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라덴에게 경외를"... 이 남자 어떤가요?
[목수정이 만난 파리의 생활좌파 ⑥] 백발의 게바라주의자 심영길
▲ 알제리 여행 도중 현지의 여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심영길 선생. ⓒ 심영길 제공
그를 만난 건 5년 전이었다. 노회찬 전 의원의 파리 방문이 그 계기였다. 매끈한 용모에 하버드대학교 간판을 휘두른 것으로 부족해 뉴타운 사기까지 동원했던 상대 후보의 농간으로 다 잡은 총선을 놓치고 긴 동면으로 접어들어야 했던 시절, 노회찬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유럽 방문길에 올랐다.
그를 넘어뜨린 부정한 세력들에 대한 분노와 정치인 노회찬에 대한 맹렬한 응원의 불길이 파리 한인사회에 소리 소문없이 번졌고…. 파리 10구, 프랑스노동총연맹(CGT) 강당은 한국청년들로 가득 찼다. 강연장은 호탕한 웃음과 불꽃이 튀는 열정으로 넘쳐흘렀다.
그날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머리에 흰 서리가 내려앉은 한 남자가 있었으니, 심영길 선생이었다. "저토록 잘난 노회찬이 이토록 아픈 패배를 맛보았으니 그의 앞날을 위해 매우 잘 된 일이다. 총선 패배는 더 큰 정치인이 되기 위해 들이킨 약이다. 더구나 그를 안온한 타협으로 주저앉힐 수 있는 자식이 수하에 없으니 그 또한 매우 다행이다"고 그가 감히 말할 때 나는 고개를 치켜들지 않을 수 없었다.
노회찬의 강연이 끝나고, 나는 선생에게 다가갔다. 선생이 내뿜은 비범한 기운에 감응한 내 심장을 살짝 내비쳤다. 이후 당시 진보신당 당원이던 나는 파리 진보신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친구들의 모임에 그를 종종 초대해, 그의 족보를 짐작할 수 없는 독특한 저항의 기운이 어디서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지켜보았다. 우리의 조심스러운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백발의 게바라주의자를 만나다
"종교를 가진 지식인은 머리에 금이 간 지식인이다."
처음 만났을 때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철저한 신봉자인가? 또 하루는 카뮈를 인용해 이런 말도 했다.
"반공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독재정권 시작의 징후다. 남미의 군사정권이 반공을 내걸면서 지식인을 탄압했다. 히틀러도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고, 스페인의 프랑코도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반공해야만 미국의 보호를 받는 메커니즘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에게 카뮈는 인생을 함께해온 동반자였다. 자신을 '카뮈 애호가'라고만 소개해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만큼. 그런가 하면 선생은 빈 라덴에게 아무런 주저도 없이 경의를 바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몇 년 전 처음 이메일 계정을 만들면서 아이디를 'Bin Laden(빈 라덴)'으로 하려다가 아들의 반대로 포기한 바 있다. 또한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체 게바라라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게바라의 행동과 정신을 가슴 한 켠에 밝혀놓고 이 세상을 건너왔다고 했다.
선생의 생각은 한 시대를 풍미하던 혁명가, 행동하는 지성인의 이력을 무덤에 새기고 세상을 떠난 자들의 흔적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았다. 일흔이 넘어서야 참여할 수 있었던, 최초의 대선. 그 모순된 결과를 두고도 그는 우리와 분노를 나누곤 했다.
"박근혜가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했지만, 통일은 숱한 출혈을 감수해서라도 반드시 이뤄야 하는 과제다. 그러나 한국이 감히 통일을 말하고자 한다면 북한을 구축하는 중심 정치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를 인정하고, 공산당을 지금의 새누리당 같은 정당으로 인정하여 적어도 제2 야당 정도의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할 때라야만 가능하다. 남한의 인구가 북한보다 훨씬 많으니 비례의석을 각각의 의회에 배분하는 정도의 배려와 양보를 하지 않고서는 통일을 말할 자격이 없다.
유럽을 보라.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대륙이지만 공산당이 없는 나라가 없다. 공산당이 자체적으로 힘을 잃어 소멸하면 모를까, 강제적으로 그 정치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 전쟁밖에 더 있겠는가."
