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인타운? 스페인어 간판만 보이네
[뒷길에서 본 아메리카 22] 멕시칸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했다
"아빠, 후안네 엄마가 저한테 참 잘해 줘요. 후안네 엄마는 또 우리 엄마처럼 사람이 푸근해서 대하기가 무척 편해요. "
후안(Juan)은 아들이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단짝이었다. 당시 아들은 백인 학생의 비율이 95%로 절대적인 고등학교에 다녔었다.
학교에 극히 드문 소수인종으로서 후안과 아들은 동병상련의 감정이 있었던지, 만나자 마자 '절친'이 됐다. 후안은 그러나 외모로만 보면 동양인보다는 백인에 가까웠다. 키도 또래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었다.
헌데 후안네 엄마는 영 딴판이었다. 한국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용모가 동양적이었다. 게다가 아이 엄마처럼 체구 역시 꽤 작았다.
아들이 후안을 알게 된 것은 미국생활을 한 지 6년째였을 때였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나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 가, 한국의 엄마와 떨어져 산 지 딱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을 즈음이기도 했다.
아들은 백인친구들과는 썩 잘 어울리지 못하는 축이었다. 아들은 정이 많고, 항상 좋은 게 좋다는 식이었는데, 백인친구들은 그런 성격을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았다. 곁에서 내가 지켜보니, 백인친구들의 엄마 아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안은 형이 하나, 누나가 둘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외모로 보면 형제자매들이 크게 두 패로 갈렸다. 후안네 형과 누나 한 사람은 체구가 작고 동양인 같은 인상이었다. 나머지 누나 하나는 확연하게 백인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후안네 엄마와 나는 서로 절친인 아들친구의 부모로서 심적으로 가깝게 지냈다. 후안네 아빠는 멕시코 출신으로서 큰 조직범죄와 연루돼 십수 년째 가정을 등진 상태였다.
후안네 엄마는 내가 어릴 적 시골에서 봤던 동네 아줌마들처럼 마음 씀씀이가 고왔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음식 나눠주길 좋아하고, 여러모로 정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겸손해 할 일이 아닌데도, 곧잘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미국에 살면서 같은 소수인종이어서 인지, 아니면 백인에 비해서 서로 외모가 닮아서인지 멕시코 출신들은 유달리 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만의 착각 혹은 제한된 경험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도 또한 나 같은 동양인을 가깝게 느끼는 것 같았다.
LA는 북미대륙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이다. 헌데 이곳은 한국사람들과만 남다른 인연이 있는 게 아니다. 후안네와 같은 멕시코 출신을 필두로, 이른바 히스패닉(Hispanic)으로 불리는 중남미 계통 사람들과도 각별한 관계가 있는 도시다.
LA시를 포함해 LA카운티에 사는 히스패닉 인구는 약 500만 명에 이른다. LA카운티는 한국으로 치면 전라남도와 면적이 엇비슷하다. LA카운티 전체 인구가 1000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이곳 주민 둘 중 하나가 히스패닉 계인 셈이다.
이러니, LA를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이곳을 찾은 한국사람들은 실망감 같은 걸 나타내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2000년대 후반 LA를 찾은 내 친구도 그랬다.
"야, 여기가 정말 미국 맞냐. 이건 뭐, 한국 지방 소도시보다도 못하고, 어떻게 된 게 영어 간판 보기가 힘드냐."
친구를 차에 태워, 한인상권이 밀집한 지역을 구경시켜 주는데 나온 첫마디였다. 북미대륙은 더 이상 유럽계 백인들 세상이 아니다. 소수계, 그 가운데서도 히스패닉으로 불리는 집단의 인구가 무섭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히스패닉 인구가 최근 통계에 따르면 5300만 명이 넘는다. 이는 미국 인구의 17% 가까이 되는 수치로 남한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북미대륙을 여행하면서, 특히 미국의 남부 지방을 돌아다닐 때는 백인보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이는 나만의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미국 인구의 약 3분의 1이 히스패닉과 흑인이다. 헌데 이들 두 그룹은 남부 지방에 집중적으로 몰려 산다. 텍사스, 플로리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이 대표적이다.
히스패닉 사람들은 외모가 주는 인상뿐만 아니라 생활문화도 주류인 백인과는 사뭇 다르다. 경제적으로는 빈곤층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다. 또 대부분은 이민 1세나 2세들이다. 미국에 뿌리를 깊이 박은 사람들이 적다는 뜻이다. 이러다 보니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마디로 히스패닉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의 특징을 두루 갖고 있다.
히스패닉 인구의 가파른 증가세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한 예로 미국의 출산율이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OECD 가입국 가운데 높은 편인 것은 히스패닉들이 아이를 많이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진보와 보수, 공화와 민주 양당으로 갈려 있는 미국 정치 지형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것도 다름아닌 히스패닉이다.
20년 혹은 30년 전의 미국과 오늘의 미국은 현격하게 다른 나라이다. 그 중심에 히스패닉이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민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는데, 만일 기층민중이 있다면 히스패닉이 그 주류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히스패닉은 인종그룹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 혹은 이 지역 출신을 뜻한다. 인종적으로는 인디오, 백인, 흑인 혹은 이들 간의 혼혈들이 모두 포함된다).
