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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똥이 좋다니... 점점 변태가 되어간다

[어느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23]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

등록|2014.01.22 17:55 수정|2014.01.22 17:55
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 자이살메르 요새 안으로 오토바이 하나가 들어가고 있다. 자이살메르 요새에는 아직 사람들이 산다. ⓒ Dustin Burnett


거칠게 불어대는 바람 탓에 잠이 깼다. 새벽 5시에 조드푸르를 떠난 기차는 아침 11시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까짓 6시간. 대충 누워있다 일어날 양으로 침낭도 꺼내지 않았다. 추운 몸을 덥히기 위해 사지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배낭 바닥에서 침낭을 주섬주섬 꺼내 펼쳤다. 자세히 보니, 한 뼘쯤 벌어진 벽 틈 사이로 기차가 바람을 매섭게 집어삼키고 있다.

새벽에 기차간에 불어대던 차가운 바람과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다.

핑크 시티 자이푸르, 블루 시티 조드푸르에 이어 골드 시티라고 불리는 자이살메르는 인도 서북부에서 파키스탄 남부에 걸쳐 있는 광대한 사막인 타르 사막 남부에 위치한 도시다. 더스틴과 내가 조드푸르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고, 여행 동선을 망쳐가며 인도 서북부 끝에 매달려 있는 이 도시로 기어코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막.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상인들처럼, 버터가 담겼다는 혹을 가진 낙타를 타고 타르 사막을 건너는 것. 쏟아지는 별빛 아래 누워 푹신한 모래 언덕 위에서 잠이 드는 것. 그런 사막의 낭만 때문이었다.

▲ 핑크 시티 자이푸르, 블루 시티 조드푸르에 이어 골드 시티라고 불리는 자이살메르는, 인도 서북부에서 파키스탄 남부에 걸쳐 있는 광대한 사막인 타르 사막 남부에 위치한 도시다. ⓒ Dustin Burnett


▲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에 위치한 가디사르 호수. 잔잔한 호수와 그 주변을 지키는 황금색 건물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를 연상시키지만, 가디사르 호수는 오아시스가 아닌 물 저장소이다. 1400년경에 지어진 가디사르 호수는, 그 당시 건조한 자이살메르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 Dustin Burnett


아니. 사실을 고백하자면, 자이살메르에 도착할 무렵에는 그런 낭만은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보통 여행 하면 떠올리는 에메랄드빛 바다라든지 시원한 쿨에이드. 혹은 세계 7대 불가사의와 같은 유명 명소들에 대한 동경 같은 거, 나에게도 있었다. 인도에 대한 환상은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라는 타지마할 가기(했음). 케랄라주에서 더스틴과 나만을 위한 하우스 보트를 빌려 로맨틱한 하루를 보내기(계획에 있었음). 그리고 여기, 자이살메르에서 낙타에 올라 사막을 건너기(지금 왔음).

그러나 지금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이런 거다. 사람 얼굴만한 커다란 소똥이 굴러다니는 골목길을 목적 없이 휘젓고 다니는 것. 한 시간 동안 호객꾼에게 시달리는 것. 기차역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것. 원숭이에게 공격을 당하되 다치지 않는 것. 이런 어처구니없고 예측불가능한 생고생거리들이다. 그렇다. 난 여행 변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 가디사르 호수로 가는 길. 소 네다섯 마리가 여유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이런 거다. 사람 얼굴만한 커다란 소똥이 굴러다니는 골목길을 목적 없이 휘젓고 다니는 것. 한 시간 동안 호객꾼에게 시달리는 것. 기차역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것. 원숭이에게 공격을 당하되 다치지 않는 것. 이런 어처구니없고 예측불가능한 생고생거리들이다. 그렇다. 난 여행 변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 Dustin Burnett


▲ 가디사르 호수의 저녁 무렵 풍경. 호수는 자이살메르 도시 중심부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있다. ⓒ Dustin Burnett


자이살메르 요새, 세월에 묻히지 않고 숨쉬는 이유

그런고로 자이살메르에 온 이유는 굳이 낙타 사파리 때문이라기보다, 좀 싱겁지만, 딱히 별다른 목적지가 없어서였다. 어쨌든, 낙타 사파리를 제외하고서도 자이살메르는 마음에 드는 도시였다. 사막의 흙으로 조물조물 지어 올린 자이살메르의 모래색 집들과 성채.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쓸리는 모습이 잔잔한 평화를 안겨준다.

