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A급 전범 외조부 아닌 청렴한 조부 닮았더라면...
[김당의 톺아보기-아베의 혼네①] 요시다-기시-아베로 이어진 '정한론'의 본향
▲ 헌법 개정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자민당 간사장대리 시절의 아베 신조. ⓒ MBC 화면
일본인의 특성을 얘기할 때, 흔히 '혼네(本音, 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 겉표현)'가 다르다고 말한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한국에서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되지만, 일본에서는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일본에서는 겉 다르고 속 다른 두 얼굴의 정치인들이 박수를 받는 배경이기도 하다. 아베 신조 일본내각 총리대신이 그런 경우다.
아베는 지난 2006년 9월 전후(戰後) 최연소이자 전후 세대 첫 총리(제90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1년 만인 2007년 9월 참의원(상원) 선거 참패와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했다. 그리고 2012년 12월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함에 따라 5년 3개월 만에 다시 총리(제95대)로 취임했다. 아베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제45·48·49·50·51대)에 이어 전후 일본 정치사에서 두 번 총리에 오른 두 번째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아베 총리의 언행은 주도면밀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과거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릴레이'는, 각료대신들이 '망언'으로 '혼네'를 드러내면 총리가 '사과'의 '다테마에'로 무마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아베는 '전후 세대 첫 총리'임을 과시하듯, 본인이 직접 '망언 릴레이'를 펼치거나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를 강행하면서 '역사 전쟁'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베는 왜 주변국과의 마찰을 무릅쓰고 '역사의 역주행'을 강행하는 것일까? 역사의 정상궤도를 이탈한 폭주 기관사 아베의 '혼네'가 상정한 종착역은 과연 어디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으로 아베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오늘의 아베 총리를 있게 한 일본의 세습 정치와 그의 본향, 우익 역사관, 그리고 주변국(특히 북한)의 존재라는 세 가지 열쇳말로 접근해 본다.
아베가 존경하는 쇼인 "조선 정벌해 북으로 만주 점령하고..."
▲ 야마구치현 하기에 있는 요시다 쇼인의 옛집과 생가 터. 1) 옛집의 일부는 쇼카손주쿠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강의실이다. 2) 쇼카손주쿠 뒤쪽, 쇼인이 하기에 강제 송환되었을 때 갇혀 있던 곳(표시 부분)으로 그는 이곳에서도 강연을 했다. '쇼인 신사'가 이 건물과 마주하고 있다. 3) 2의 표시 부분 내부. 4) 쇼인의 생가 터. 출처는 <에도의 여행자들> ⓒ 에도의 여행자들
아베는 1954년 9월 21일 도쿄에서 당시 <마이니치신문> 기자였던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와 어머니 요코(洋子)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베 집안은 계파 정치와 세습 출마가 전통인 일본의 대표적 정치 명문가다. 아베 집안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태동지인 조슈번(長州藩), 현재 혼슈(本州) 남단의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다. 아베는 91년 이곳에서 아버지의 선거구를 승계한 이후 93년부터 지금까지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내리 당선된 7선 의원이다. (내각총리가 의회 해산권을 갖는 일본의 중의원 임기는 4년이지만 통상 2년반 만에 해산되고 선거가 행해진다)
야마구치는 아베의 '혼네'를 구성하는 정체성과 역사 인식의 출발점이다. 아베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59)도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일본 역사사전은 그가 무사계급으로 사상가, 교육자, 병학자, 지역연구가라고 설명한다. 쇼인은 사쓰마번(薩摩藩, 현 가고시마현)과 함께 메이지유신(1868년)을 주도한 조슈 번벌(藩閥)의 스승이다. 일본인들에게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게 이끈 근대화의 선각자이다.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정한론(征韓論, 187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서 일어났던 조선 정복에 관한 주장)의 원조이자 일본 군국주의와 침략주의 선동가이다.
쇼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에도(江戶, 현 도쿄)에 수립한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7) 말기에 조슈번의 도읍지였던 하기(萩)성의 쇼카손(松下村)에서 하급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양부가 죽자 숙부가 세운 사설학당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공부해 11살 때 번주(藩主)에게 병학(兵學)을 강의할 만큼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에도로 유학간 쇼인은 1853년 미국의 페리(Perry)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개항을 압박하자, 쿠로후네(黒船, 에도 시대 말기에 일본 근해에 출몰한 서양의 대양 항해용 대형함으로 당시 타르로 선체를 검게 칠해 붙여진 용어)를 시찰하고 큰 충격을 받아 해외유학을 결심한다.