콜럼비아 출신으로 마이애미의 내 친구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히스패닉 남성.(왼쪽) 미국과 콜럼비아가 월드컵에서 맞붙는다면, 콜럼비아를 응원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쿠바에서 '로또 영주권'에 당첨돼 미국으로 단신 이민한 남자. (오른쪽 위) 하루 두 끼를 먹어가며 쿠바의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하고 있었다. 내가 감자 칩을 사주자, 일부를 배고플 때 먹겠다며 싸서 가져갔다. 이 남성이 살고 있는 마이애미 빈민가의 허름한 주택.
마이애미의 히스패닉 상가. 스페인어 간판 일색이다. LA의 한인타운에서도 이와 유사한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뉴올리언스에서 집을 고쳐 파는 일을 업으로 하는 히스패닉 남성. 뉴욕에서 돈을 벌러 이주해 와 재미를 보고 있었다. 카트리나가 내습한 그 해 겨울까지도 쓰레기 더미가 치워지지 않은 채 방치돼 있는 뉴올리언스의 주택가.
멕시코와 국경 인근에 사는 텍사스의 한 히스패닉 노인. 백인들이 텍사스를 접수하기 전부터 조상들이 이곳에 살았다며 농사를 짓는 농토를 가리키고 있다. 미국에 밀입국하려다 국경순찰대에 잡힌 멕시코 사람들이 현장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아래 왼쪽)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이루는 리오 그란데 강에 놓인 다리. 합법적인 비자를 가진 멕시코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매일 이 다리를 건너 미국으로 출퇴근 한다.
뉴멕시코 주 산타페의 시장에 고추 등 상품이 전시돼 있다. (왼쪽 위) 미국 남부와 멕시코 북부는 고추의 원산지이다. 이런 탓인지 멕시코 사람들은 대체로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 산타페의 가톨릭 성당. (왼쪽 아래) 산타페는 히스패닉 문화의 한 축인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건설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원주민으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 따르는 과달루페의 성모상. (오른쪽) 산타페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한 성당 마당에 있다.
캐나다와 마주한 미국 아이다호 주까지 진출한 히스패닉 남성들이 아이다호의 주산물인 감자를 파종하려 하고 있다. 히스패닉 사람들은 미국의 남부 지방에 몰려 살지만, 최근 들어 북부지방에서도 서서히 히스패닉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후안(Juan)은 아들이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단짝이었다. 당시 아들은 백인 학생의 비율이 95%로 절대적인 고등학교에 다녔었다.
학교에 극히 드문 소수인종으로서 후안과 아들은 동병상련의 감정이 있었던지, 만나자 마자 '절친'이 됐다. 후안은 그러나 외모로만 보면 동양인보다는 백인에 가까웠다. 키도 또래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었다.
헌데 후안네 엄마는 영 딴판이었다. 한국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용모가 동양적이었다. 게다가 아이 엄마처럼 체구 역시 꽤 작았다.
아들이 후안을 알게 된 것은 미국생활을 한 지 6년째였을 때였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나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 가, 한국의 엄마와 떨어져 산 지 딱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을 즈음이기도 했다.
아들은 백인친구들과는 썩 잘 어울리지 못하는 축이었다. 아들은 정이 많고, 항상 좋은 게 좋다는 식이었는데, 백인친구들은 그런 성격을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았다. 곁에서 내가 지켜보니, 백인친구들의 엄마 아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안은 형이 하나, 누나가 둘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외모로 보면 형제자매들이 크게 두 패로 갈렸다. 후안네 형과 누나 한 사람은 체구가 작고 동양인 같은 인상이었다. 나머지 누나 하나는 확연하게 백인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후안네 엄마와 나는 서로 절친인 아들친구의 부모로서 심적으로 가깝게 지냈다. 후안네 아빠는 멕시코 출신으로서 큰 조직범죄와 연루돼 십수 년째 가정을 등진 상태였다.
후안네 엄마는 내가 어릴 적 시골에서 봤던 동네 아줌마들처럼 마음 씀씀이가 고왔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음식 나눠주길 좋아하고, 여러모로 정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겸손해 할 일이 아닌데도, 곧잘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미국에 살면서 같은 소수인종이어서 인지, 아니면 백인에 비해서 서로 외모가 닮아서인지 멕시코 출신들은 유달리 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만의 착각 혹은 제한된 경험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도 또한 나 같은 동양인을 가깝게 느끼는 것 같았다.
LA는 북미대륙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이다. 헌데 이곳은 한국사람들과만 남다른 인연이 있는 게 아니다. 후안네와 같은 멕시코 출신을 필두로, 이른바 히스패닉(Hispanic)으로 불리는 중남미 계통 사람들과도 각별한 관계가 있는 도시다.
LA시를 포함해 LA카운티에 사는 히스패닉 인구는 약 500만 명에 이른다. LA카운티는 한국으로 치면 전라남도와 면적이 엇비슷하다. LA카운티 전체 인구가 1000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이곳 주민 둘 중 하나가 히스패닉 계인 셈이다.