그의 매섭도록 급진적인 생각은 오래 전 두고 떠나 온 고향 통영에서 전쟁통에 벌어졌고 그가 목격했던 일들이 뿌린 씨앗이었다.
"1950년대 초 교사, 학생 등 수많은 젊은이들이 단지 공산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돌을 매단 채 통영 앞바다에 처박혔다. 30년대 일본의 지식계는 공산사상에 온통 휩싸여 있었는데, 일본에서 유학했던 엘리트 대부분도 자연스럽게 공산주의를 배워왔다. 만일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반공이 국시(國是)가 되는 참극을 한국이 겪지 않았더라면 젊은 지식인들에 의해 공산주의가 자연스럽게 뿌리내리지 않았을까.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이 지긋한 파리 한국교민들의 사상의 시계는 그들이 김포공항을 떠나던 순간에 멎었다. 대부분 '밥 먹고 살게 해준' 박정희에 대한 숭배에 멈춰 있거나, 조금 깨어 있는 사람이라도 공안당국의 시퍼런 감시가 두려워 감히 비판의 시각을 키우거나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몇몇 유학생간첩단사건이 남긴 트라우마이기도 했다. 그러나 심영길 선생은 달랐다. 그의 말들은 단도처럼 날카롭고 강건하다. 대체 그의 세월은 어디서 어떻게 구축된 것이란 말인가?
동대문 시장통 소년, 국방부 정훈국의 사환이 되고...
심영길 선생은 1942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영문도 모르고 맞이한 해방, 일본식 긴 옷을 입고서 동네 사람들이 만세 부르는 것을 지켜보던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통영군청으로 쓰이던,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서양식 건물이 미군관사로 바뀌던 광경도 어린 영길의 뇌리에 남아 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학교는 폐쇄되었고, 학교 건물은 군인병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사환으로 취직해 병실을 오가며 심부름을 했다. 이후 휴전협정이 이뤄져, 통영까지 밀려 내려왔던 피난민들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먹고 살려면 어떻게 해서든 서울로 가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가족도 짐을 꾸려 상경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의사였다. 미군들이 가져온 온갖 양약들이 곳곳에 흘러나와 사람들을 현혹하던 시절, 먹고살기조차 힘든 사람들에게 한의사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누나는 다방에 나갔고, 어머니는 시장통에서 김밥 장사를 하며 다섯 식구가 먹고살았다. 그는 동대문시장을 휩쓸고 다니며 밥 한 끼를 먹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그 시절, 그는 배도 고팠지만 동시에 책에 굶주려 있었다. 시장통을 누비는 와중에도 틈틈이 골목마다 즐비했던 헌책방에서 닥치는 대로 활자들을 집어삼켰다. 시장통은 그에게 밥과 책이라는 몸과 정신의 식량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던 하루, 국군의 날을 제정하기로 한 국방부가 국군의 날 기념 노래 가사를 공모한다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상금은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을 넘는 액수. 그는 당장 도화지 석 장을 샀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열심히 가사를 지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열어젖힐 줄이야.
그해 겨울날, 얼음이 탱탱 언 이문동 언덕 아래에 지프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한 장교가 마침 썰매를 타고 놀던 그를 불렀다.
"심영길씨의 집이 어디냐?"
"제가 심영길인데요."
"아, 네 아버지가 심영길이로구나. 집으로 안내해라."
그는 장교를 집으로 안내하고 다시 썰매를 타러 갔다. 잠시 후 아버지가 근엄한 얼굴로 다가와 그를 불렀다.
"이 군인 양반이 너를 찾는다. 대체 어찌된 일이냐?"
장교가 재차 다그쳐 물었다.
"이 노래 가사를 쓴 사람이 누구냐?"
그제야 그는 사태를 파악하고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국방부장관에게서 상금을 수여받았다. 어린 소년이 영예의 수상자가 된 것을 기특하게 여긴 장관은 그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오고 쥐구멍에 해가 뜨는(?) 동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스토리처럼 장관이 학교까지 보내주는 결말로 이어질 줄 알았건만, 장관의 권세도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대신 그럴듯한 일자리를 제안했다.
