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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지도 않은 책 한 권 값이 무려...

[서평] 강명관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등록|2014.02.10 15:31 수정|2014.02.10 17:05

▲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책표지. ⓒ 천년의상상

'박사수'. 이 사람이 태어난 지 십여 년이다. 그토록 긴 시간을, 그는 내 컴퓨터 속 어느 한글 파일 속에서 지내오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되도록 '-기(記)'나 '-록(錄)'으로 끝나는 고풍스러운 제목으로 세상에 내고 싶은, 18세기 말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미완의 장편소설 속에서 말이다.

그는 내가 십여 년째 끌어오고 있는 한 장편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직업은 각수(刻手). 책판을 다듬어 그 위에 글자를 새겨 넣는 서책 인쇄 기술자다. 조선시대 책 문화계의 이름 없는 꽃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가 나오는 소설을 구상한 것은 애오라지 책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중세와 근대 시기의 국어를 공부하면서 그 시대에 나온 이런저런 책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상상할 수 없이 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선시대의 서사 텍스트와 막대한 분량의 산문 기록물들을 알게 되면서 당대 인쇄·출판 문화의 저력을 떠올렸다.

책 만들기가 얼마나 힘들고, 책 자체가 또 얼마나 귀한 시절이었던가 말이다. 나는 문득 책이 그려가던 한 시대의 생생한 얼굴이 얼핏 떠올랐다. '박사수'가 등장하는 소설 구상과 쓰기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주제나 의도가 너무 넓었을까, 아니면 지나친 욕심 때문에 성급하게 시작된 탓일까. 소설 쓰기는 답보와 지체와 전변(轉變)을 거듭했다. 당대의 서책 문화에 관련된 기초 자료를 모으는 일만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아내의 눈치와 노골적인 타박을 무릅 써 가며 사들인 참고 서적만도 십수 권이 넘는다. 이 책이 좀 더 일찍 나왔더라면 경험하지 않아도 됐을 일들이다.

개화기 이전 조선시대의 책 문화

그렇다. 이 책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개화기 이전 조선시대의 책 문화와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조선의 금속활자와 서울과 지방의 인쇄·출판 상황, 원고 집필에서 장정까지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과정, 책을 만든 사람들과 책값, 책 유통 방식 등의 문제가 두루 다루어진다. 책의 집적소이자 확산의 진원지인 서점과 도서관, 책의 수입과 수출 등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다. 세부 주제가 다양한 듯하지만 저자의 중심 시선은 책의 인쇄와 유통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책은 독자들에게 읽히기 위해 만들어진다. 읽히지 않는 책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만들어지고 나서도 서가에 꽂혀 있기만 한 책은 아무 존재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책을 얼마나 만들어 어떤 방식으로 세상으로 내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사소하기는커녕 한 시대의 얼굴을 축조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서책에 관한 모든 것을 국가가 전담하다시피했던 조선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책의 인쇄와 유통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의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들 문제는 그간 책 자체를 다루는 서지학이나 문헌학 관련 도서(글)에서도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 저자의 창의적인 시선과 책 저술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배경이다.

사실 저자의 이런 참신한 시도는 이미 수편의 전작들을 통해 그 진가가 대중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주먹패와 건달, 기녀 등 하류 인생들을 통해 조선시대 뒷골목의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을 그린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나, 책(독서)으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삶을 살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등이 대표적이다.

내가 보기에 저자의 새로운 시선과 기획은 특유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예를 보자.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인쇄 기술이 정평이 나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로 대변되는 우수한 인쇄 기술은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알리는 홍보지의 맨 첫 자리를 차지할 때가 많다. 일반인들의 자부심도 무척 크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서양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몇 년이 앞서는 '최초'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런데 이렇게 반문해 보자. '최초'여서 뭐가 좋았을까. 금속활자를 최초로 만들었으니, 그것으로 수없이 많은 책을 만들어 지식과 문화의 혁명을 제대로 이루어 냈을까. 이들 질문에 대해 저자는 사뭇 비판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지식의 전파와 유통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서양의 근대를 견인했던 것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 (고려의 활자 기술을 이어받은-기자 주) 조선의 금속활자는 독서인구 증가, 지식의 해방, 지식의 값싼 공급과는 상관성이 희박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금속활자가 끊임없이 운위되는 이면에는 강고한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18쪽)

