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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형체 못 갖춘 '칠삭둥이' 한명회, 버려질 뻔했다

[참모열전 11회-한명회①] 궁궐지기가 어떻게 실세가 되었을까

등록|2014.02.10 08:34 수정|2014.02.10 09:13
조선시대 역대 참모 중에서 한명회처럼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은 드물다. 그는 궁궐 관리소장에서 하루아침에 궁궐의 실세로 떠오른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 그가 별서(별장+농장)인 압구정에서 화려한 연회를 즐기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지만 한명회는 죽은 뒤 17년 만에 부관참시를 당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는 이유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임금은 한명회의 사위였다. 연산군의 어머니가 한명회의 딸이 아니므로 한명회와 연산군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하지만 한명회의 사위의 아들이 연산군이므로, 넓게 보면 연산군도 한명회의 외손자였다. 이렇게 보면 한명회는 외손자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 셈이다. 이처럼 한명회는 격상되고 격하되는 과정이 모두 다 드라마 같았다.

기막힌 타이밍

▲ 1990년대 드라마 <한명회>. 배우 이덕화 씨가 한명회를 연기했다. ⓒ KBS prime


한명회는 능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그 능력은 안정기보다는 불안기에 더 잘 맞았다. 조선 전기 학자인 서거정의 <사가집>이란 문집에 따르면, 한명회는 친구인 권람에게 "학문과 도덕은 내가 너한테 양보하겠지만, 정치만큼은 내가 왜 양보하겠느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학문·도덕적 능력은 자기가 떨어지지만, 정치적 능력만큼은 앞선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학문적 능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출세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학문을 바탕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웬만해서는 출세하기가 힘들었다. 한명회처럼 학문·도덕적 능력은 취약하면서 정치적 능력만 탁월한 사람은 전형적인 소인배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한명회는 행운아였다. 만약 그의 시대가 안정기였다면, 그는 과거시험의 벽에 부딪혀 활로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시대였다면, 음서(특채)를 통해 관직을 받는다 해도 공직 사회의 비주류에 머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역사에 등장하기 직전은 '다행히도' 불안기였다. '다행히도'란 말은 한명회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에는 후계자 시스템이 매우 불안했다. 왕이 후계자를 지명해도 왕자들이 좀처럼 승복하지 않았다.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및 제2차 왕자의 난이 이런 분위기를 증명한다. 이런 불안함은 제4대 주상인 세종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건강이 허약한 제5대 문종이 사망하자, 동생들인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왕권을 엿본 데서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때는 한명회가 역사에 등장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한명회가 등장한 시기는 후계자 시스템이 불안정해서 어느 왕자라도 힘만 있으면 왕이 될 수 있고, 그런 왕자만 잘 잡으면 출세의 동아줄을 잡을 수 있는 때였다. 한명회가 빛을 본 것은 이런 불안정한 정치환경 덕분이다. 공부 잘하는 사람보다는 정치력 좋은 사람이 출세할 수 있는 시점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명회가 수양대군과 함께 정권을 잡은 뒤로 후계자 시스템이 안정되어 더는 이런 문제를 놓고 군사행동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후계자 시스템이 안정되기 직전에 등장한 셈이다. 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그는 궁지기 즉 궁궐 관리소장으로 인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머리에서 빛이 나니 귀하게 될 징조"라더니...

▲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 그림 출처: 도록집 <겸재 정선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 ⓒ 국립중앙박물관

한명회는 제3대 태종 때 출생했다. 할아버지는 개국공신인 한상질이었다. 따라서 그는 명문가 자제였다. 하지만 출생 직후 그의 운명은 명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두에서, 한명회는 인생 자체가 롤러코스터 같았다고 했다. 출생 당시에도 그러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잉태 7개월 만에 사지가 덜 자란 상태에서 어머니 뱃속을 빠져나왔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위인전인 <명신록>에서는 "태어난 지 몇 해 만에 형체가 갖추어졌다"고 했다. 출생 당시에는 사람의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신생아의 모습을 보고 놀란 집안 사람들은 처음에는 아이를 버리려고 했다. 다행히, 유모로 내정된 여인이 솜으로 아이를 싸서 밀실에 숨겨 두었다. 유모는 아이가 좀 자란 뒤에 집안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유모가 아니었다면 한명회는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는커녕 세상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한명회는 태어날 때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성장 과정에서는 어른들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꼬마 한명회는 골격이 특이하고 뛰어났으며 귀티를 풍겼다.

과거 수험생 시절에 한명회는 개성에 있는 영통사란 절에서 공부했다. 이때 그곳 스님이 그를 보고 "당신의 머리 위에서 빛이 나니, 이것은 귀하게 될 징조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한명회는 출생 당시와 달리 신체적으로 탁월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고시생이 스님으로부터 "당신 머리에서 빛이 나니 귀하게 될 징조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고시생은 이 말을 고시 합격에 관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어쩌면 한명회도 자신이 곧 과거시험에 급제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켜 피를 봐야만 귀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한명회는 그 스님을 오래도록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소과(小科), 즉 제1단계 과거시험인 생원 선발시험이나 진사 선발시험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1단계를 통과해야 대과(大科), 즉 제2단계 과거를 볼 수 있고, 제2단계를 통과해야 출세 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제1단계도 통과하지 못했으니, 그 스님의 신통력에 대해 그는 끊임없이 회의적인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궁궐지기에서 살생부 쥔 사람으로 인생역전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한명회는 권람에게 '학문과 도덕은 양보할 수 있지만 정치는 양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나도 마음만 먹으면 공부를 잘할 수 있지만'이란 말로도 들린다. 하지만 이것은 솔직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서른 후반이 되도록 제1단계 과거에도 붙지 못했다. 학문과 관련해서 남한테 양보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겨우 얻은 관직이 궁지기였다. 개성에 있는 이성계의 사저인 경덕궁을 관리하는 경덕궁지기였다. 요즘 말로 하면 전임 대통령 사저 관리소장 같은 자리였다. 그나마 국가유공자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그런 자리에 특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궁지기는 궁궐 수위 같은 자리가 아니다. 궁궐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자리였다.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이것은 주상이 직접 임명하는 자리였다. 이처럼 궁지기는 그렇게 높지도 그렇다고 아주 낮은 관직도 아니지만, 이 글의 끝부분에서는 이 점을 무시하고 약간의 과장을 보탠 문장이 나올 것이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한명회가 경덕궁지기에 임명된 때는 38세 때였다. 집안 돈을 써가며 절에까지 가서 고시 공부하다가 뒤늦게 궁궐 관리소장에 특채됐으니, 직책의 고하를 떠나 그가 자존심의 상처를 적지 않게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정말 학문과 도덕을 남한테 양보했다고 떠벌릴 수 있을까?'라며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한명회가 경덕궁지기에 임명된 해는 1452년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듬해에 정권의 핵심 실세로 일약 부상한다. 1453년에 일어난 수양대군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에서 그는 살생부를 들고 조선 정계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로또 1등보다 훨씬 더한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과장을 좀 보탠다면, 한명회는 경덕궁에서 '티켓'을 발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불과 1년 만에 경복궁에서 생과 사의 입장권인 살생부를 나눠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 1년 사이에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음 주 2부에서 계유정난 직전과 계유정난 당시의 한명회를 추적해보자.

▲ 한명회가 살생부를 ‘끊어준’ 장소인 경복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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