"국방부 정훈국에 있는 선우휘 대령이 작가다. 그 밑에서 사환을 하며 글쓰기를 배워라. 그러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녀보면 어떻겠느냐."
그러나 그는 중학교 졸업장이 없어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었다. 국방부 정훈국의 사환이라는, 그 또래가 할 수 있는 일치곤 썩 괜찮은 일자리를 얻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남산에는 한국에서 제작되는 모든 영화의 후속 작업, 즉 편집과 녹음, 믹싱 등이 이뤄지는 스튜디오가 있었다. 불꽃의 작가 선우휘가 대령으로, 영화감독 김수용이 대위로 영화과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그 스튜디오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10대의 후반부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을 뒤바꿀 또 하나의 인연, 카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뮈, 책, 불어... 삶을 바꾼 만남들
16세 소년의 운명을 휘어잡은 것은 을지로의 한 서점에서 발견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뮈의 <이방인>은 1958년 이휘영 교수의 번역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카뮈는 늘 그와 함께했다. 이 단순하고 간결한 소설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안고 다시 태어났다. 난해하지 않고 선명한 글. '속이려 들지 않으면 대화가 간단해지듯', 카뮈의 글이 바로 그러했다.
카뮈와의 만남은 불어를 배워야 한다는 필생의 사명으로 그를 인도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대신, 이휘영 교수가 운영하는 불어학원에 등록했다. 명문고교를 다니는 학생들 틈에서 그는 홀로 학생 신분이 아닌 수상한 수강생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는 수강 한 달 만에 기본적인 문법과 어휘를 모두 터득했다. 두 달째부터는 원서 강독밖에 할 것이 없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이 그가 처음 잡았던 불어 원서다(그때부터 시작한 불어 원서 읽기는 74세인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반복하는 일과다). 주경야독. 낮에는 국방부에서 사환으로 일하고 밤에는 불어를 공부했다.
그 무렵 중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1년 치 월사금을 내면 고교 2학년 2학기 과정으로 편입이 가능한 학교가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간 모은 돈과 누나의 도움을 받아 고등학교에 편입했다. 국민학교만 잠깐 다닌 게 전부여서 기초학습이 전혀 안 돼 있었지만, 그간의 독서량 덕분에 인문 과목만큼은 금세 월등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불어를 열심히 익힌 탓에 영어도 식은 죽 먹기였다. 대학은 불문과로 진학하고 싶었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구구단도 외지 못하는 그에게 수학은 넘지 못할 큰 산이었다. 그러던 중 한국외국어대학교는 입학시험에 수학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바라던 대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 입학했다.
그 한 해 전 고교 3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는 급우들과 함께 거리로 뛰어 나갔다. 대학생들이 먼저 일어섰고, 뒤이어 전국의 고교생이 합류했다. 대학생만으로는 위협적일 수 없었다. 그 수가 미미한 탓이었다. 그러나 고교생까지 가세하자 혁명 세력을 진압하려 나선 군경이 감히 발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미성년인 어린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만큼 당시의 정부는 잔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960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처럼, 심영길 선생은 2013년 12월 19일 부정선거 1주년을 규탄하는 파리 집회에서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기꺼이 자청해서 들고 서 있었다. "대한민국 민중들이… 기어이 이렇게 50년 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그날 많이 울었다"고 말하는 선생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그는 프랑스 외무부 선발 장학생의 자격으로 1970년 유학길에 올랐다. 생후 15일 된 딸과 아내를 한국에 남겨둔 채였다. 당시 그르노블대학교에서 어학 과정 재학 중, 그는 프랑스 도착 2개월 만에 외국인을 위한 불어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너무 빨리 이룬 성취.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현대문학 3학년 과정에 등록했다.
