
나는 평범한 오십대 가장이다. 아니 평범하지 않고 못난 가장이다. 아직 내 집도 한 칸 마련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 나이에 자기 집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집 이야기가 나오면 부끄러워 숨고만 싶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전체 세대의 40퍼센트 가까이, 서울에선 49퍼센트(주)가 자기소유의 집이 없다던데 내 주위엔 모두가 집이 있다. 아내는 집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붉어진다.

살고 있는 집의 전세 만기가 다 됐다. 전셋값이 가파르게 올랐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아는 사실. 지난 이십년 동안 전세계약을 갱신할 적마다 집주인에게 적게는 천만 원에서 많게는 삼천만 원까지 올려주었다. 사실 뼈골이 쑤시게 아까웠다. 열심히 일해서 집주인에게 바치는 격 아닌가. 그러나 세상이 그런 걸 어찌하랴, 하고 자조하면서 견뎌왔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그동안 오른 금액과는 상대가 안 되게 전셋값이 치솟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다. 이참에 집을 사버려! 하고 생각을 해보았으나 이 역시 가파르게 상승한 전세금 이상의 돈을 마련해야 한다. 그동안 찔끔찔끔 오른 전셋값은 나의 노동으로나마 충당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빚을 져야 한다. 전세금에 맞춰 이사하기도 쉽지 않다. 내 벌이의 터전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내놓은 대책이라는 게 결국 빚내서 집사란 얘기 밖에 안 된다. 집 가진 사람들의 집값이 떨어질까봐 집 없는 사람들이 대출을 해서 떠받쳐 주란 말처럼 들린다. 그래도 어차피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빚을 져야 하는데 차라리 대출을 해서 집을 살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대출까지 해서 집을 샀는데 떨어지면 어떡하지.

며칠 전 은행에 들르니 대출이자가 연 3~4% 사이다. 그다지 높진 않지만 빚을 진다는 게 꺼림칙하다. 내 나이에 억 단위 빚을 진다는 게 부담스럽다. 집값이 떨어지면 원금은 원금대로 날리고 이자까지 부담해야 한다. 내 노동력의 질은 떨어지고 미래의 소득도 줄 텐데 빚은 이자까지 불어 덩치를 키워갈 것이다. 자꾸 망설여진다. 빚을 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빚은 정신을 구속한다. 빚진 자의 모든 사고는 빚으로 수렴된다. 자면서도 빚에 쫓기는 꿈을 꾼다. 그렇기 때문에 빚을 벗어나기 위해선 어떠한 행동이나 거래에도 쉽게 응한다. 나는 "빚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는 고백도 들었다. 이렇듯 빚은 개인의 정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공동체의 질서까지 위협할 수도 있다. 특히 희망이 부재한 오십대의 빚은 종종 절망 속에서 자신을 내던지고 만다. 다시 입에 올리는 것만 해도 가슴 아픈 소식이지만, 이들 중 둘은 자살로 자신의 부채를 청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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