서구열강이 군함을 앞세워 개항을 압박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이 먹구름처럼 몰려오던 시절이었다. 쇼인은 한 번은 러시아 군함, 다른 한 번은 미국 군함을 타고 밀항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했다. 그는 조슈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그는 한달 평균 50권씩 600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전해진다. 감옥 안에서 <맹자>(孟子)를 강의하고, 밀항 동기와 사상적 배경을 담은 <유수록(幽囚錄>을 썼다. 그가 24살 때였다.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를 개척해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와 조선을 정벌해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타이완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선과 만주,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강국(유럽)과의 교역에서 잃은 것은 약자에 대한 착취로 메우는 것이 상책이다."
일본인들이 꼽는 근대 최고 사상가의 국가전략이 고작 '약육강식의 하책'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들이 쇼인의 주장에 열광했고, 이 책은 나중에 일본 군국주의 침략의 배경이 된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에 부국강병의 근대화를 이뤄냈지만, 이웃나라에는 근대화된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보내 침탈한 두 얼굴의 침략자였다.
아베의 롤모델, 군국주의자 요시다 쇼인과 기시 노부스케
▲ 1961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과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 대한뉴스
▲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입구에 있는 메이지유신 100주년(1968년) 기념비. ‘明治維新 胎動之地(명치유신 태동지지)’라는 글씨는 아베의 정치적 롤모델이자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쓴 것이다. ⓒ 신영우 교수
쇼인은 출옥후 영지내 유폐(幽閉) 처분을 받았다. 숙부가 세운 쇼카손주쿠 글방의 이름을 이어받아 사숙을 열었다. 다이묘(大名, 지방 영주)와 사무라이 중심의 봉건계급사회에서 그는 파격적으로 출신을 따지지 않고 문하생을 받았다. 미천한 이시가루(足輕, 농민군)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존황양이(尊皇攘夷,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받들어 외세를 물리친다) 운동을 펼치다가 막부에 의해 역모죄로 처형되기 전까지 1년2개월 동안 9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정치가를 포함해 대학 설립자,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와 선박 기술 선구자들이 나왔다.
서른에 참수당한 쇼인은 처형당하기 전날 제자들에게 유언서를 써서 남겼다. 많은 일본인들의 혼네에 담겨있는 '유혼록'(留魂錄)의 앞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몸은 비록 무사시(도쿄 인근 지명)의 벌판에서 스러지더라도 야마토 다마시(大和魂, 일본정신)는 꼭 세상에 남겨두리라…." 야마토 다마시! 그렇다. 태평양전쟁에서 스러져간 그 많은 '황군'들이 '가미카제'와 함께, '돌격 앞으로'와 함께 외친 죽음의 구호다. 후루카와 카오루(古川薫)의 저서 <유혼록의 세계>(留魂録の世界)는 아베의 애독서이다. 아베의 정신세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유훈은 쇼인의 간판 문하생으로 막부(幕府) 타도의 선봉이 된 '풍운의 사무라이'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 1839~1867)를 필두로 한 제자들에 의해 구현되었다. 신사쿠는 1866년 고쿠라 전투에서 사무라이와 평민을 섞은 1천의 '신사쿠 기병대'(奇兵隊)로 2만의 막부군을 물리친다. 막부시대의 몰락을 재촉하는 일대사건이었다. 신사쿠는 이듬해 폐결핵으로 숨져 1년 뒤에 온 신천지(메이지유신)를 보지 못했다. 이토는 "움직일 때는 번개(雷電) 같고, 일어설 때는 비바람(風雨) 같다"고 그를 추모했다. 일본 사무라이의 상징인 신사쿠는 아베에게도 '오마주'의 대상이었다. 아베의 이름(晋三)은 신사쿠(晋作)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쇼카손주쿠 강의실 한쪽 벽에는 쇼인과 12 제자의 초상화·사진이 세 줄로 걸려 있다. 맨 윗줄에는 쇼인(가운데)과 신사쿠, 구사카 겐스이(久坂玄瑞),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 '4천왕'(四天王)으로 불린 수제자들이 있다. 기도는 메이지 유신 삼걸(三傑) 중 한 명이다. 이들은 모두 메이지 유신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요절하거나 암살당했다.
그 빈 자리를 '차석'의 제자들이 채웠다. 두 번째 줄에 있는, 메이지 시대 문무의 핵심인 이토 히로부미(제1·5·7·10대 총리)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제3·9대 총리), 한일합병 당시 총리였던 가쓰라 타로(桂太郞, 제11·13·15대) 등이다. 문하생은 아니지만 이토의 불알친구로 조선공사를 지낸 명성황후 암살 배후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한일합병의 원흉들이다.
아베는 1기 내각 시절인 2006년 의회에서 "쇼인 선생은 3년간(감옥 강의 포함) 교육으로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작은 쇼카손주쿠가 메이지 유신 태동지가 됐다"고 했다. 지금은 국가유적지가 된 이 '소나무 아래 마을글방'(松下村塾) 입구에는 '明治維新 胎動之地(명치유신 태동지지)'라는 글씨가 새겨진 큰 돌비석이 있다. 메이지 유신 100주년(1968년) 기념물이다. 전후 최장수(제61·62·63대) 총리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가 쓴 것이다. 사토는 아베의 정치적 롤모델이자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제56·57대 총리)의 친동생이다(기시가 양자를 가서 형제의 성이 다르다).
