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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바꾼 만남

설날 귀향

등록|2014.01.27 10:43 수정|2014.01.27 10:43

▲ 36년 전 당진의 바닷가 소년이 어젯밤 모티프원의 마당에서 헤어지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저도 간혹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살아야겠어요." ⓒ 이안수


#1

한 학생이 서해안 좁은 해안도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어촌마을의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는 길목으로도 이용하지 않는 외진 길이었습니다. 빳빳한 스탠드칼라가 목을 죈 검은 교복의 그 학생은 학교와 집의 8km 남짓한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탈 차비를 아낄 요량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차비가 없었습니다. 

"학생! 이리와 봐!" 

바닷가 모퉁이 갓길에 서있는 검은 세단 승용차 옆에서 대여섯 보 떨어진 곳에 서 계신 신사 분의 목소리였습니다. 승용차의 문 옆에는 운전기사로 보이는 젊은 분이 서 계셨습니다.

"저요?"
"그래,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나?" 
"왜요?"
"어느 학교 다녀?"
"당진상고요."
"몇 학년이야?"
"3학년이요."
"그럼, 취직해야겠네?"
"예."
"어디 취직할 곳이 정해졌나?"
"아직……. 하지만 저는 졸업하면 서울의 인쇄소로 갈 생각이에요."
"그곳에 너를 맞아줄 사람이 있나?"
"형님이 서울 을지로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 신사분을 만난 것은 1978년 9월 어느날 늦은 퇴교길 이었습니다. 그는 혼자 해안도로를 한 시간째 걷는 중이었습니다. 

그를 부른 신사분은 아마 서울에서 바닷가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내려온 분임이 틀림없었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하염없이 수평선만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학생이 다니던 상업고등학교에서는 대부분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해야 하는 형편의 학생들이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주산, 부기, 속기, 타자, 상업미술 등의 과목이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실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능 위주의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상업미술이 전공이었습니다.  

그는 그림그리는 것에 소질이 있어서 사생대회나 포스트 그림 실기대회에 나가서 충청남도의 대상이나 일등상을 휩쓸다시피 했습니다. 

상고의 경우, 3학년 2학기가 되면 대부분 현장 실습을 나가고, 실습 나간 곳에서 취업이 확정되어 학교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림을 그리는 그 학생을 받아줄 당진읍내의 회사는 없었습니다. 점점 교실이 비어가는 학교에서 그림만 그리다가 퇴교하는 날들이었던 그는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인쇄공으로 근무하고 있는 두 형들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예, 저는 상업미술반이에요."
"너, 우리 회사에서 일해 볼래?"
"뭘 하는 회사인데요?"
"광고를 만드는 회사야."
"어디에 있는데요?"
"서울이지."
"안 그래도 서울로 갈 참이었어요."
"그래, 생각 있으면 다음달 16일, 서울에 와서 전화해라."

그 신사는 학생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습니다. 그 명함에는 '제일기획'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2 

그 학생은 충청도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에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렇다고 대학을 진학한다는 것은 가난한 반농반어의 자신 집 형편에서는 언감생신이었습니다. 결국 서울로 가야했고 그 명함을 건네준 분이 얘기한 날짜에 맞추어 상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78년 10월 16일. 월요일. 용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에 내린 그는 공중전화박스를 찾아서 그 명함속의 전화로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다이얼이 '찌르륵, 찌르륵…….' 바닷가에서 그 신사분을 만날 때 미루나무에서 울고 있던 쓰르라미 울음소리가 여섯 번 나고 나서 아가씨 목소리가 들였습니다. 

"여보세요?"
"남상조아저씨 좀 바꿔주세요."
"예?"
"전화를 달라고 해서요."
"누구세요?"
"최종섭이라고 합니다."
"언제 전화를 달라고 했어요?"
"한 달 전에요."
"정말이에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기가 넣은 동전을 다 먹어갈 쯤 수화기에서 남자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세요?" 

바닷가에서 들었던 그 신사분의 목소리가 맞았습니다."

"저 최종섭입니다."
"아, 지금 어디냐?"
"용산시외버스터미널이요."
"그래. 그럼 대합실 의자에 꼼짝 말고 앉아 있거라. 절대 대합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곧 데리러 가마."

한참을 기다리자 검은 세단 옆에 서 계시던 아저씨가 터미널로 들어왔습니다.

#3

그렇게 넓은 승용차를 타보기는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승용차가 서울의 중심가로 들어가자 조계사라는 큰 절이 보이고 제주은행이라는 큰 빌딩 어디를 지나 서흥빌딩이라는 현판이 달린 건물 속으로 들어갔고 저는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에 태워져 사무실로 안내되었습니다.

그  방에서 조금 전에 전화를 받은 아가씨인 듯한 아가씨가 그를 힐끔 보고는 의자에 앉히고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오래요."