그러나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내가 소식조차 잘 접할 수 없는 남편을 찾아 프랑스로 건너왔다. 얼마 안 되어 둘째까지 들어섰다. 시장통을 누볐던 10대 때처럼, 네 식구의 가장인 학생 아빠는 가족의 생존을 위한 강력한 에너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르노블은 스위스 제네바와 인접해 있는데, 스위스의 급여가 프랑스보다 1.5배 높았다. 학생 신분으로 그는 주저 없이 제네바로 건너갔다. 그가 구한 일은 적십자사와 국제원자력기구의 구내식당 청소부. 남들보다 빠르고 성실하게 항상 싱글거리며 정열적으로 일했다.
젊은 한국남자의 이 비범한 에너지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 그를 눈여겨보던 중년 여인이 일자리를 제안해왔다. 2주 뒤 그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제네바 사무국에 정직원으로 취직했고, 3년간 핵융합 장면을 촬영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마디 덧붙인다.
"어느 자리에 있건 신뢰를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밥벌이의 고단함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책 읽기
그간 저축한 돈으로 9인승 승합차를 마련해 파리로 돌아왔다. 마침 중동 건설 붐을 타고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중동에 진출해 있을 무렵이었다. 몇 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설노동자들은 귀국길에 파리에 들러 일종의 포상휴가를 즐겼다. 아무나 해외에 나올 수 없던 그 시절, 해외여행의 기회를 얻은 극소수의 사람들 대부분이 빠지지 않고 하는 일이 대규모의 쇼핑이었다.
심영길 선생은 1998년 IMF라는 흑사병이 한국사회를 덮치기 전까지 17년간 대형 면세점의 한국부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통역과 가이드하는 일을 했다. 승합차에 관광객을 태우고 프랑스 전역을 누볐다. 1980년대에는 프랑스 정부에 세금을 많이 낸 상위 1퍼센트 안에 들 만큼 돈이 모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사꾼으로 가이드로 낯선 이들과 부대끼던 낮의 소란을 벗어나고 나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언제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그에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주는 유일한 비밀 병기였다.
은퇴한 지금, 그는 여전히 하루에 50쪽 이상의 독서를 삶의 철칙으로 삼고 있다. 일 주일에 이틀은 일찍이 롤랑 바르트와 피에르 부르디외가 명강의를 펼쳤고 지금도 프랑스 최고의 지성들이 강연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강의를 수강한다. 중남미문화원, 아랍세계연구소도 자주 다니며 고결한 사고, 지성인들을 만난다.
"이토록 풍요롭고 아름답고 넓은 세상에 태어나 겨우 이만큼밖에 느끼고 보고 알지 못하고 가는 아쉬움을 덜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올리브 잎새 하나를 물고 창가에 앉아 있는 흰 비둘기처럼 우아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젊은 여자친구가 함께한다.
심영길 선생의 삶은 미국식 성공 스토리의 기승전결 구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미국식 성공 신화대로라면 지금쯤 그는 워런 버핏을 연상케 하는 돈 버는 비법을 전수하는 꾀 많은 노인이거나, 프랑스 지방의회에라도 진출해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여야 할 터다. 그러나 그는 읽고 싶은 책들을 맛깔스럽게 읽어내고, 분노할 일에 분노하며, 행동할 일에 나서서 참여하고, 좋은 포도주가 생기면 친구를 불러 나눠 마시며, 살아 있는 양심을 지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유롭고 단순하게 인생을 즐긴다. 그뿐이다.
젊은 날 무엇을 했건 은퇴한 뒤에는 그저 '은퇴자'라고 자신의 신분을 적으며 그 말이 선사하는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프랑스의 여느 노인들처럼. 심영길 선생은 라 보에시가 말한 것처럼,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인 '자유'를 누리며 배움을 쌓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선생의 대범한 사유들은 삶의 굵직한 이력 속에선 결코 포착될 수 없다. 생애의 굵은 점선들 사이사이 그가 넘겨온 책장들과 여행지에서의 발자취를 통해서 그것들은 차곡차곡 빚어졌다. 인터뷰는 지난달 13일과 17일 두 번에 걸쳐서 했다. 마지막으로 그와 나눈 인터뷰를 남긴다.
