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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앞둔 아현고가도로, 마지막으로 걸었다

[현장] '46살' 아현고가도로 철거 결정... 8일 시민 걷기 행사 열려

등록|2014.02.10 15:07 수정|2014.02.10 15:07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걸어 보았던 아현 고가도로, 철거 전 마지막 모습이다. ⓒ 김종성


국내 최초의 고가 차로인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고가도로가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지난 8일 철거 전 마지막으로 시민들이 아현고가도로를 추억하며 걸어볼 수 있는 행사가 열렸다. 1990년대부터 이 고가도로를 지나 다녔던 기자도 작별인사를 나누러 가보았다.

고개(애오개)와 다리(굴레방 다리)가 있던 아현동 마을 위로 국내 최초의 현대식 고가도로가 생기고 얼마 후 땅 밑으로는 지하철이 지나가게 됐다. 아현고가도로가 개통된 것은 1968년 9월이었다. 같은 해 봄에 공사를 시작해 불과 7개월 만에 개통을 했다니 일사불란, 속전속결 하는 군사정권 시절에 어울리게 정말 빨리 지었다.

시청~아현~신촌을 잇는 길이 939m 왕복 4차로의 아현고가도로와 작별하는 기분은, 진부하지만 '시원 섭섭'했다. 반세기 가까이 시민의 다리가 되어주고, 경제발전의 상징이자 속도와 효율의 상징이었던 도로가 46년간의 임무를 다하고 철거된다니 섭섭하다. 커다란 기둥들이 길을 막고 서 있고, 상판이 하늘을 덮어 가뜩이나 삭막한 도시를 더욱 우울한 거리로 만들었던 고가도로가 사라지니 시원하다.

'빨리 빨리!' 논스톱 차로, 고가도로

▲ 1968년 아현 고가도로가 생길 당시 신촌 , 대현동 방면의 주변 풍경. ⓒ 서대문구청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서울의 20세기는 고가도로의 전성기였다. 도심 외곽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주요 통로마다 고가도로가 건설됐다. 유동 인구와 물류가 증가하는 양적 성장의 시대에 고가도로는 근대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아현고가도로 이후 서울에는 101개의 고가도로가 건설됐다.

당시 경제성장의 동력은 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옷, 신발, 가발 공장과 같은 경공업이었다. 도시에는 공장이 들어서고 일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몰리기 시작했다. 도시집중화 현상이 빠르게 일어났다. 사람이 몰리는 만큼 차도 늘어났다.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물류 이동도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당시 서울의 도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교통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갑자기 늘어난 차량들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도로를 늘려야 했다. 그 방법으로 고가도로가 선택된 거다.

"도로 위 공중에 939m짜리 4차로 길, 내일을 딛는 거보(巨步), 논스톱으로 달리는 자동차 행렬이 장관"
"거추장스런 땅 위를 피해 높다란 공간을 짚어 터놓은 고가도로가 지상도로에 도전장을 낸 것"

이 거창한 표현들은 아현고가도로 준공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차도에 대한 놀라움과 기대감을 잘 나타낸다.

이렇게 당시 서울 시민들에게 고가도로 건설은 다소 충격이었다고 한다. 도로 위에 다리를 놓는다는 걸 상상도 못하던 시절, 언덕배기 동네 아현동에 고가도로를 만든다니까 이해를 못했다고. 기자의 생각에도 '차가 많아지면 도로의 차선을 더 늘리면 되지 왜 굳이 힘들게 도로 위에 다리를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8일 아현고가도로 걷기 행사 중 만난 장년층의 아저씨들 가운데 머리가 희끗한 한 분이 기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1960년부터 시작된 근대화, 고속 성장의 과정에서 당시 우리 사회에는 '빨리 빨리'가 최고의 덕목이었다. 신호도 없이 정체도 없이 그대로 쭉 '논스톱(Non-Stop)'으로 달릴 수 있는 고가도로가 당시의 시대상과 맞아 떨어진 거다.

'사랑의 다리'가 된, 추억의 느림보 고가도로

▲ 중장년층엔 새삼스럽고, 젊은이들에겐 새로웠을 옛 시절의 풍경이 담긴 흑백사진. ⓒ 김종성


이렇게 논스톱으로 쭉 달리기 위해 만든 고가도로는 기자가 사랑을 얻기 위해 중고차를 장만해 달릴 때인 1990년대엔 '느림보 굴레방 다리'로 불리곤 했다. 50km의 제한속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폭증한 차량들로 인해 아현고가도로가 그만 상습 정체구간이 된 것이다. 당시 신촌에서 퇴근한 여자친구를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는데, 아현고가도로를 지나자면 오래도록 차에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습 정체 고가도로가 오히려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해준 것이다.

