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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늘어선 2014m 인간띠, 그들이 나른 건...

[해외통신원] '겹경사' 라트비아... 유로존 가입·유럽문화수도 선정

등록|2014.01.20 20:11 수정|2014.01.20 20:11

▲ 유럽문화수도 개막 다음날인 1월 18일 열린 '책을 사랑하는 인간의 띠'에 참여한 라트비아 사람들의 모습 ⓒ 서진석


기자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럽에서 살고 있지만, 10여년 전 유럽통합화폐가 된 유로가 아직 좀 낯설다. 유럽연합에는 가입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유로존에 가입하지 못한 동유럽권 나라들에서만 주로 거주하다보니 그런 듯하다. 그래서일까. 내게 있어서 유로는 실질적인 통화라기보다는 어음이나 유가증권처럼 화폐로 바꾸어서만 사용할 수 있는 지불수단에 불과했다.

한때 내가 살았던 에스토니아는 이미 2011년에 유로를 도입해 꽤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하지만 난 2008년에 리투아니아로 떠났기 때문에 생활에서 유로화를 경험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에스토니아에 갈 때마다 익숙했던 크론(kroon)이 아닌 유로화로 결제를 하는 것이 어색했고 신기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환전소였다. 이전 환전소는 외국인들이 가져온 유로를 현지 화폐인 크론으로 바꾸는 장소였다. 하지만 유로가 도입된 후 환전소 벽에는 다른 화폐들의 환율표가 걸렸다. 한 번은 탈린 시내 환전소에 대한민국 원화 환율표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적도 있었다. 물론 환율은 끔찍했지만, 한화가 에스토니아 환전소에서 거래되는 모습을 보니 마치 일본 엔화나 스위스 프랑 정도로 가치가 향상된 듯해 기분이 좋았다.

라트비아의 유로존 가입, 의미는...

▲ 라트비아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인 중앙시장 곳곳에서 열린 설치미술전시회. ⓒ 서진석


에스토니아의 이웃나라인 라트비아도 2014년 1월 1일자로 유로존에 가입했다. 공교롭게도 올해부터 이 나라의 한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방문교수로 일하게 된 나도 유로화를 실질적 결제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과 공동화폐를 쓰게 된 것을 기념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됐다. 유럽문화수도는 1985년 당시 그리스 문화부 장관이던 멜리나 메르꾸리의 제창에 의해 최초로 시작된 행사다. 매년 유럽의 한 국가를 선정해 1년 동안 그 도시를 전 유럽에 알릴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다.

올해는 리가 외에도 스웨덴의 우메아가 공동으로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됐다. 이미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가 2009년 문화수도로 지정됐고, 2011년에는 에스토니아의 탈린이 문화수도로 지정됐다. 라트비아의 리가는 발트3국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문화수도로 지정됐다. 리가시는 이를 통해 유럽 내에서의 문화적 위치를 더 공고히 하는 것은 물론, 여행이 한결 편해졌다는 것을 홍보해 더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는 계획이다.

겉으로만 봐선 겹경사를 치르게 된 라트비아 국민들의 기분은 지금 어떨까? 일단 라트비아 현지인들도 나 못지않게 유로화 사용에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이전에 사용하던 라트비아의 고유화폐 라트와 환율 차이가 나니, 당분간은 매장마다 유로와 라트 두 개로 가격을 게시해야 하지만 계산상의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처음 보는 화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위조지폐감별장치를 갖추지 못한 시장이나 소규모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위조지폐가 돌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화폐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불빛에 비춰보느라 계산하는데 시간이 유독 더 걸렸다.

