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 석현이와 오른쪽 성찬이가 만난 직후 차안에서2년 만에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나 좋아하는 모습 ⓒ 허우범
잠을 자려던 아이가 침대에서 묻는다. '아빠! 석현이를 어디서 봤다고 했어요?' 평소처럼 밝고 편안한 음성이 아니다. 슬픔이 느껴지는 물음에 '회암동이었는데… 왜 그러니?'라고 대답했다.
일여 년 전 차를 몰고 회암동을 지나다가 석현이를 보고 둘째 아이에게 전해준 적이 있다. 그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아이가 이제 그 장소를 묻는 걸 보니 석현이 생각이 났나보다. '회암동이면 어디에요? 회암사지 있는 곳이에요?'라며 다시 묻는다. 동두천 왕방산으로 가는 길에서 천보터널 지나기 전 밑에 있는 동네라고 일러주었다.
잠시 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삼키려던 울음을 견딜 수 없었는지 오열하던 아이가 울먹이며 말한다. '엄마, 석현이 이름이 왜 왕석현인 줄 알아?', 그리곤 다시 '으앙~'하고 운다. 그날 밤 아이가 전해준 말이다. 진짜이름은 '왕석현'이 아니라 '석현'이란다. 왕따를 당하다보니 동네 형들이 '왕따'의 '왕'자를 이름 앞에 붙여 '왕석현'이라고 불렀는데 그 호칭을 들은 사람들이 '왕석현'으로 아는 거란다. 이 말을 하고는 석현이가 그립고 안쓰러웠는지 또 운다. 너무 울면 몸이 힘드니 석현이를 찾으러 회암동에 가자는 약속을 해주고는 재웠다. 둘째는 잠들기 전 옛 친구들이 생각나 친구가 그립다며 울었던 경험이 몇 번 있다.
▲ 왼쪽 석현이와 오른쪽 성찬이왼쪽 석현이와 오른쪽 성찬이가 만난 후 롯데리아에 가서 ⓒ 허우범
십일쯤 지났을 때 모처럼 둘째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었다. 실내 놀이터에 가고 싶어 해서 덕정동의 한 놀이터를 찾았다. 아이가 즐겁게 놀고 있는데 아내가 석현이 이야기를 꺼낸다. 약속도 했었고 회암동도 가까우니 석현이를 지금 찾으러 가는 것이 어떤지 아이에게 물었다. 십분만 놀고 간다더니 마음이 바뀐 듯 바로 가잔다. 오후 4시 즈음이었지만 무엇이 급한지 겨울 해는 서산으로 도망치듯 기울어가고 있었다.
회암동은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큰 사찰 회암사지가 있는 동네이다. 회암사지 서쪽으로 군부대와 공장들이 즐비하고 사이사이에는 주택들이 들어서있다. 시골냄새가 물씬 풍겨나지만 지름이 수 킬로미터나 되니 작은 마을은 아니다. 해 넘어갈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늦은 겨울오후에 '동' 이름만 알고 아이를 찾기란 쉬운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와의 약속을 지켜야했기에 가는 길이었다.
덕정동을 벗어나 회암동으로 차를 몰았다. 혹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심에 천천히 마을로 들어서고 있는데 오른쪽 개울 건너 새롭게 단장한 천보제일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교회 앞으로 한 아이가 애완견을 데리고 걸어가는데 낯설지 않아보였다. 주의를 기울여 확인해보니 석현이가 틀림없었다. 회암동에 들어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둘째가 그리워하던 친구라니. 가까이 가서 차를 세우니 어리둥절하던 아이가 알아보고 놀라는 눈치다. 무언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둘째가 석현이를 만난 건 3년 전이다. 당시 그 아이는 아빠 없이 엄마와 함께 구옥 단칸방에서 월세로 살았다. 가족 하나가 더 있었다면 삼촌이라고 부르는 젊은 남성이다. 아이는 삼촌이 무서워 눈치를 보곤 했다. 둘째아이가 처음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져있었고 장난감이 없어 손으로 만든 망치 장난감으로 놀았다고 한다. 초등 1년생임에도 불구하고 활동성이 커서 1~2킬로미터 정도는 어렵지 않게 걸어 다니곤 했다. 어디에서나 인사를 잘해서 지역주민들은 아이를 거의 다 알고 있었다. 형들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친구들이 놀려도 늘 긍정적 표현을 하던 아이였다. 많은 시간을 함께 놀았던 둘째는 석현이를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 석현이와 성찬이왼쪽 석현이와 오른쪽 성찬이가 만난 후 롯데리아에서 ⓒ 허우범
그렇게 일여 년 어울렸던 친구를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십일 전 침상에서 석현이를 만나게 해달라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 소리에 잠든 엄마가 놀라서 깨었으니 얼마나 간절했던 것일까? 구한 것이 응답되어져서 그런지 한적한 마을길에서 만난 아이와의 마주침이 경이롭다. 석현이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다. '성찬'이 이름은 잊었지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할머니와 버스를 타고 전에 살던 우리 집을 몇 번이나 찾아갔었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7~8킬로미터나 되는 덕계동까지 찾아가려고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가지는 못했단다. 두 아이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을 감동시켰나보다. 다시 만나 옛이야기를 하던 중 석현이가 말했다.
"'왕석현'이라고 놀려도 괜찮아! 나는 '왕석현'이 아니라 '석현'이니까."
▲ 석현이와 성찬이가 만난 장소두 아이가 만난 장소 천보제일교회 전경 ⓒ 허우범
덧붙이는 글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나 자기충족적 예언처럼 마음에서 그리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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