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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까이에서 만난 백록담 설경

[제주도 1박 2일 여행 - 둘째 날] 한라산

등록|2014.01.22 17:15 수정|2014.01.22 17:15
한라산(높이 1950m)은 분출을 멈춘 휴화산으로 누구나 한 번쯤 오르고 싶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백록담뿐만 아니라 다양한 오름이 많고 봄철의 철쭉부터 겨울철의 설경과 운해까지 사계절 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해발고도에 따라 아열대·온대·냉대의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한라산의 상징인 노루를 곳곳에서 만나는 것도 산행의 재미다.

폭설로 며칠 동안 금지되었던 한라산 산행이 전날 해제되었다. 등산객이 많이 몰려들면 인원수를 제한할 수 있어 둘째 날은 일어나자마자 숙소에서부터 속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모처럼만에 아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느라 전날 밤늦게까지 과음을 했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고, 4시 30분에 밥을 먹고, 5시에 숙소를 출발하고, 5시 30분 성판악에 도착했다.

▲ 성판악 ⓒ 변종만


장갑, 모자, 넥워머, 아이젠, 스패츠, 보온병 등 겨울 산행은 준비물이 많다. 랜턴 없이 어둠속에서 겨울산행 초보인 둘째를 챙기느라 일행들과 떨어졌다. 이어 새벽 5시 50분경 다른 산악회원들의 랜턴 불빛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입구에서 '한라산국립공원, 해발 750m'를 알리는 표석이 눈 속에 서있다.

사방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다. 어두우면 한 가지 일에 더 몰두할 수 있다. 자박자박 발걸음 내딛는 소리가 정겹다. 랜턴 불빛과 옆에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위안이다. 오전 7시께 화장실이 있는 4.1㎞ 거리의 속밭대피소에 도착했다.

▲ 사라오름 ⓒ 변종만


과음으로 몸을 혹사시키고 잠을 설쳐 초반부터 힘이 드는데 아침을 여는 맑은 공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샘터와 1200m 표석을 지나면 아주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하늘 호수 사라오름 입구다. 이곳에서 사라오름 전망대까지는 왕복 40여 분 거리다.

사라오름(1324m)은 제주도내 386개의 오름 중에서 가장 높은 오름으로 정상의 분화구에 물이 고여 있는 산정호수라 작은 백록담으로도 불린다. 여름철에는 노루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거나 물을 마시면서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전망대에서 한라산 정상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힘도 들고 시간도 늦어 그냥 지나치려는데 막 그곳을 다녀오는 일행들을 만났다. 꼭 다녀올 것을 권유해 발걸음을 옮겼던 사라오름에서 멋진 상고대를 만났다. 분화구의 물이 얼어붙어 축구장만한 얼음판을 만들고, 주변을 둘러싼 숲의 나무들이 주렁주렁 예쁜 눈꽃을 매달았다. 시간에 쫓겨 분화구 끝에 있는 전망대는 다녀오지 못했다.

▲ 진달래밭대피소 ⓒ 변종만


사라오름 입구로 내려와 1.5㎞ 지점에 있는 진달래밭대피소로 향했다. 등산객들이 일렬로 줄을 이어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이 보기 좋다. 백록담 방향으로 1300m, 1400m 표석을 지나 경사가 급한 길을 오르면 눈밭 속에 진달래밭대피소가 나타나고 뒤로 백록담의 머리 부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판악에서 7.3㎞ 지점에 위치한 진달래밭대피소는 한라산을 찾은 사람들에게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컵라면, 식수 등을 사려는 등산객들이 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서 실내는 발 디딜 틈이 없다. 8개월 전 이곳에 왔을 때는 진달래꽃이 만발해 한참 머물었는데 찬바람이 몰아쳐 쉴 곳을 찾기도 어렵다.

컵라면을 먹고 가방 깊숙이 들어있는 줄 알았던 선글라스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값이 꽤 비싼 것이라 이곳저곳 뒤지며 20여 분 시간을 보냈다. 아뿔싸, 성판악에서 산행준비를 할 때 아이젠, 스패츠 등과 함께 배낭 옆에 꺼내놨었는데 어둠속이라 깜박 잊고 그냥 왔다. 아무리 좋은 것이더라도 품을 떠나면 내 것이 아니다. 오전 9시 30분경 백록담으로 향했다.

