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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침입자의 무공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 14] 심문(3)

등록|2014.02.07 11:50 수정|2014.02.07 11:50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관조운은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당연한 정도의 기밀을 굳이 물어볼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이자들은 혹시 내가 알고 있을지 모를 무언가의 비밀을 캐려고 하는 모양이다. 스승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들이 필요한 무엇인가가 스승님과 함께 묻혀버리게 되자 나를 통해 억지로 캐내려고 하는 것이겠지.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일운상인은 금의위의 도독(都督)과 여러 번 만난 사실이 있었어."
"그런가요? ……그게 언제 적 일이죠?"

관조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십육 년 전이야."
"십육 년 전이라면 나는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스승님을 만난지 십이 년 됐으니까요."
"이봐,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냐?"
"아니, 그럼 알면서도 뭣 때문에 저한테 물어보는 것입니까."

관조운이 항의하듯 눈을 치떴다.

"내가 얘기하는 건 일운상인이 금의위 도독(都督)과 만났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주목하는 건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금의위의 도독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는 것일세."
 "그 사실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께서 그에 관해선 저에게 일언반구도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스승님께서 황까지 가시려면 최소한 보름에서 한 달의 여정이 필요할 터인데, 내가 알기론 최근 몇 이년 동안 스승님이 그 정도로 길게 외지로 출타하신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소."

예진충이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운상인이 순천부(順天附: 북경) 도성(都城)까지 갔다는 게 아냐, 금의위에서 사람이 몰래 왔다는 것이지."

관조운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관조운 자신이 스승님의 저택에서 지내지 않은 한 누군가가 남모르게 스승님을 만나고 가는 것 까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관조운이 할 말을 없다는 듯 가만히 있자 예진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운상인이 금의위에서 새로 편찬 중인 무예도감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지. 비천문의 무공이 금의위의 새로운 무예서(武藝書)에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이 과정에서 태허진인의 무극진경 요결이 거기에도 적용되었냐 하는 걸세."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나는 무극진경의 '무'자도 들은 적이 없고, 스승님께서도 금의위와 관련되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오. 나와 스승님의 관계는 무가 아니라 문의 관계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오."

예진충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눈썹을 모았다. 그의 누에 같은 눈썹이 살아서 이마 위를 조금씩 기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금의위나 당신들이 관계하고 있는 동창이나 다 같은 황궁 소속이 아니요?'"

관조운이 예진충의 침묵을 기다리다 마침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것까진 알 필요 없네."

예진충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관조운은 황궁 내 감찰조직과 군 조직 간의 암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무극진경의 소재를 추적하는 것은 어쩌면 서로 상대편에게 이 비급에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내 수십 년 동안 잠잠했다가 스승님이 갑자기 피습 당하자마자 수면에 떠오르는 건 무슨 연유일까.

"좋아, 여태까지는 자네가 모른다고 쳐. 이거 하나 만은 부인하지 못하겠지?"

관조운을 지그시 노려보며 예진충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뭐요?"

관조운은 또 무슨 꼬투리인가 싶었다.

"일운상인이 운명하기 직전 자네와 무슨 얘기를 나눴다는 데, 그 내용이 뭐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론 답하지 말기 바라네. 심각한 내용이라는 건 우리도 알고 있으니까. 그 늙은이가 위독한 가운데서도 자네를 찾았고, 자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자마자 숨이 넘어갔다는 건 그만큼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방증이지."
"……."

"자, 말해. 이건 단순히 강호의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냐, 황실의 일과 관계되는 거고. 이 일이 잘못 풀리면 역모로까지 번질 수가 있지." 

역모? 이 한마디가 갖는 충격은 대단하다. 자칫 잘못해 역모로 몰리면 삼대구족이 멸한다. 형수와 섭월은 물론이고 관가장의 충직한 하인들까지 죽어나간다.

그러나, 그러나. 황실의 권력을 두고 암투와 음모, 배신으로 점철된 이런 자들을 위해 스승님이 유언을 남긴 것은 아닐 게다. 관조운 자신도 스승님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는 모른다. 사실을 알려준들 이들이 자신을 말을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말고 분명한 내용을 말하라고 다그칠 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스승님이 운명하시기 직전 자신에게 전한 말이 있다는 건 이 자들이 어떻게 알까. 넘겨짚기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시 비영문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새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침상 곁에서 스승님의 말을 귀에 대고 들은 사람은  그 자신 밖에 없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누구도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부인한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황궁의 감찰조직이라 한들 증거가 없는 데도 무턱대고 역모로 몰 순 없을 것이다. 우리 가문이 비록 이대에 걸쳐 관직과 인연이 없었다 하더라도 증조부, 조부 대에 걸쳐 관직의 가지가 무성했고 그 뿌리가 아직은 말라 있지 않다. 호락호락하지 말자.

조부는 환관들의 모함에 굴하지 않았고 아버님은 벼슬을 탐하지 않는 것으로 지조를 지켰다. 나는 이제 관가장의 장자(長子)이고 청량서원을 이끌어야 한다. 의리와 기개는 우리 관가 가문의 기둥이다. 남아의 일언은 천금과 같은 무게. 더구나 스승님의 유지가 아닌가. 스승님의 유언을 궁궐의 모략가와 그들의 하수인 따위에게 발설해서는 안 된다.