인도와 중앙아시아 사이에서 많은 부를 얻었던 지난날의 영광 덕인지, 사암으로 깎아 올린 건물들은 모두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다. 아직 관광객의 손이 덜 탔는지, 혹은 흥하는 무역 덕에 먹고 살 만한지, 다른 관광 도시들처럼 돈과 초콜릿을 요구하는 아이들도 없다.

여기에 하나 더. 사막의 신기루처럼 솟아있는 자이살메르 요새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웅장함에 대해서야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요새나 자이푸르의 암베르 요새에 비할 바 안 되지만, 자이살메르 요새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거주지라는 점에서 다르다. 학교에 가는 교복 입은 아이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껏 치장하고 거리를 나서는 여인들. 자이살메르 요새는 역사와 세월에 묻히지 않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 있다.

물론 관광객을 끌기 위한 식당과 상점, 호텔이 대부분이기는 하다. 모래벽에 장식된 현란한 라자스탄 스타일의 양탄자, 천연색의 옷, 야무지게 만든 가죽 신발이 눈길을 끈다. 이보다 매력적인 쇼핑센터가 또 있을까.

▲ 자이살메로 요새 안의 풍경. 사막 색 성벽에 장식된 현란한 라자스탄 스타일의 양탄자, 천연색의 옷, 야무지게 만든 가죽 신발들이 눈길을 끈다. 이보다 매력적인 쇼핑센터가 또 있을까. ⓒ Dustin Burnett


▲ 사막의 신기루처럼 솟아있는 자이살메르 요새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웅장함에 대해서야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요새나 자이푸르의 암베르 요새에 비할 바 안 되지만, 자이살메르 요새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거주지라는 점에서 다르다. ⓒ Dustin Burnett


"난 피곤해."

쇼핑을 하자는 나의 제안을, 더스틴이 단박에 거절했다.

"왜지? 왜 항상 피곤한 거지?"
"왜냐니. 오늘 8km나 걸었지, 어떤 여행사랑 낙타 사파리 계약할지 골 싸고 고민했지. 얼마나 많은 일을 했어. 난 피곤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도 똑같이 걷고 고민하고 사파리 계약했는데?"
"넌 슈퍼우먼이잖아."


그렇게 슈퍼우먼은 또다시, 피곤한 남편을 아늑한 방에 뉘어 놓고 나 홀로 쇼핑에 나섰다. 바라나시에서만 해도 엄청난 모험이었던 나 홀로 나들이였지만 이젠 익숙하다. 역시 쇼핑은 옆에서 잔소리나 늘어놓고 사탕 살 궁리나 하는 더스틴은 방에 두고 가는 게 제맛이다.

▲ 자이살메르 요새 안에 자리한 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 중, 창 멀리 원숭이 한 마리가 보였다. 500m쯤 떨어져 있다 싶었던 원숭이는, 금세 창 바로 아래로 다가왔다. 혹여나 원숭이가 창 안으로 들어와 음식을 낚아채 가지나 않을까, 우리는 창 아래로 얼른 몸을 숨겼다. ⓒ Dustin Burnett


▲ 숙소에서 바라본 자이살메르 요새 ⓒ Dustin Burnett


하나에 120루피(한화 약 2500원)라는 선글라스를, 농익은 협상 실력으로 두 개에 140루피에 구매했다(물론 현지인을 위한 실제 가격은 20루피일 확률이 높다). 자신감에 찬 나는, 성 안에서부터 눈여겨 보던 셔츠를 싼값에 채어 갈 요량으로 재봉 가게로 들어갔다. 실밥이 날리는 허름한 재봉가게이니, 성 안에 멋지게 자리 잡은 상점들보단 싸게 팔겠지. 하지만 웬걸. 재봉사는 성 안 상점보다 비싼 250루피를 불렀다.

"150루피 아니면 안 사요."

몇 주 전 같았으면 상점 주인의 눈치나 힐끔 보다 협상할 타이밍을 놓쳤겠지만, 오늘만큼은 슈퍼 쇼핑우먼이다. 나는 정말 150루피가 아니면 안 살 마음으로, 휙 하니 돌아 당당히 걸어나갔다.

"오케이! 150루피!"

낄낄.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내가 아무리 여행자라지만 티셔츠 한 장 가격쯤은 안다. 물론 관광객용 가격으로. 옷이 좀 큰 것 같아, 거울에 이리저리 대보았다.