▲ 백록담으로 ⓒ 변종만


진달래밭을 지나면 2.3㎞ 거리의 동능 정상까지 힘든 코스가 이어지는데 맑은 날씨가 힘이 된다. 1500m, 1600m, 1700m, 1800m... 위치가 높아질수록 산 아래로 멋진 설경이 펼쳐진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별천지다. MBC의 헬리콥터가 머리 위를 낮게 날며 촬영을 하고, 등산객 행렬이 백록담 정상 부근에 길게 줄을 선 모습도 보인다. 지친 몸을 추스르며 힘들게 발길을 옮기다 1900m 표석을 만난다. 기어서라도 갈 수 있는 거리에 백록담이 있어 새로운 힘이 생긴다.

▲ 백록담 풍경 ⓒ 변종만


성판악에서 정상까지 9.6㎞, 정상에서 관음사지구까지 8.7㎞의 총 18.3㎞를 오르내리며 고생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백록담을 구경하는 것이다. 눈이 쌓여 사방이 백색 세상인 정상에 도착했다. 총 둘레 약 3㎞, 동서길이 600m, 남북길이 500m의 타원형 분화구 백록담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백록담의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예서제서 환호성을 지른다.

백록담은 하늘 가까이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백록담이라는 이름은 옛 선인들이 백록주를 마시고 놀았다는 전설과 흰 사슴으로 변한 신선과 선녀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오늘같이 설경이 아름다운 날은 백록담이라는 이름이 겨울철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사방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은 후 한라산천연보호구역 백록담 정상 표석, 한라산 동능 정상을 알리는 고사목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오전 11시경 하산을 시작했다.

▲ 하산길에 바라본 백록담 ⓒ 변종만


관음사지구로 향하는 하산 길 북쪽 방향에서 백록담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에서 멋진 설경을 만끽하며 행복을 누렸다. 눈이 바람에 휘날리며 주변의 모습을 수시로 바꾸고, 눈을 뒤집어쓴 고사목과 북벽이 어우러지며 만든 풍경이 아름답다. 자연의 위대함에 감사해하는 시간이다.

▲ 헬기장을 지나 용진각대피소까지 ⓒ 변종만


▲ 삼각봉대피소까지 ⓒ 변종만


특히 겨울 산행은 내려갈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아이젠을 착용했지만 수시로 미끄러진다. 눈이 많이 쌓인 외길에서 몇 사람이 올라오면 다시 몇 사람이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라 지체와 정체가 지루하게 반복된다.

단체 산행은 시간이 문제다. 끝없이 올라가는 군인들을 만나 길을 양보하다보니 약속시간에 맞출 재간이 없다. 마음이 급하지만 동동거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눈앞의 풍경을 즐기며 헬기장에서 급경사 내리막길을 따라가면 30여 년 동안 등산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다 2007년의 폭우로 흔적 없이 사라진 추억의 산장 용진각대피소다. 이곳에서 식사하거나 텐트를 치고 추위를 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출렁다리와 샘터를 지난 오르막에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려 앞산을 바라보면 왕관바위가 가깝게 보인다. 비교적 산행이 쉬운 산책길을 내려서면 해발 1500m에 위치한 삼각봉대피소다. 대피소 앞 뾰족한 봉우리가 삼각봉이다.

▲ 관음사로 ⓒ 변종만


삼각봉대피소에서 개미등을 거쳐 탐라계곡 목교까지의 탐방로 2.8㎞는 산행이 힘든 구간이다.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 상태를 조절하며 산행을 하지만 통증이 온몸으로 전해오고 걸음이 불편하여 자꾸 남은 거리를 살핀다. 탐라계곡에서 관음사지구까지는 비교적 쉬운 구간이지만 거리가 3.2㎞나 된다. 언제쯤 끝이 날까 산행이 지루해지면 관음사지구 초입에서 '한라산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문구가 반긴다. 약속시간에 50분이나 낮 2시 20분경 차에 올라 제주도특산품매장으로 향한다.

제주항에서 오후 4시에 출항한 로얄스타호가 50분이나 늦은 오후 7시 20분경 어둠이 맞이하는 우수영항에 도착한다. 목포 북항 회센터의 따뜻한 방에서 회를 맛있게 먹으며 피로를 풀었다. 일행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고속도로를 부지런히 달려 청주에 도착한 후 다시 택시를 타고 새벽 12시 10분경 집에 도착했다.

잠을 설친데다 과음으로 고생했지만 청주 산누리산악회원들과 어울리며 백록담의 멋진 설경을 구경하고, 부자간에 대화를 많이 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블로그 '추억과 낭만 찾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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