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은 물이요, 정부는 그 속에 사는 고기
[서평] 죽산 조봉암이 쓴 '우리의 당면과업'
▲ 평화통일과 진보적 정치운동의 선구자로 남았던 죽산 조봉암 선생이 1954년 3월에 간행했던 '우리의 당면과업' 표제 ⓒ 이정민
"정부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용기있게 시정시켜야 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그저 불평이나 말하고 방관시하고 있는 것은 현대 문명사회 국민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태도인 것이다"(죽산 조봉암)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5일 박근혜 정부 1년을 두고 '국민의 안녕은 없다'고 단정했다. 이러한 발언은 박 대통령 초임 기간부터 줄곧 지적당한 불통, 독재, 절반의 이미지가 아직 해소되지 못했다는 걸 보여준다.
김 대표는 국회 대표연설을 통해 120년 전 일어났던 갑오경장과 갑오개혁을 빗대며 2014년 갑오년 새해는 국민의 주권과 민주주의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의 권력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전 국민의 편에서 균형있게 다독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든 것이다.
김 대표가 언급한 20세기의 갑오개혁 사건을 굳이 빗대지 않아도 가까운 근대사에 혁신정치, 진보정치의 대업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죽산 조봉암(이하 죽산) 선생이 있다.
인천 강화 출생으로 국회 부의장과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죽산은 그 유명한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저서를 통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정부 기관 그리고 국민이 지녀야 할 올바른 정치적 책임에 대해 일침을 놓아 생애 중대한 갈림길에 서고 말았다.
우리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다
1995년 죽산의 저서를 새로이 복원했던 조민 민족통일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조봉암 선생의 정치사를 두고 혁명적 이상체계와 정치적 현실세계를 넘나드는 활동가로 평가했다.
즉 죽산은 압제와 억압의 식민체제를 타파하려는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민족혁명가의 삶을 살아온 반면,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추구하는 민주적이며 민중적인 지도자서로서의 정치적 비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것이다.
이는 죽산이 스스로 저서를 통해 밝힌 본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죽산은 "우리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다. 행정부나 입법부나 사법부나 그 모든 국가기관이 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또 직접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죽산은 그러면서 "그것을 육성하고 수호할 임무도 우리 국민에게 있는 것이며 그것들이 잘못할 때에 시정하는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죽산은 정치적 책임과 더불어 개인이 지녀야 할 당연한 권리도 강조하면서 "정치적 자유는 국민의 실력과 노력과 투쟁으로서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고 결단코 남의 긍휼(矜恤)의 선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 조봉암 선생의 책은 자유라는 날줄에 평등이라는 씨줄을 짜내고 사랑이라는 끈으로 엮어 꾸민 것으로 조민 연구원은 평가했다. ⓒ 이정민
죽산 조봉암의 메시지... '평행이론'?
죽산은 저서를 통해 민주주의 수호와 발전의 필요성, 무질서한 권력 남용의 폐해, 민주와 반민주의 본질 규명, 민주진영 정제의 필요성 등을 역설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단결하고 화합하여 억압받고 고통 받는 민중의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대목이다. 즉 민주를 표방하고 있는 정당 간의 반목과 갈등을 봉합하고 오직 민중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동일방향으로의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된다는 사상이다.
죽산은 "우리끼리는 설혹 의견의 차이라든지 감정의 대립이라든지 정책적 차이라든지 이념적 대립이라든지 모두가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중대성에 비해서는 지극히 적고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결국 죽산은 저서를 통해 거시적인 정치 담론이나 주류 사회의 왜곡된 문화를 바로 잡고 관념적인 희망론에서 벗어나 민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본질의 정치, 현실의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며 대중의 각성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죽산은 '민중은 물이오 정부는 그 속에 사는 고기'라는 말을 통해 깨끗한 물속에서는 고기의 생명이 길지만 혼탁한 물속에서는 고기가 질식돼 죽게 될 것을 넌지시 표현한다. 즉 민중들 스스로 자각과 자성, 불편부당함에 대한 공정한 비판정신을 가지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당시 사상적으로 첨예한 갈등과 독재정권의 혹독한 탄압이 있었음에도 죽산이 직접 전한 메시지가 전 민중의 대오각성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심히 놀라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죽산이 동시대에 고민했던 갈림길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혹자는 유신의 부활, 독재의 회귀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작금의 시대를 일갈하는 풍토가 평행이론 위에 서 있는 듯하다고 한다. 죽산이 당시 심경을 토로하며 써내려갔던 '우리의 당면과업'은 다시 우리의 가슴을 촉촉히 적시며 무언의 행동을 지시하는 것은 아닐까.
조민 연구원이 언급했듯 한 시대를 풍미하며 한국현대사에서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다가왔던 죽산 조봉암 선생의 민족애와 혁신정치의 이상은 이제 현실정치에서 녹아내려 다시 국민을 일깨우는 희망의 메시지로 점철되려 하고 있다.
"무릇 민주주의 정치라는 것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초라한 한 사람의 주장과 요구라도 선명히 나타낼 수 있고 또 그것을 다른 사회성원에 의해서 정당하게 평가되는 길을 열고서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정민 기자는 국회 문병호 의원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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