다른 방에 들어갔던 아가씨가 나오자마자 말했습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 신사분이 책상에서 일어서시면서 말했습니다.

"반갑구나. 잘 왔다."

큰 소파에 그를 앉히고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제작1팀장 오라고해!"

곧 세련된 한 분이 올라와서 그 분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이 학생을 3년 내에 제일가는 제작팀원으로 만들어!"

그는 그 남자 분을 따라갔고 넓은 사무실의 한 쪽에 책상을 배정받았습니다. 

#4

남산 자락 단칸방에 세를 얻어 사는 형님방에서 당분간 잠을 자기로 하고 다음날부터 제작1팀으로 출근 했습니다.

아침에 먼저 출근해서 그 사무실 모든 책상들의 어질러진 것들을 정돈하고 물걸레로 깨끗이 닦았습니다. 어느날은 제작팀의 아가씨가 자기 책상의 빈 커피 잔을 씻어놓지 않았다고 꾸중을 하기도 했지만 제작1팀장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일감을 주었습니다. 잡지나 신문광고에 나갈 시안을 그려보게도 했고 나중에는 동영상광고의 스토리보드를 그려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는 데생공부를 해보라며 제게 개인적인 숙제를 내주기도 했습니다. 

그 바닷가의 신사분과는 그 회사에 처음 출근해서는 자주 찾아뵈었습니다. 짬이 나면 올라가서 인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잘하고 있지? 힘든 것은 없고?"

이 물음이 반복되었습니다. 저의 대답도 항상 같았습니다.

"예!" 

그런데 한 달쯤 뒤부터는 그 방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제작1팀장님도 그 방에 함부로 출입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모두가 그 방에만 들어가면 엄숙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함부로 출입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그 분을 뵐 수가 있었습니다. 

직원조회시간이었습니다. 1천여 명이 되는 모든 직원들이 강당에 집합한 그 조례의 맨 마지막 줄에서 앞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본 그 분은 항상 단상에서 멋진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도 곧 광고대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광고계의 최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여러분은 국내시장에 만족하지 않고 글로벌 능력을 갖추어야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정말 멋있는 말로 들렸습니다. 

"나는 언제 저렇게 멋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경외스러운 곳에 그분이 계셨습니다.

간혹, 사무실로 그 분이 내려오시면 모든 직원들이 하든 일을 멈추고 모두 일어서곤 했습니다. 

시문광고의 시안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사무실이 조용해졌습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고개를 드니 사무실 내의 모든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그 분이 바로 제 뒤에 서 계셨습니다. 그 분이 오신 줄도 모르고 책상에 고개를 박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그 분은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한참 응시하고 계셨던 겁니다.

#5 

그에게 일을 시킨 사람들이 그 결과를 받거나 혹은 데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군." 

그 회사에 근무한지 3년 뒤에 제작1팀장께서 말했습니다. 

"홍대 미대 야간에 시험을 보거라." 

그는 다른 과목의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실기는 만점을 받아 홍대 야간에 입학하여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가 입사 5년 되던 해에 그 신사분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대홍기획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회사를 마지막으로 떠나시는 날, 저와 마주치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힘들지.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알고 있어." 

그는 그 신사분이 떠나고 홍대 미대를 그만두었습니다. 주간에 일이 끝나기도 전에 수업에 가는 것도 미안하고 주간에 이미 파김치가 된 몸으로 야간에 수업은 무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신사분이 회사를 떠나고서는 의욕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여관작업도 계속되었습니다. 여관작업이란 마감에 임박한 광고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회사 주변의 여관을 빌려서 퇴근을 하지 않고 밤샘 작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여관작업이 좋았습니다. 싼 집을 얻기 위해 서울외곽으로 나가 구한 셋방까지 먼 길을 오가는 차비도 아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밥걱정이 없었습니다. 늦게 퇴근하면 귀찮기도 해서 저녁밥을 굶고 잠을 자곤 했지만 여관작업을 하면 회사에서 저녁은 물론 아침까지 주니 밥은 굶지 않으면서도 밥값은 아낄 수 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

직장의 업무는 항상 동일하게 반복되었습니다. 시안을 그리고 광고주에게 채택이 되면 여관작업을 하고 다시 수정을 하고 작업을 마치면 다시 다른 회사의 같은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회사의 조직 속에서 평생을 일해도 이제는 그 회사에 계시지 않는 그분의 그 멋진 모습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입사 10년이 흐른, 31살이 되던 해에 비장한 결심을 했습니다.

#6

회사에 사표를 내자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부서장이 제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네가 독립해서 사업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0'퍼센트야. 대한민국의 인재들이 대부분 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이번 공채 경쟁률을 너도 알지? 1200대 7이었어. 명문대학을 나오고 유학 갔다가 온 스펙 빵빵한 친구들 1200명중에서도 7명만 이 회사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거야. 다시 생각해봐. 이 사표는 내 책상에 잠시 보관하마."