"강물과 우물은 물길이 서로 다르거늘, 황실의 일과 강호의 일어 어찌 얽혀든단 말이오.   스승님은 강호의 무인, 혹시 귀하들의 오해가 있는 건 아니오?"
"흐흐흐, 누가 서생이 아니랄까봐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구먼. 긴 말 말고, 일운상인이 임종 직전에 한 말이나 실토하지."

예진충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좋소, 말하리라. 임종 직전 스승님이 나에게 남기신 말은, 그저 뒷일을 부탁한다고 하셨소."
"그 뒷일이라는 것을 알고 싶네."
"그러니까……, 장례를 잘 치르고, 가산을 정리해서는 그 재산을 내가 가지라고 하셨소."

예진충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면서 눈썹이 황하의 파도처럼 굼실댔다. 

"이봐, 그 따위 유언을 하려고 자네를 애타게 찾은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당신들에겐 그 따위라고 할진 몰라도, 돌아가신 분에겐 중요한 일이오. 누구나 생을 마감하는 입장에선 깨끗한 뒷정리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소?"

관소운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답이 너무 자연스레 나와 상대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싶었다.

예진충을 입을 꾹 다물고 눈 앞의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네는 우리 은화사를 너무 쉬이 보는 것 같네."

예상과 달리 예진충은 조용히 말했다.

"언젠가는 불게 되고, 결국에는 밝혀지고 말 것이네. 관 공자."

다시 호칭이 붙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표정은 싸늘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귀하가 궁금한 사항에 대해 제대로 답변은 못 해드렸지만, 이제 저와의 볼 일이 끝났으면 가도 되겠는지요."

관조운이 짐짓 일어서려 하자,

"안 돼!"

예진충의 눈썹이 불끈하며 목소리가 끊어지듯 나왔다. 이어 뒤에 서 있던 섬서괴도 척숭이 한발 앞으로 나왔다. 반사적인 동작이지만 사뭇 위협적이다. 상관의 반응에 언제라도 공격적인 태세를 갖추는 건 무인들의 속성이다.

갑자기 소리 지른 것이 머쓱했던지 예진충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좀 더 조사할 것이 있으니 귀가는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소."

관조운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무슨 감률(勘律: 죄인에게 해당하는 법 조항을 적용함)로 나를 이곳에 가둬놓는단 말이오. 일개 서생에 불과한 나를 귀하들이 잡아놓을 이유는 없소."

예진충은 관조운의 항의를 무시하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동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자를 다시 포박해."

사동화가 다시 포승줄을 들고 한발 나서는데, 문 밖에서 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어 문을 두드리며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총관 어르신, 급한 일이옵니다."
"무슨 일이냐. 들어와서 보고해!"

문이 열리며 경장 차림의 사내가 급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저어, 우리 요원 한 명이 당했습니다. 침입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야? 누가 감히 우리 은가(隱家)에."

예진충이 급히 일어나자 그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장검이 의자에 부딪쳐 캉, 하는 소리가 났다. 예진충이 의자를 밀어 나갈 듯하다가 척숭을 바라보았다. 척숭이 고개를 까닥하며 명을 받는다는 의미로 포권을 하고는 보고를 한 사내와 같이 나갔다.

예진충이 다시 의자에 앉아. 이번에는 관조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너를 구하러 오는 자가 있냐, 라고 추궁하는 것 같다. 관조운은 무슨 일인가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척숭이 나간 후 불과 일촌도 안 돼 다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다.

"예 총관님, 침입자의 무공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저희 요원 셋이 일 초(抄)에 당했습니다."
"뭐야, 일격에? 제갈진(諸葛珍)은? 제갈진도 일격에 당했단 말이야?"
"네, 가슴에 한 칼을 맞았는데 절명했습니다."

척숭이 짧게 답했다.

"허어, 소주칠검(蘇州七劍))의 하나라는 작자가 그렇게 쉽게 당해. 강호인의 허명(虛名)은 도대체 고쳐지지 않는구먼. 쯧쯧"

그는 요원이 살해당한 것보다 그렇게 쉽게 당했다는 게 못 마땅한 것 같았다.
예진충이 일어나서 허리에 찬 검을 풀고는 손에 쥐었다.

"내가 가지."

예진충이 앞서자 척숭이 뒤를 따랐다. 문간에 있던 사동화가 예진충을 향해 물었다.

"이 자를 어떻게 하죠?"
"자네까지 갈 필요는 없어. 내가 올 때까지 이 작자나 지켜."

예진충과 척숭이 나가자 사동화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 자를 어떻게 할 까요? 총관 어른."
"규정대로 해!"

문이 닫히며 예진충의 대답이 확실치는 않았지만, 관조운은 그 말이 혐의자에게 가해지는 최후의 명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척숭이 황급히 예진충을 데려가는 것만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덧붙이는 글 # 미리 보는 다음 회

그는 본채의 정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중앙의 거실에 앉아 있던 사내 둘이 뭐야! 하고 소리쳤다.
동시에 하나는 장검을, 다른 하나는 폭이 넓은 박도(朴刀)를 허리춤에서 치켜들었다.
장검과 박도, 동시에 내지르는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선…….

-연재는 월, 수, 금, 주3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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