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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준 3천만 원, 아무 조건 없는 '선물'이었던 이유

[서평] 산타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산타와 그 적들>

등록|2014.01.18 21:03 수정|2014.01.18 21:03
2010년 어느 날이었다. 한 60대 노인 관객이 그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졸랐다. 그가 실버 전용 극장 사업을 '미션'으로 여기며 뜨겁게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일은 뜨거웠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에게는 극장 임대료 3개월 치가 밀려 있었다. 그달치 직원 급여도 미지급 상태였다.

"바빠서 안 되겠어요. 나중에 하시죠."

그는 막 친구에게 돈을 꾸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머릿속에는 밀린 임대료와 급여 생각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그리 바빠요. 이야기 좀 해 봐요.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노인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근처 식당으로 끌다시피했다. 그는 포기했다. 여차저차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힘드네요. 그래도 어르신 말씀대로 밥은 먹어야겠네요. 돈을 꾸든지 말든지 일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래. 잘 생각했어요. 자, 뭐 좀 시키고 있어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는 주문을 하고 기다렸다. 한참 후에 돌아온 노인은 다짜고짜 테이블 위에 봉투 하나를 올려놓았다. 돈 3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액수였다. 노인은 지그시 미소만 짓기만 했다.

(주)허리우드극장 대표 김은주씨를 소개하는 대목의 일화를 재구성해 본 것이다. 김은주 씨가 현대판 '허생'이라도 된 걸까. <허생전>의 한양 갑부 '변 부자' 같은 그 노인은 일개 극장 대표일뿐인 김은주 씨의 무엇을 보고 3천만 원의 거액을 선뜻 내놓았을까.

<산타와 그 적들>은 '산타클로스' 같은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 이들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일한다. '나'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돈을 번다. 그렇게 번 돈은 다시 세상에 돌려준다.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이른바 '착한 기업' 이야기다.

어찌 보면 식상하다. '착한 기업'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 봤다. 심드렁하게 들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좋은 얘기들뿐이니 말이다. 이 책에는 좋은 얘기만 있지 않다. '착한 기업'이 겪어내야 하는 세상의 독한 현실이 그려져 있다. 그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서 '착한 기업'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꼼꼼하게 짚어 주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이 여느 '착한 기업'에 관한 책들과 다른 이유다.

이 책 머리말에 실린 흥미로운 내용 몇 가지를 보자. 알래스카 해안의 하이다족 사이에서는 많이 베푼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힘 있는 추장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동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제도에도 비슷한 관습이 있었다. 특정 시기나 축하연에서 선물을 주고받고 답례하는 풍속이었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가 '포틀래치(pltlach)'라고 부른 호혜적인 경제 체제였다. 특이하게도(?), 이 체제의 사람들은 누구나 더 주려고 안달했다.

서로가 서로의 산타가 되어주는 체제 속에서 사람들은 사는 데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 또는 화폐를 선물처럼 줬고, 대가를 답례 받듯 받았다. 우리 사회의 채권자나 금융회사들처럼 빚을 갚을 때까지 독촉하거나 부도냈다고 감옥에 넣지 않았다. 줄 수 있을 때 줄 수 있는 만큼 주고, 받을 수 있을 때 받을 만큼 받았다. 잉여가 있는 자가 다른 이들에게 가진 것을 선물했고, 더 큰 선물과 답례를 하는 자가 더 큰 명예와 더 높은 지위를 얻었다. (8쪽)

저자는 현대판 산타인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이 가장 이해타산적인 인류 발명품인 회사에, 포틀래치에 담긴 호혜와 협력의 의무를 부여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면서 산타 경제 체제를 만들어 간다. 선물 경제(Gift Economy)로도 불리는 이 체제는 등가 교환과 화폐경제가 지배하는 시장경제와 달리, 선물이나 증여 등 부등가 교환과 비화폐경제가 중심이 되어 운영된다.

저자는 사회적기업이나 사회책임기법, 협동조합 등 사회적 목적을 가진 사업체를 통칭해서 '소셜 비즈니스'로 부른다. 그에 따르면 소셜 비즈니스는 세 가지 원칙을 갖는다. 먼저 영업행위의 목적 자체가 사회적인 미션 달성에 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회구성원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사업을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익을 미션 사업 혹은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재투자하거나 분배한다. 끝으로 사업체가 속한 공동체나 사회의 이해관계자들이 사업을 위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한다.

