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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소문 돌던 이 남자, 귀농인 '비빌 언덕'이었네

장애인과 귀농인 도우미로 나선 전남 장성 풀향기미술관 정재근씨

등록|2014.02.05 18:37 수정|2014.02.06 10:46

▲ 정재근 씨가 자신의 작업장 겸 방에서 지난 날을 얘기하고 있다. 정 씨는 전남 장성에서 장애인들의 친구로, 귀농인들의 선배로 살고 있다. ⓒ 이돈삼


"오갈 데 없고 빈털터리였던 제게 마을 어르신들이 비빌 언덕이 돼 주셨어요. 이제는 제가 비빌 언덕이 돼 줘야죠. 장애인 친구들한테, 귀농인들에게…. 어르신들이 제게 베풀어 준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지난 4일 만난 정재근(57)씨의 말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서 딸기 농사를 지으며 풀향기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정씨는 장애인들에게 미술 선생님으로, 귀농인들에겐 성공한 선배 귀농인으로 '비빌 언덕'이 돼주고 있다.

"내가 가진 미천한 재주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함께 소통하고 나누면서 많은 상처와 눈물을 치유해 주고 희망을 줄 수 있어서 기쁘고요. 서로 기대어 산다는 것,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며 서로 웃는다는 것, 그게 인생이고 삶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정말 행복합니다."

▲ 정재근 씨는 딸기하우스 옆에 마련된 작업장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정 씨가가 작업장을 겸한 숙소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 이돈삼


▲ 정재근 씨가 지난 4일 컨테이너로 지은 풀향기미술관에서 장애인들의 그림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능기부의 일환이다. ⓒ 이돈삼


정씨의 삶은 장편소설 한 권이고 드라마 한 편이다. 1997년 외환위기(IMF) 직전까지 정씨는 돈 잘 버는 미술사업가였다.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제법 규모가 큰 화랑의 관장으로 살았다. 하지만 당시 20억 원이 넘는 부도를 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6개월 동안 도망자로 살다가 자수해 법무부의 보호를 받으며 숙식을 해결하는 처지가 됐다. 이른바 '경제사범'이 된 것이다.

"오갈 데가 없었어요. 창피하기도 했고요. 딸 셋과 노모를 모시고 무작정 장성으로 내려왔죠. 장성은 남편의 태 자리였거든요."

정씨의 부인 이덕순(57)씨의 얘기였다. 그녀는 장성에서 한 대기업의 하청업체에 다니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갔다. 정씨가 복역을 마치고 장성으로 내려온 것도 다른 방법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피붙이 하나 없던 고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반겨주는 이 하나 없었다.

"인사를 받아주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제가 일손을 거들어주겠다고 해도 모르는 척 하고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을 앓았죠.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눈 한 쪽을 잃은 것도 그 후유증이고요."

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깨어난 정씨는 몇날 며칠을 울었다. 그러고서 다시 한 번 살아봐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마을을 위해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때였다. 그날부터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마을 청소에 나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삼백예순다섯날 그렇게 청소를 했다. 낮에는 농사기술을 익히러 다녔다.

▲ 정재근 씨가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수업을 진행하는 풀향기미술관 내부 모습. 컨테이너로 만들어져 바깥 모습을 볼품 없어도 안은 근사해 보인다. ⓒ 이돈삼


"마을청소를 한 지 일 년이 지났던 걸로 기억됩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쭉- 지켜봤다고 하시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었어요. 15만3000원이 들어있었는데, 마을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딸기를 재배해보라고 권유하셨어요."

정씨는 그 의미를 읽고 무조건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선 마을주민들이 이끄는 데로 군청에 갔다. 주민들은 마을에 배정될 지원사업을 정씨에게 줄 것을 요구했다. 주민들이 책임을 지겠다며 읍소도 했다.

정씨가 딸기 재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7년 전이었다. 정씨는 그 날부터 하우스에서 먹고 자고 했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지 않았다. 하우스와 집의 거리가 단 30m인데도 그렇게 생활했다.