유로동전에 새겨진 라트비아 아가씨 얼굴

▲ 유럽문화수도 개막 다음날인 1월 18일 열린 '책을 사랑하는 인간의 띠'에 참여한 라트비아 사람들의 모습 ⓒ 서진석


많은 이들이 유로 도입 후 물가 상승을 우려하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한다. 에스토니아의 경우 유로 도입 전 1유로 당 대략 15크론 정도로 교환했지만, 라트비아의 라트는 1라트당 0.7유로로 환산돼 유로보다 가치가 컸다. 라트비아는 구소련 국가들 중에서도 워낙 물가가 비싼 나라로 알려졌던 터라, 당분간 큰 물가 상승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로화 도입 후 라트비아에는 고민이 생겼다. 바로 그 돈을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통 유럽국가에서 유럽은 'Europe' 혹은 'Europa'라고 적기 때문에 발음에 차이는 있지만, 단어의 첫음절을 따서 대부분 Euro라고 적었다. 그러나 라트비아어로는 유럽이 Eiropa(에이로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또 남성명사, 여성명사의 분리가 엄격한 언어적 조건 때문에 유로화는 그동안 라트비아에서 에이라(Eira)라는 비교적 생소한 형태로 불리고 있었다. 따라서 유로화를 도입한 뒤 국제적 표준에 맞추어 에우로(Euro를 라트비아식 발음으로 하면 에우로)라고 할지, 아니면 라트비아 고유의 언어적 특성을 살려 에이라를 고집할 것인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여러 논쟁과 절충을 거듭한 끝에 에이로(Eiro)라 적고 남성명사식으로 변화시키기로 했다. 참고로 이미 2007년에 유로를 도입한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슬로베니아에서는 에브로(Evro)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아버지를 아바이라 불러야하는 것과 같은 이 딜레마는 리투아니아와 헝가리에서 유로화가 도입될 경우에도 다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트비아식 명칭인 에이로는 유로지폐에 새겨지지는 않는다. 현재 유로지폐에는 국제적 표준 명칭인 Euro가 그리스어 자모 및 키릴문자와 함께 병기돼있다. 유로 지폐는 한 가지 도안이 유럽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지만, 동전에는 각 국가의 고유한 양식이나 문양을 사용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동전 뒷면에 에스토니아 지도를 새겨 넣었으나, 라트비아는 1유로와 2유로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라트비아 아가씨의 얼굴을, 센트화에는 라트비아 국가휘장을 새겼다. 그래서 라트비아는 자국의 유로동전을 '가장 아름다운 유로화 동전'이라 부른다.

매서운 추위에도 인간띠 잇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

▲ 책 옮기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 인간띠 너머로 웅장한 국립도서관의 모습이 보인다. ⓒ 서진석


라트비아의 유로화 도입은 지난 1월 1일자로 시작됐으나, 2014년을 축하하는 유럽문화수도는 그보다 약 보름 뒤인 1월 17일에 공식 개막했다. 독일의 전설적인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리가에 머물면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오페라 <리엔치> 공연을 시작으로 안드리스 베르진슈 라트비아 대통령이 유럽문화수도의 시작을 선언했다.

유럽문화수도의 포문을 본격적으로 연 것은 개막 다음날인 1월 18일 열린 '책을 사랑하는 인간의 띠'다. 이 행사는 발트3국이 소련 치하에서 신음하던 1989년 당시 세 나라 국민 수 백 만 명이 모여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인간띠를 만들어 전세계에 독립의지를 천명한 '발트의 길'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현재 올해 가을 개관을 목표로 리가시 다우가바 강변에 국립도서관 건물을 신축하고 있는데, 리가 시민들이 이전 국립도서관과 새 국립도서관 건물을 잇는 인간띠를 만들어 책을 한 권 한 권 옮기는 행사를 연 것이다.

이번 인간띠 행사는 2014년을 기념하기 위해 길이도 2014m로 조정됐다. 행사 전 인터넷으로 참가 신청을 한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은 비닐로 꼼꼼하게 포장된 책을 옮기며 문화수도개최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18일 행사에는 시민 1만4000명이 모였고 대략 2000권의 책이 공수되었다. 맨 처음 도착한 책은 1825년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에서 발간된 라트비아어 번역성서로, 구 국립도서관을 떠난 지 정확히 1시간 16분 뒤 신청사에 무사히 안착했다.

행사가 열린 당일 리가시 날씨는 스마트폰이 오작동을 일으킬 정도로 매서웠지만, 시내 전체에 흥겨운 음악이 흘러 축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됐다. 또 참가자와 관광객 수 만 명이 리가 시내를 가득 메웠으나 안전사고는 물론이거니와 책 분실사고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라트비아 최대의 통신사인 라텔레콤에서는 이날 행사에 참여하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에 무료로 따뜻한 차를 나눠주기도 했다.

이날 리가 구시가지 인근에 있는 중앙시장에서도 리가의 역사와 변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설치미술전시 ▲영상물 상영 등의 문화행사가 열렸다. 2014년 내내 리가를 비롯한 라트비아 곳곳에선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와 공연, 전시들이 펼쳐질 계획이니, 올해 유럽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은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이전과 다른 화폐를 사용하게 될 라트비아 사람들은 한동안 낯섦과 흥분이 교차하는 시기를 보내게 될 것 같다. 주변 라트비아 지인들에게 유로화 도입에 대해 물으면 물가상승을 걱정하긴 하지만, 크게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동안 염원해왔던 서유럽으로의 진입을 완전히 이뤘다는 것이 더 큰 기쁨을 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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