- 70년대 프랑스로 유학을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를 했다. 당신은 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게 많아지는 법이다. 여행, 독서, 그리고 연애도 마찬가지. 호기심이 멈추고 앉은 자리에서 축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어른, 잔인하게는 노인이 되어가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특정한 지위에 도달해 점잖게 위용을 빼며 살기보다, 죽는 날까지 이 넓은 세상을 탐닉하고 호기심을 충족하며 읽고 배우면서 최대한 누리기를 바란다."
- 흔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겪고, 젊어서 큰 돈 버는 방법을 알게 된 사람은 부(富)를 향해 끝도 없이 쫓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느 순간 돈에서 자유로운 삶으로 궤도를 이탈한다.
"나한테는 독서라는 금고가 있었으니까. 책 한 권에는 여러 친구가 담겨 있다. 한 달 내 외출을 하지 않아도 심심할 시간이 없다. 항상 주머니 속에 용돈이 넉넉하게 든 것 같은 충만함을 느낀다. 나는 은퇴 후의 삶을 기다렸다. 충만한 시간이 주어지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나도 누구보다 세속의 욕망이 크지만, 동시에 그 욕망의 허망함도 잘 안다. 독서를 통해 욕망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 체 게바라는 언제 처음 만났나. 당신 또래의 한국 남자 중에 체 게바라를 마음속에 품은 사람은 정말 드물다.
"나는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 프랑스 잡지 <파리 마치(Paris Match)>를 정기구독하던 20여 명 중 하나였다. 지금은 우파 잡지지만 당시는 <엑스프레스>와 함께 상당히 신뢰받는 정론지였다. 1967년 10월 7일에서 8일 사이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가 전사했는데, 11월 중순에 배달된 <파리 마치>에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나는 그의 죽음과 동시에 그와 격렬한 첫 만남을 가졌다. 당시 나는 <라이프>, <타임>도 구독했는데, 여기서는 기사 검열이 이뤄져 그의 사망 기사가 지워져 있었다. 불어는 나에게 세계로 열린 창문이었던 셈이다.
체 게바라는 항상 독서를 했다. 볼리비아 상공에서 언제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그가 체포되었을 당시, 스페인 시인의 시를 옮겨 쓴 종이쪽지가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는 잠시라도 한가로운 순간이 생기면 부하들에게 불어를 가르쳤다.
"우리가 적의 압축망을 뚫고 탈출한다 해도 쿠바로 바로 돌아가지 못한다. 안데스 산맥을 통해 칠레를 거쳐 유럽을 지나야만 한다. 유럽에 가면 파리의 밤을 즐길 기회가 올 테니 지금 우리 불어나 배워놓을까"라며. 그는 어떤 순간에도 시적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기질이 있었다. 모든 혁명성에는 낭만성이 깃들어 있다. 체 게바라는 그 낭만성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기려 했다. 카뮈 역시 그러했다."
- 카뮈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Noces(결혼)>. 카뮈의 초기작이기도 한 수필집이다. 지중해에서 펼쳐지는 바다와 땅의 귀로, 그 숨 막힐 듯 혼미해지는 풍경을 담아냈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통영의 바다가 떠올랐다. 카뮈의 숨결을 찾아 틈날 때마다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카뮈를 찾아갔던 알제리에서 나는 사막을 만났다. 이후 15년 동안 매년 사하라 사막을 찾았다. 사막이야말로 나의 비밀스런 정원이다."
▲ 사하라 사막을 앞에 두고 잠시 휴식 중인 심영길 선생. ⓒ 심영길 제공
▲ 카뮈의 초기작 <Noces(결혼)>의 표지. ⓒ Noces
"한국을 떠나 남미, 아프리카, 아랍 등지에서 일어나는 더 모순되고, 더 불의하며, 더 심각한 자본주의의 수탈을 보면서 한국에서 진행되는 불의나 한국정부의 언행 불일치에 관용을 갖게 된 면도 있는 것 같다.
한국어를 잊었다면 한국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국은 잃어 버려도 모국어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지키려 해서가 아니라 결코 지워지지도, 잊히지도 않는 것이 모국어다. 내 두뇌의 모든 의식작용을 표현하고 제어하는 것이 모국어니까. 한국에 대한 사랑보다,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나를 더 강렬하게 한국으로 밀착시켰다.