"마을 어르신들께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요. 최소한 '저런 놈 도와줬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요. 그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을 평생 잊지 말자고 다짐도 했죠."

정씨는 그렇게 하우스 작업장에서 잠을 자면서 딸기 재배법에 대해 공부했다. 틈틈이 그림도 그렸다. 수익금의 일정부분을 떼어내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건 시간문제였다.

▲ 정재근 씨가 딸기 하우스에서 부인 이덕순 씨와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딸기하우스는 이들 부부의 삶을 바꿔 준 공간이다. ⓒ 이돈삼


▲ 정재근 씨 부부가 딴 딸기. 소비자는 물론 생산자인 자기자신도 속이지 않고 진솔하게 가꾼 농작물이라고. ⓒ 이돈삼


딸기 재배가 안정되면서 재능 기부에 눈을 돌렸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육과 양로원 봉사활동에 나섰다. 미술교육에 대한 경험이 없어 고민이 됐지만, 전남장애인종합복지관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기본적인 색칠로 시작된 프로그램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지금은 딸기하우스 옆에 컨테이너로 제법 그럴싸한 그림방을 만들어 수업을 하고 있다. 이름도 '풀향기 미술관'으로 붙였다. 여기서 매주 화요일 그림수업이 진행된다. 재작년 백양단풍축제 때는 장애인들이 그린 그림으로 미술작품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정씨는 여기서 멈추기 않고 장애인들에게 새로운 도전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딸기 하우스 1동을 장애인들에게 아예 주기로 한 것이다. 평소에는 정씨와 그의 부인이 관리하고 미술수업이 있는 날에는 장애인들이 가꾸도록 했다.

장애인들이 가꾸고 딴 딸기는 또 장애인들이 직접 포장해서 팔고 수익도 자신들을 위해 쓰도록 했다. 장애인들이 딸기를 가꾸면서 마음의 안정까지 얻어가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정씨는 재능기부의 폭을 넓혀갔다. 인근 광주 광산구의 장애인단체와 어린이집, 요양원까지 대상으로 삼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을 통한 현금 기부도 해마다 늘려가고 있다.

▲ 풀향기미술관에서 그림수업을 마친 장애인들이 하우스에서 딸기를 따고 있다. 정재근 씨가 이들에게 조건없이 내준 하우스다. ⓒ 이돈삼


▲ 귀농인들의 터전으로 풀향기미술관 앞에 조성되고 있는 농지. 정재근 씨가 귀농인들의 실습공간으로 쓸 땅이다. ⓒ 이돈삼


예비 귀농인들을 대상으로 귀농교육을 시키는 것도 정씨의 몫이 된 지 오래다. 6개월 동안 힘든 과정을 이겨낸 사람들이 농촌에 무사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일상이 됐다.

"귀농인들은 대부분 농사지을 기반이 없어요. 그 사람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쳐주고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필요하면 보증이라도 서주고요. 마을 어르신들이 저에게 했던 것처럼 저도 따라하는 거죠."

예비 귀농인들에게 '비빌 언덕'이라도 돼주자는 게 정씨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정씨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정착한 귀농인이 벌써 13명에 이른다. 그들은 모두 억대 부농의 길에 접어들었다.

"7년 동안 딸기를 재배하면서 단 한 번도 속여본 적이 없습니다. 소비자를 속이지 않았고, 나 자신을 속이지도 않았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농사지을 겁니다. 장애인들이나 귀농인들을 보면서 보람도 느끼고요.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며 서로 웃을 수 있다는 게 인생인 것 같습니다. 그게 행복이고요. 그래서 지금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말끝마다 '행복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정씨는 올해 장애인 전용 미술관 건립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근사하지는 않더라도 장애인들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소박한 미술관을 그리고 있다. 농촌의 빈 창고를 고쳐서 미술관으로 꾸밀 생각을 하는 것도 이런 연유다.

▲ 정재근 씨가 자신의 작업장 겸 방에서 지나온 날들을 얘기하고 있다. 딸기 상자가 놓여있는 곳이 그의 침실이다. 딸기상자 밑으로 전기장판이 놓여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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