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GV 대전 둔산점 2월 8일 오후 6시30분 예매 현황좌석수가 적은 상영관이기는 하지만 꽤 높은 점유율을 보인다 ⓒ 이정혁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울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었다. 내리던 빗방울마저 눈발로 바뀐 잿빛 하늘, 마음속 손수건은 서서히 습기를 머금어 간다. 그리고 오프닝 크레딧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 그녀의 한줄짜리 대사에, 잔잔히 흐르던 눈물의 강은 범람하기 시작했다. 입사 지원 동기를 묻는 면접관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한줄짜리 대답, 이것이 유일한 스포일러다.
"아빠 차(개인택시) 바꿔주고, 엄마 용돈 주고, 동생 대학 보낼려구요."
▲ 또 하나의 약속 티켓마흔 살 인생동안, 혼자 가서 영화관에 앉아 실컷 울다 나온 첫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 이정혁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이 대사 한줄에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채 피어보지도 못한 스무살의 청춘은 자신보다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원했고, 그녀의 이 소박한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질수 없었음을 알기에, 나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감정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영화는 최루성 신파 영화가 아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끓어오르는 분노는 눈물마저 마르게한다. 영화는 화나고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다.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스크린 뒷편으로 희망의 빛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또 하나의 약속>은 그렇게 내 심장에 빛을 내며 박혀버렸다. 그리고 그 미세한 떨림은 그날 밤, 잠을 뒤척이게 만들었다.
▲ CGV 둔산점 6관의 전경총 좌석수 107석의 작은 상영관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좌석이 들어 찼다. 영화 시작 10분전의 사진이다. ⓒ 이정혁
이 영화를 내 방식대로 정리해 본다. 영화를 보기 전과 보는 동안, 보고 난 후까지 매우 불편한 영화. 영화에 문외한으로써 지루한 프랑스 영화나 킬링 타임용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불편감과는 성격의 궤를 달리하는 불편함이다. 그리고 그 불편감은 사람들이 반드시 느꼈으면 하는 것이고, 불편한 정도에 따라 이 영화가 미치는 파장은 달라질 것이다.
이제 그 불편함을 한 가지씩 나열해 본다.
첫째, <또 하나의 약속>은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아무 상영관에 가서는 볼수 없는 불편함을 가진 영화다. 사전 예약률과 좌석 점유율이 상위에 링크되었지만, 볼 수 있는 기회의 폭은 좁다. 그나마 영화 속 초일류 기업의 광고를 걸지 않는다는 CGV 덕분에 좁은 문이 열리게 된건지도 모른다. 광고 물주 앞에서 알아서 기는 건 영화 속과 영화 밖이 판박이여서, 잠시 혼란을 느끼게 한다. 내가 사는 이곳은 영화 속인가?
▲ 또 하나의 약속극장 내부 홍보 포스터. 당당하게 상영중. ⓒ 이정혁
둘째, 영화를 보는 동안 <또 하나의 가족>을 울부짖는 그들의 '또 하나의 가증'을 알게 되면서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다. 검은 양복을 입은 자들로 표현되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그네들의 역겨운 사고방식이 스크린 전체를 관통하여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이다. 인간성이 결여된, 생명을 그저 쓰고 버리는 부품 쯤으로 생각하는 그 기업의 정서에 분노가 치민다. 순간적으로 주머니에서 그 회사 로고가 박힌 스마트 폰을 꺼내 두동강 내고 싶은 충동이 수차례 든다.
셋째, 그 동안의 무관심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이 불편하다.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평생 모르고 지나갔을수도 있었다. 아니 일부 언론을 통해서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일상의 밥벌이를 핑계로 관심밖으로 말어내고 만 것이다. 영화 속 가슴 아픈 진실은 양심을 파헤치고, 이기를 벌주기에 가슴이 찢기는 듯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더더욱 불편해진다. 지금껏 뭐하고 살았던가?
넷째, 영화 속 공룡기업을 욕하면서도, 그 회사의 제품과 영향력에 길들여진 내 자신의 무력감이 불편하다. 내가 사는 공단 도시도 소위 그 회사의 월급으로 먹고 산다는 지역이다. 회사의 사원증과 사원복은 그 자체로 벼슬이다. 상인들은 회사에 소문 날까 두려워 싫은 내색조차 하지 못한다. 회사가 이전할지 모른다는 풍문은 정치와도 맞물려 자질조차 없는 자들을 선거에 당선되게 만든다. 공룡의 그늘 아래놓인 힘없는 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도 그 어떤 저항조차 하지못할 현실이 너무도 불편하다.
<또 하나의 약속>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불편한 영화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연대와 협력의 손길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불편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봐야만 하는 영화이다.
▲ 또 하나의 약속 엔딩자막.영화가 끝나고, 두레에 참여했던 분들의 명단이 자막으로 흐른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바라보게 된다, 미안해서, 고마워서. ⓒ 이정혁
혹시 그러한 불편감을 회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감히 이야기한다. 삼성공화국에 사는 모든 이들은 언제든 자신도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사회 전체에 뿌리를 내리고, 등뒤에서 태엽장치를 통해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다. 어느 날, 그 거대한 공룡에게 당신이 짓밟힐수도 있다. 그 이유가 오로지 당신의 탓만이 아님을 알면서도, 당신은 도와달라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왜냐면 당신은 이미 불편한 영화를 봐야하는 불편감을 회피했기 때문에.
이러한 불편함을 인식하고, 그 불편함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안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추억'은 매우 재미있고, 잘 만들어진 휴먼 드라마이다.
끝으로, 내 옆자리에서 연신 눈물을 훔치던 초등학교 5학년 학생과 그 아버지의 미니 인터뷰의 내용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먼저, 대전에서 언론 관계 일을 하신다는 40대 중반의 아버님의 소감.
"영화가 잘 만들어졌고, 좋네요. 너무 주제의식만 내세우다보면 무겁고 재미가 없어지는데, 재미도 있고, 구성도 좋아서, 사실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기쁩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밝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두레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그리고 옆에서 진지하게 듣고만 있던 12살 소년의 소감이다.
"대기업이나 회사같은 그런 데에서, 사람들에게 무차별하게 대하고 그런 것에서 화가 났어요.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평소 궁금증이 많아서,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요, 많이 울고 감동받았어요."
이 아이는 삼성 라이온즈의 열혈 팬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대기업이 삼성이라는 것과 그 뒷면에 가려진 추악함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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