저자가 소셜 비즈니스로 칭한 산타 산업의 원칙을 보니 고풍스러운 단어인 '주인의식'이 떠오른다. 교과서와 법전 속에나 있는 말인 '민주주의'가 살며시 다가온다. 그렇게 내용을 따라가다 보니, 저자가 오래 된 이야기라며 들려주는 천국과 지옥의 식사법이 나온다. 지옥에 간 사람들은 긴 젓가락으로 자기 입에 음식을 넣으려 아귀다툼을 한다. 천국 사람들은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이타를 통해 채워지는 이기다. 저자는 소셜 비즈니스의 룰이 바로 그런 천국의 식사법을 닮았다고 말한다.

예를 보자. 산타 기업의 세계적인 모델인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은 '천국의 식사'를 어떻게 했을까.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은 2011년 말 835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한테 무담보 소액 대출(Microcredit)을 제공했다. 이중 거의 '거지'에 가까운 극빈층 11만 1,300여 명한테는 무이자, 즉 0%의 이자로 돈을 꿔줬다. 은행이 조사해보니 대출 고객의 64%가 빈곤선을 벗어났다.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났다. 그라민의 무담보대출은 방글라데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선물이 되었다. (72쪽)

저자가 정리해 준 그라민은행 시스템은 간단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예금을 모은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대출해서 수익을 낸다. 그 수익을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대출금으로 쓰거나 배당금으로 나눠 준다. 한 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이 주요 고객이자 최대 자금줄이다. 그런데도 수익을 낸다. 책에 따르면, 그라민은행은 창립 첫 해였던 1983년과 1991년, 1992년 등 딱 세 해만 제외하고 계속 흑자 수익을 냈다.

소셜 비즈니스는 착한 기업들이 만들어 간다. 착한 사람들에게는 나쁜 사람들이 훼방꾼이 된다. 착한 기업들 앞에는 저자가 산타의 적으로 부른 가짜 산타와 우호적이지 않은 주변 환경이 있다. 저자는 기부금은 내면서 세금은 안 내는 업체, 불우이웃은 도우면서 직원 인권을 침해하는 업체들, 친화경 마케팅을 하면서 생산과정에서는 유해물질을 쓰는 회사들을 모두 가짜 산타로 부른다.

하지만 저자는 진짜 산타의 진짜 적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비사회적인(민주적이지 않은-기자) 정치권력과 비사회화된 대중이 그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비사회적 경제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결탁이나 방관을 통해 비사회적 기업들이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

현대판 <허생전>의 분위기를 연출한 김은주 씨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사업성이 막막해 보이던 실버 극장 사업에서 자신의 미션을 얻었다. 그는 단순한 일반 사업가가 아니라 '삭발까지 하는 운동가'로서의 사회적 사업가였다. '변씨' 같은 노인이 아무 조건도 없이 내민 3,000만 원이 큰 계기가 되었다.

김은주 씨나 노인은 '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30대의 김은주 씨는 쇠락해 가는 도심의 황량한 극장을 인수해 억대의 돈을 투자하였다. 자신이 가장 사랑한 영화 <더티댄싱>을 위해 직접 그린 영화 간판을 내걸고, 관람료도 개봉 당시 가격 3,500원을 받았다. '이성적'인 사업가들 입에서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지 않는가.

노인은, 자신과 같은 노년 세대를 위하는 일을 하던 김은주 씨가 단순한 사업가로 보이지 않았다. 3천 5백만 원은 그렇게 해서 나온 돈이었다. 그 멀쩡한 돈을 '거저' 내놓은 노인이 '이성적'인 투자자들 눈에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들의 입 안에 '노인네가 노망 났군'과 같은 말이 맴돌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상은 '미치고 노망 난' 그런 사람들 덕분에 바뀌는 것이 아닐까. '빵을 나누는 사회적 경제'(4장 1절)에 제사(題詞)처럼 인용되어 있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들어 보자.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적응시킨다. 하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고집스럽게 세상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 한다. 그래서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211쪽)

2012년 12월 1일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협동조합기본법에 따르면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람 5명만 모이면 누구든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 그후 2013년 9월 말까지 2,724개의 협동조합이 설립 신고를 했다니 그야말로 폭발적인 증가다.

그 모든 협동조합원이 '주인의식'과 '민주주의'로 무장한, '미치고 노망 난' 사람들이 아닐까. 나는 그들을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희망의 대열에 동참하고 싶을 때, 이 책이 조그만 길잡이가 돼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산타와 그 적들> (이경숙 지음 | 굿모닝미디어 | 2013. 12. 29 | 248쪽 | 13,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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