이러니, LA를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이곳을 찾은 한국사람들은 실망감 같은 걸 나타내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2000년대 후반 LA를 찾은 내 친구도 그랬다.
"야, 여기가 정말 미국 맞냐. 이건 뭐, 한국 지방 소도시보다도 못하고, 어떻게 된 게 영어 간판 보기가 힘드냐."
친구를 차에 태워, 한인상권이 밀집한 지역을 구경시켜 주는데 나온 첫마디였다. 북미대륙은 더 이상 유럽계 백인들 세상이 아니다. 소수계, 그 가운데서도 히스패닉으로 불리는 집단의 인구가 무섭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히스패닉 인구가 최근 통계에 따르면 5300만 명이 넘는다. 이는 미국 인구의 17% 가까이 되는 수치로 남한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북미대륙을 여행하면서, 특히 미국의 남부 지방을 돌아다닐 때는 백인보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이는 나만의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미국 인구의 약 3분의 1이 히스패닉과 흑인이다. 헌데 이들 두 그룹은 남부 지방에 집중적으로 몰려 산다. 텍사스, 플로리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이 대표적이다.
히스패닉 사람들은 외모가 주는 인상뿐만 아니라 생활문화도 주류인 백인과는 사뭇 다르다. 경제적으로는 빈곤층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다. 또 대부분은 이민 1세나 2세들이다. 미국에 뿌리를 깊이 박은 사람들이 적다는 뜻이다. 이러다 보니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마디로 히스패닉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의 특징을 두루 갖고 있다.
히스패닉 인구의 가파른 증가세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한 예로 미국의 출산율이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OECD 가입국 가운데 높은 편인 것은 히스패닉들이 아이를 많이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진보와 보수, 공화와 민주 양당으로 갈려 있는 미국 정치 지형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것도 다름아닌 히스패닉이다.
20년 혹은 30년 전의 미국과 오늘의 미국은 현격하게 다른 나라이다. 그 중심에 히스패닉이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민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는데, 만일 기층민중이 있다면 히스패닉이 그 주류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히스패닉은 인종그룹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 혹은 이 지역 출신을 뜻한다. 인종적으로는 인디오, 백인, 흑인 혹은 이들 간의 혼혈들이 모두 포함된다).
▲ 마이애미 히스패닉 ⓒ 김창엽
콜럼비아 출신으로 마이애미의 내 친구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히스패닉 남성.(왼쪽) 미국과 콜럼비아가 월드컵에서 맞붙는다면, 콜럼비아를 응원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쿠바에서 '로또 영주권'에 당첨돼 미국으로 단신 이민한 남자. (오른쪽 위) 하루 두 끼를 먹어가며 쿠바의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하고 있었다. 내가 감자 칩을 사주자, 일부를 배고플 때 먹겠다며 싸서 가져갔다. 이 남성이 살고 있는 마이애미 빈민가의 허름한 주택.
▲ 히스패닉 상가 ⓒ 김창엽
마이애미의 히스패닉 상가. 스페인어 간판 일색이다. LA의 한인타운에서도 이와 유사한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 집 수리 ⓒ 김창엽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뉴올리언스에서 집을 고쳐 파는 일을 업으로 하는 히스패닉 남성. 뉴욕에서 돈을 벌러 이주해 와 재미를 보고 있었다. 카트리나가 내습한 그 해 겨울까지도 쓰레기 더미가 치워지지 않은 채 방치돼 있는 뉴올리언스의 주택가.
▲ 미국 멕시코 국경 ⓒ 김창엽
멕시코와 국경 인근에 사는 텍사스의 한 히스패닉 노인. 백인들이 텍사스를 접수하기 전부터 조상들이 이곳에 살았다며 농사를 짓는 농토를 가리키고 있다. 미국에 밀입국하려다 국경순찰대에 잡힌 멕시코 사람들이 현장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아래 왼쪽)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이루는 리오 그란데 강에 놓인 다리. 합법적인 비자를 가진 멕시코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매일 이 다리를 건너 미국으로 출퇴근 한다.
▲ 산타페 ⓒ 김창엽
뉴멕시코 주 산타페의 시장에 고추 등 상품이 전시돼 있다. (왼쪽 위) 미국 남부와 멕시코 북부는 고추의 원산지이다. 이런 탓인지 멕시코 사람들은 대체로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 산타페의 가톨릭 성당. (왼쪽 아래) 산타페는 히스패닉 문화의 한 축인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건설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원주민으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 따르는 과달루페의 성모상. (오른쪽) 산타페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한 성당 마당에 있다.
▲ 아이다호 ⓒ 김창엽
캐나다와 마주한 미국 아이다호 주까지 진출한 히스패닉 남성들이 아이다호의 주산물인 감자를 파종하려 하고 있다. 히스패닉 사람들은 미국의 남부 지방에 몰려 살지만, 최근 들어 북부지방에서도 서서히 히스패닉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세종시 닷넷(sejongsee.net)에도 실렸습니다. 세종시 닷넷은 세종시에 관한 소식을 담은 비영리 커뮤니티 포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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