"제가 이래 봬도 재봉사예요. 소매 금방 줄여줄게요."

재봉사는 내 팔과 소매 길이를 재더니 실밥이 흩날려 있는 작업 책상에 앉아 능숙하게 재봉질을 시작했다.

"자이살메르는 혼자 왔어요?"

재봉틀과 옷 소매 사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재봉사가 물었다.

"아니 남편이랑 왔는데, 남편은 쇼핑하는 걸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혼자 나왔어요. 결혼하셨어요?"

앳돼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보아 하니 아직인 것 같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왠지 결혼을 일찍 할 것도 같다.

"아뇨, 아직 안 했어요. 근데…. 아마 내년쯤에 하게 될 거 같아요."
"아! 그럼 여자친구 있구나!"
"아니요. 하하. 인도는 문화가 달라요. 큰 도시는 모르겠지만, 자이살메르 같은 작은 마을에서는 부모님이 짝을 정해 줘요. 결혼식 전에는 신부 얼굴도 못 봐요."


▲ 자이살메르 요새 안의 풍경. 학교에 가는 교복 입은 아이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껏 치장하고 거리를 나서는 여인들. 자이살메르 요새는 역사와 세월에 묻히지 않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있다. ⓒ Dustin Burnett


문화적 무식함이 들통 난 나는 잠깐 얼굴이 붉어졌다. 그나저나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우리 할머니가 했을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마치 복권을 긁는 기분일 거야. 나는 무지하게 못생겼는데 상대방은 엄청 예쁘고 멋있을 수도 있고. 내 사상과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 평생을 고생할 수도 있고. 근데 그러는 나는 더스틴을 얼마나 잘 알아서 결혼했나? 알면 알수록 신비한 이 인간….

"어쨌든 내년이면 결혼을 해야 해서 돈을 열심히 모으고 있어요. 다 됐다. 한 번 대봐요."

헛생각에 빠진 사이 소매가 완성되었다. 잘 맞는다. 돈을 열심히 모으고 있다는데 옷값은 괜히 깎았나. 신부 얼굴은 몰라도, 다가올 미래가 기대되는지 재봉 청년은 기뻐 보였다. 소박하고 성실한 미래가 엿보였다. 신의 가호가 있길.

▲ 숙소 옥상에서 본 자이살메르 일몰 풍경. 붉은 해와 황금빛 도시의 조화가 아름답다. ⓒ Dustin Burnett


▲ 자이살메르 요새의 밤. ⓒ Dustin Burnett


피할 수 없는 마살라의 저주

사막 도시답게, 해가 떨어지자 제법 으슬으슬하다. 노란 불빛을 켜 놓은 상점가에는 아직 사람이 제법 있다. 어딘가에서 저녁을 해결해야 할 텐데. 저녁 생각을 하니 왠지 소름이 돋았다. 더스틴과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카레. 그 안에 들어가는 마살라(향신료). 인도를 여행한 지 한 달 정도가 된 지금, 그놈의 마살라는 마치 입안의 저주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마살라는 우리 혀로 느껴지는 그 모든 음식에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맥도날드에서는 마살라 버거를 팔았다. 미국에서 수입된 감자 칩은 마살라 맛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심지어 마시는 짜이에도 무슨 시나몬 가루라도 되는 양, 마살라 가루가 섞여 나왔다. 저녁을 먹으려면 그 마살라의 맛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 마살라! 오늘만큼은 마살라의 저주에서 벗어났으면!

어디에서 마살라 빠진 음식을 찾을까. 더스틴과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던 사이, 내 눈에 번쩍하고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파이다!"

우리는 환호했다. 길가에 들어선 작은 빵집에, 결이 고운 커다란 파이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플레인 밀가루. 마살라고 뭐고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밀가루 그대로의 밀가루. 우리가 찾던 그 보물이다.

▲ 자이살메르 요새의 밤. ⓒ Dustin Burnett


우리는 얼른 커다란 파이를 사서 입에 넣었다. 아! 이 아무 맛도 없는 맛의 맛! 그 향연….

"윽!"

더스틴이 두 번째로 파이를 커다랗게 깨문 그때. 석연치 않은 향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파이 사이로 저주의 오렌지색 마살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이마저 마살라다. 오늘도 저녁은 다 먹었다.

▲ 자이살메르 요새의 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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