A급 전범 용의자·보수 반동 매파인 외조부 세습
▲ 청년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상단 원)와 그의 불알친구로 뒤에 조선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왼쪽 아래). ⓒ 에도의 여행자들
기시는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에서 고위관료로 일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전쟁물자를 관장하는 군수차관과 상공장관을 지냈다. 기시는 일본이 패망한 뒤 고향 야마구치시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수감되었으나, 냉전이 격화된 가운데 1948년 성탄전야에 공직 선출 제한 조건으로 석방된다. 그는 1952년 공직진출 제한이 풀리자 '자주헌법 제정' 등을 슬로건으로 내건 일본재건연맹을 설립해 정치를 재개했다. 1955년 11월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초대 간사장이 됨으로써 이른바 자민당 55년 체제를 열었다. 이후 기시는 총리 시절에 줄기차게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베의 조부인 히로시(安倍寛)는 기시와는 반대로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반골 기질의 '비둘기파' 정치인이었다. 야마구치현 오쓰(大津) 출신으로 1937년 총선에서 중의원(무소속)에 당선되었고, 1942년 익찬선거(翼賛選挙, 도조 히데키 내각이 전쟁에 비협조적인 후보를 낙선시키려고 했던 선거)에서도 도조 내각의 군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1946년 52세에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아들 신타로가 대학생이었을 때다.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는 기시의 딸과 결혼해 아베를 낳았다. 기자였던 신타로는 1956년 장인인 기시가 외무상으로 입각하자 신문사를 그만두고 외무상 비서관이 된다. 기시가 총리가 되자 총리 비서관으로 취임했다. 1958년 총선거에 야마구치 1구에서 자민당 후보로 출마해 정치가의 길로 들어선다. 신타로는 기시파를 계승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파에서 활동하면서 내각 관장장관, 자민당 정조회장 등을 지냈다.
▲ 헌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건 자민당의 홈페이지. ⓒ 자민당 홈페이지
아베 신조는 조부가 일찍 사망한 탓에, 어릴 적부터 외조부 손에서 자랐다. 신조는 대학 졸업후 고베철강에 다니다가 82년 당시 외무상에 취임한 신타로의 권유로 외무상 비서관이 된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어 36세에 아버지 선거구를 승계한다. 아베는 불행하게도 '오쓰의 성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청렴한 비둘기파 정치인(조부)보다는 A급 전범 용의자이자 노회한 보수 반동의 매파 정치인(외조부)의 자산을 세습했다.
기시는 평화헌법 개정을 주장한 첫 총리다. 일본이 독립하려면 '자주헌법'이 필요하다는 게 기시의 신념이자 정치적 목표였다. 아베 역시 "평화헌법 개정이야말로 독립의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아베가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한 '강한 일본 되찾기'와 '새로운 나라 만들기' 구상은 결국 기시가 꿈꿨던 국가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입으로는 '적극적 평화'를 외치지만 아베의 피에는 극우와 전범의 DNA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베가 주변국의 경고와 동맹국(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사를 참배하는 이유다.
아베는 지난해 4월 의회에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나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면서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침략의 정의가) 다르다"고 답변했다. 8월에는 '쇼인 신사'를 참배하면서 "중의원 입후보의 뜻을 굳혔을 때도 참배했다, (앞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을 맹세한다"고 했다. 12월에는 현직 총리로는 고이즈미 이후 처음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공식참배했다.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을 지닌 야스쿠니는 이제 이름과는 상반되게 전쟁의 화신들을 추모하는 곳이 되었다. 두 얼굴의 야스쿠니와 두 얼굴의 아베는 오늘의 일본을 상징하는 야누스(Janus)의 두 얼굴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쓰는 데는 ▲ 아베 역사관의 뿌리인 조슈번(현 야마구치현)과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일대를 현장취재한 <한일병합 100년 침략자들의 본향을 찾아>(상·하)(매일경제, 박병선 기자), <아베 역사관의 뿌리 조슈를 가다>(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 ▲ 에도(江戶, 현 도쿄) 시대에 에도를 여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가 다카하시 치하야의 <에도의 여행자들>(효형출판, 2004) ▲ 구한말 동학농민혁명 전문가인 신영우 교수(충북대 사학과)가 쓴 <일본은 왜 '25세 선생·10대 학동' 수준을 못 벗어나나> ▲특히 아베 신조의 언행과 관련 자료를 집대성해 놓은 '인물타임즈’ 블로그(http://blog.naver.com/inmooltimes/90160837820)가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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