저녁 무렵 거의 주차장이 된 고가도로 위는 공중에 높이 떠 있어서 그런지 아늑한 기분이 들어 오붓하게 정담을 나누기 좋았고, 중세의 성처럼 솟은 교회들과 그 옆으로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아현동 언덕동네 풍경도 정다웠다. 그 시절 사랑했던 여자친구의 얼굴은 이제 감감하지만, 겨울날 내린 흰 눈이 이불처럼 포근하게 쌓인 달동네 골목 야경은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게다가 보통의 고가도로라면 도시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아현동의 높은 고개 덕분에 아현 고가도로는 도시의 변화하는 풍경을 '마주보게' 되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특이한 고가도로였다. 8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가도로 위를 걷는 시간, 하늘을 가리는 아파트와 주상복합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는 사이로 옛 언덕 동네의 풍경이 남아 있어 오랜 친구를 만난듯 반가웠다.

고가도로만큼이나 오래된 아현시장, 가구 거리, 작은 술집들도 여전하다.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킨 덕택에, 고가다리가 철거되면 주변 상가들의 사정이 좀 나아질 거라는 소식이다.

▲ 여친을 바래다 주는 길에 매일 보았던 고가도로 위 옛 풍경이 아직도 남아 있어 반가웠다. ⓒ 김종성


참고로 아현 고가다리를 굴레방 다리라고도 불렀는데 두 다리가 가까이에 이웃해 있어서 혼동해서 사용했던 것 같다. 굴레방 다리는 북아현동에 위치했던 것으로, 지금은 도로에 덮여버린 개천인 창천에 있던 다리였다. 굴레방은 '소와 말의 굴레를 벗기던 곳'이라는 뜻이다. 아현동의 옛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현고가다리 걷기 행사에 참여하러 나온 시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보니 1960~1970년대 풍경이 담긴 흑백 사진전을 하는 곳이었다. 1968년 아현고가도로가 생겨날 때의 사진은 물론 주변 동네와 사람들 사진이 낯설고 새로워, 어른들은 물론 젊은이들과 아이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진을 감상했다. 언덕 위로 게딱지 같은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신촌 일대와 직사각형의 네모반듯한 자동차들은 내가 봐도 신기했다.

감회 어린 눈으로 때론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쳐다보던 백발의 아저씨에게 이곳에 무슨 추억이 있냐고 여쭈어보았다. 자동차로 휙 지나가던 고가다리에 무슨 추억이 있겠냐던 아저씨는, 눈을 한 번 찡끗 감더니 고가다리 아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귀가하려다 당시 있었던 통금시간에 걸리면 경찰관이 없는 이 아현 고가다리 위로 올라왔단다. 심야엔 고가다리 위에서 아저씨 같은 술꾼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택시들이 지나갔다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고가도로들

▲ 고가도로를 지나갔던 할아버지와 새로운 도로를 지나갈 손자가 함께 고가도로 위에서 어울려 놀고 있다. ⓒ 김종성


고가도로는 당시 시대 가치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도심 속의 고속화 도로, 도심의 주요 지점을 빠르게 연결해 주는 간선도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가도로는 철거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철거된 서울 도심의 고가도로는 15개. 이렇게 고가도로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이유는 서울 교통 정책의 기본 틀이 변했기 때문이다.

교통 정책의 방향이 차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고가도로를 건설할 당시 교통 정책은 차가 중심이었고, 고가도로로 인한 분진, 환경오염, 주변 상가 피해, 도심 미관 훼손 등은 외면당했다.

서울시는 2009년 12월 '고가 차로 철거 추진 계획'을 통해 과거의 자동차 중심 교통 정책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의 교통 정책으로 전환하고, 자동차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고가도로를 철거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후 15개의 고가도로가 철거됐고, 아현고가도로는 16번째로 철거되는 고가도로다. 현재 서울시에는 86개의 고가도로가 설치돼 있는데, 서울시는 앞으로도 이 도로들을 점차 철거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시는 3월까지 아현고가도로 철거를 완료하고, 고가도로 탓에 단절된 버스전용차로(신촌로∼충정로 구간)를 연결, 8월 초 개통할 계획이다. 더불어 철거한 아현고가도로의 교명주(교량 이름을 새겨 놓은 부분)와 표지판 등 상징물을 서울역사박물관에 보존하고 철거 과정을 담은 백서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아현고가도로 철거가 속도보다는 삶의 질을, 성장과 개발, 자본의 이익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고가도로 밑에서 빛을 못보았던 시장, 상가, 가구 가게들의 사정이 나아지게 되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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