하지만 그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제가 독립에서 실패하면 고향으로 내려가 작은 낚싯배 하나를 사서 낚시안내나 할랍니다. 제 길을 가겠습니다."

그는 그길로 중부경찰서 앞에 사무실을 얻고 사진식자기를 들이고 가장 손이 빠른 오퍼레이터를 채용했습니다. 그리고 기획부와 제작부 책임자 두 사람과 실무일을 맡을 두 사람으로 광고기획사의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그는 1988년 8월 8일에 사무실을 열고 집으로 퇴근한 것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사무실 한 켠에 접이식 간이침대를 두고 입술이 부르트고 충혈된 눈으로 일만하고 있는 그를 두고 주변의 지인들이 말했습니다.

"너 그러다 죽는다. 죽어."

그렇지만 그는 사식기와 사무실의 모든 집기, 임대료, 직원들의 월급을 생각하면 죽어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사무실을 내는데 얻었던 빚은 모두 갚았습니다. 그리고도 배수진을 친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에 속도를 늦추진 않았습니다. 직원에게는 실적에 따른 실적급을 아끼지 않았지만 거래선의 관리에서는 엄격했습니다.

"저 놈은 독사 같은 놈이야."

거래선 사람들이 공공연히 그를 '독사'라고 지칭했지만 그럼에도 거래는 끊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는 일과 같은 수준의 결과물을 내는 새로운 거래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집을 샀습니다. 하지만 일의 강도를 줄이지는 않았습니다. 타워팰리스를 비롯한 고급주상복합아파트와 전국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및 골프장의 조감도들은 거반 그의 손을 거쳤습니다. 노동 강도가 높은 반면에 수수료는 많지 않은 일들이면서 상상력을 필요로하는 정교한 일이었습니다. 

회사이름은 '상록수'기획에서, 'AD Asia', 'WATT' 등으로 시대의 조류를 반영하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100% 망한다'고 했던 제일기획 동료와 선배들의 예상과는 달리 24년간 지속되었고 그도 낚싯배를 몰 일이 없었습니다. 

#7

그는 3년 전에 눈이 침침해지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더 이상은 대형광고대행사의 하청의 하청일로 이문 박한 제작 일만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마침내 더 이상 체력이 허락하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실무를 진행하는 그 일을 그만두고 광고대행일을 하는 에이전트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24년간 운영했던 그 회사를 한 식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모든 집기와 장비, 거래선 까지 오랫동안 헌신했던 동료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자신은 몸만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인과 함께 'fromtocomm'이라는 대행사에 '대표이사'로 합류했습니다. 말은 대표이사지만 기실은 각자가 일한 만큼의 지분을 할양하는 도급 같은 구조였습니다.

수입은 줄었고, 새로운 방황이 이어졌습니다. 딸은 미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 딸의 오빠인 아들은 아직 대학4학년입니다. 자식들이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상황입니다.

다시 지인들과 새로운 기획을 진행중입니다. 이제는 욕심을 훨씬 더 줄였습니다. 아직 일을 완전히 놓을 나이는 아니므로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기로 했습니다.

결국 독립회사를 운영하고도 그 신사분처럼 멋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오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8

어젯밤(1월 25일) 저와 모티프원에서 대면한 최종섭 선생님은 36년 전 당진의 한 바닷가 비포장 해안도로에서 그 신사를 대면했던 까만 교복의 그 상고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세웠던 까만 세단옆의 신사는 제일기획을 거쳐 대홍기획의 대표이사를 역임하고 한국광고업협회장, 국내 유일의 4대 매체 광고량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운용하는 ㈜케이에이디디(KADD) 회장, 한국광고단체연합회장, 아시아광고연맹 회장을 지낸 남상조 회장님입니다. 

자정쯤에 모티프원 서재를 나서자 봄날씨 같았던 낮과는 달리 기온이 뚝 떨어져있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촘촘했습니다. "별 좀 보라"고 최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어, 하늘에 별들이 있네…."
"그동안 땅만 보고 다니셨군요. 하늘을 외면한 채…." 

최근 몇달 동안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끼는 일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최 선생님은 그때 비로소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의 어려운 일로 집안 어른들께 걱정을 끼쳐드릴 것 같아 이번 설에는 귀향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엊그제 당진의 노모께 전화를 드려서 출장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귀향 대신 이번 설에 남상조 회장님을 한 번 찾아뵈어야겠어요. 그동안 저와는 너무 먼 곳에 계신분이라 오히려 누가 될까봐 한 번도 찾아뵙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몇 번 주주총회에 참여했던 사람을 통해 '종섭이 잘 있지?'라고 저의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꼭 연락처를 알아내어 찾아뵙고 현관 앞 땅바닥에서라도 큰절 한 번 드릴랍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motif.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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