이토록 강력한 모국어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문화적인 힘을 비롯해 또렷한 정체성을 갖고 세계 한가운데를 질주해 나갈 수 있는 힘의 핵심이다. 보라, 아프리카에는 진정한 모국어가 없다.
그들은 20세기에 구축한 문화와 문명을 그들의 모국어로 기술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은 문학작품을 비롯해 모든 영역에서 활발한 생명력을 발휘하며 자아를 발현한다. 그것은 상당 부분 모국어가 지닌 힘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한국어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이다. 아랍어를 보라. 코란에 정복되어 있지 않은가? 아랍어가 이슬람에 사로잡히기 이전에 그것은 얼마나 자유분방한 어휘였으며, 얼마나 풍성한 문화를 이루었던가."
그에게는 확실히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는 북아프리카나 남미, 중동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에도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의 무게 중심은 지중해 어디쯤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 당신은 빈 라덴에게 경외감을 표한 바 있다.
"나는 빈 라덴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인간형이라 생각한다. 그는 억만장자인데다 사회적 지위도 높고, 수많은 미인들에게 둘러싸인,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간단히 물리고 투사로 살기를 택했다. 아프가니스탄 골짜기에서 소련도 어쩌지 못한 미국을 상대로 무력저항을 했으니 놀랍지 않은가.
빈 라덴은 왜 투사가 되었을까? 분노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소련을 내쫓으면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국가를 세우는 데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빈 라덴 일가는 미국 정부의 말을 믿고 앞장서서 그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의 믿음을 철저하게 배반했고, 빈 라덴은 반미투쟁에 투신했다.
비행기로 뉴욕의 쌍둥이빌딩을 격파한 청년 19명은 대부분 명문가의 자제들로, 1년 이상을 미국에서 상주하면서 조종 훈련을 익혔다. 그들에게 목적을 성취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뜻했다. 그들은 이륙하는 법만 배우고 착륙하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미국처럼 정보망이 잘 구축된 사회에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았고,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다는 점은 대단한 일이다. 그들은 돈을 대가로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을 움직인 힘은 분노였다.
분노의 힘은 매우 정직하고 폭발적이다. 분노는 나를 청춘으로 살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개개인이 오랫동안 품어온 분노는 화폐의 가치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게 하는 유일무이한 힘이다. 자본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분노는 고귀하다. 하지만 분노가 이기적으로 작동할 때는 나를 독재자로 만들 수도 있다. 분노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윌리엄 포크너 등 미국 최고의 지성들이 자국의 제국주의에 극렬히 저항했다. 내가 어려서 옥수수가루 좀 얻어먹었다고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북한이 3대 독재 세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는 있지만,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들을 높이 평가한다."
- 지난 연말, 당신은 한국정부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한국정부에 대한 반정부집회에 참석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나?
"국적상 나는 여전히 한국인이지만, 대통령선거 때 투표를 한 것은 지난 선거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한국정부에 대한 반정부집회에도 처음 참석했다. 인터넷이 정보의 보편화와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는 분명 기여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정부가 아주 쉽게 음모를 조작할 수 있고, 선거 결과까지 바꿀 수 있는 첨단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몹시 두려웠다.
집회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 그 넓은 광장에 소수의 한국 청년들이 외로운 집회를 하게 되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그들이 덜 외롭도록 나라도 참석해야겠다 싶어 나갔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했고, 앰프며 마이크, 노래, 현수막 등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진 번듯한 집회가 마련되었다. 감격스러웠다. 기쁜 마음으로 집회를 함께하며 그동안 억눌리기만 했던 분노의 심정을 같이 표출할 수 있었다."
- 당신은 좌파인가?
"좌파라고 해도 반감은 없지만, 어찌 보면 우파일 수도 있는 사람이다. 나는 과거로의 회귀성이 강한 사람이다. 라틴어, 희랍어로 남겨진 유산들을 충분히 섭렵하지 못하고 떠나게 될까봐 조바심이 난다. 동시에 나는 항상 걸어가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규정하고 우파를 적으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우파에 장점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찾아서 본받고 싶을 뿐이지 좌파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그들을 적으로 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 박정희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파리에서 듣고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기쁨과 비장함이 동시에 심장을 관통했다. 하필 그 자리에 조선의 마지막 왕세자비인 이방자 여사도 함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웨이터에게 샴페인을 주문해 함께한 좌중에게 샴페인을 들자고 청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행동을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박정희 집권 중 우리는 한 번도 정상적인 대통령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박정희는 한국의 과속성장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선전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사람들의 저력이다. 때가 되면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펼쳐질 수도, 좀 아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역사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을 거부했고, 새로운 장이 펼쳐질 가능성을 혼자 차단하려고 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암살이라는 방식으로라도 독재가 종식된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그의 딸이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차지했다. 이제 어찌해야 할까.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철저히 감시할 때에만 제대로 작동한다. 지금은 역사의 후진이 눈물겹게 안타깝지만, 비록 더딜지언정 역사가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한국은 교육열이 높고, 진보를 향한 열망에 힘입어 눈부시게 성장해왔다.
나는 밥 한 그릇의 무게에 매번 감동한다. 4~5년 동안 한 끼도 먹을 수 없었던 쌀밥 한 그릇을 지금은 하루에 두 번씩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장엄한 의미로 다가온다. 지난 11월과 12월, 트로카 대로에서 우리가 집회를 열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내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넓고 길게 보면 민주주의가 그것을 허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70년대 상황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지금 하신 말씀 가운데 밥 한 끼 먹게 된 현실의 소중함에 대해 사람들은 같은 경험을 하고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다.
"소위 어버이연합의 노인들을 말하나 본데, 그들은 한국 반공정책의 가엾은 희생자, 반공독재의 폐인들이다. 라 보에티는 <자발적 복종>의 말미에서 결국 민중들에게 "배웁시다"라고 부르짖는다. 세상은 이렇게 역동적으로 매순간 변하는데 어떻게 고루한 사고만을 부여잡고 참여하지 않은 채 이방인을 살아갈 수 있는가."
- 결국 당신의 끊임없는 독서가 당신을 이토록 다른 지점에 놓이게 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 인생에서 최고의 책 다섯 권을 꼽아달라.
"호머의 <율리시즈와 일리아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스의 옛 시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인 레오파르디(Leopardi)의 작품들. 레오파르디는 사하라처럼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위대한 시인이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 한 권만 소개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레오파르디의 책을 고를 것이다.
예쁜 여자 다섯 명을 말하라는데 마치 내 마누라까지 내놓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알베르 카뮈. 다섯 작가를 가리긴 했지만, 이것은 내가 탐색해낸 인류의 보석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은 이 세계에서 전무후무하게 가장 큰 보석을 파낼 수 있는 광맥이다.
내가 모르는 광맥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광맥을 찾아야 한다. 자기만의 책을 찾아서 캐내야 한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다. 사기를 치기 위해서였건 음란소설을 썼건, 생각을 글자로 옮겨 적는다는 것은 굉장히 경건한 일이다. 어떤 글에서든 삶의 지혜가 될 문장이 반드시 들어 있게 마련이다. 농사를 짓기 어려운 황무지에서 땅을 잘 골라 농작물을 키워내는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일 때 비로소 좋은 글과 만날 수 있다."
심영길 선생과의 긴 인터뷰는 여기서 끝이 났다. 나는 얼마 전 그에게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을 함께 번역하자고 청한 바 있다. 알아서 기는 자들이 펼쳐놓는 역겨운 늪 속으로 더욱 깊게 빠져들어가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자발적 복종>은 적절한 일침을 던져줄 수 있는 책이다.
16세기에 쓰인 이 글을 잘 번역하려면 당시의 고전뿐 아니라 16세기 지식인들이 주로 읽던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들까지 꿰는 지식인이어야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심영길 선생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그는 내 청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번역하려면 최소 2~3주 정도는 독서의 감미로운 시간을 침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뚝심있게 대답을 기다렸고, 마침내 긍정의 답을 받아냈다. 이제 곧 그와 내가 공동으로 번역한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이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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