저자는 '금속활자'에 대한 논의가 그보다 더 중요시되어야 할 것, 곧 '활자로 인쇄된 책' 자체를 집어삼킨다고 말한다. 금속활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책을 둘러싼 다종다양한 담론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지적이다. 저자가 금속활자를 민족문화의 화려한 꽃으로 보지 않고 조선이라는 국가 내부의 인쇄·출판이 만들어낸 역사의 일부로 읽는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시대는 국가가 인쇄·출판을 주관하던 시대였다. 중고교 국사 시간에 배운 주자소나 간경도감, 교서관 등 국가 차원의 인쇄·출판 기관들을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국가, 특히 중앙의 주자소와 교서관은 어떤 것을 출판할지 그 대상 선정부터 활자와 장인 결정까지 인쇄·출판의 전체 시스템을 일관되게 갖춘 유일한 기관이었다. 물론 지방행정기관이나 사찰, 서원 등 민간 영역에서 이루어진 출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조선시대 내내 인쇄·출판의 주류는 국가였다고 단언한다.

왜 그랬을까. 그 배경에 금속활자 자체의 한계가 자리잡고 있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조선조의 금속활자는 대다수가 한자활자였다. 한자는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이다. 한자로 쓰인 책 한 권을 만들려면 한자 수만큼이나 많은 활자가 모두 있어야 한다. 한 번 주조 때마다 10만 자를 넘기기 일쑤였다. 정조 19년(1795)의 초주정리자는 30여만 자나 된다. 이렇게 많은 활자를 금속(동)으로 만드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민간에서 감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국가가 나서서 활자를 만들고 책을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금속활자를 국가가 소유했다는 것은 바로 국가가 지식의 공급처이고 지식의 유통주체라는 의미였다. 금속활자로 어떤 책을 찍을 것인가는 오로지 왕과 관료들이 결정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다. 국가가 독점한 금속활자와 금속활자인쇄술은 오로지 극소수의 지배자-양반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금속활자를 서양사에서 거대한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촉발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등치시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지식 독점을 해체하고 중세를 붕괴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세의 질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123쪽)

이런 상황이었으니 조선시대 내내 책이 귀물 취급을 받았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저자가 드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한다. 유교 경전의 필수 텍스트인 <대학>이나 <중용>(다른 유교 경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량도 적다.)은 논 2~3마지기에서 나는 소출에 해당하는 양인 쌀 21말~28말 가격을 줘야 구할 수 있었다. 이는 머슴이 1년을 고생해서 받은 품삯으로 겨우 <대학>이나 <중용>한 권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조선 전기의 서적유통은 철저하게 관 주도

저자는 책 유통의 핵심 장소인 서점도 이와 관련된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서적유통은 철저하게 관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일반 독서 인구가 서적을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서울에서는 교서관, 지방에서는 책 출판지인 감영이었다. 하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보통 사람이 책을 구매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자가, 중종조~명종조에 서점 설치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의의 배경으로 보는 대목이다.

그렇게 해서 서점이 이른 시기부터 만들어졌을까. 그렇지 않았다. 조정에서 논의했다는 것은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인데, 왜 그런 걸까.

"우선 서적의 공급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논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서점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그곳을 채울 서적의 양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는 결국 인쇄와 출판을 국가가 독점한 탓에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그들은 분명 새로운 서적유통 구조를 원했으나 서적공급이라는 차원까지는 생각이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서적인쇄를 국가가 독점한 것이 민간 인쇄출판업의 발달을 막았고, 서적공급량을 확대하는 데도 장애물이 되었다." (395쪽)

이 책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송대에 민간 출판업자와 서적상이 등장한 뒤 청대에 이르러 북경 유리창 서점가와 같은 거대한 서적시장이 출현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약탈해 간 활자와 전적을 밑천 삼아 17세기 초~18세기 초에 서점·출판업자가 폭발적으로 생겨났다. 이들과 견줄 때,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서점이 본격화한 우리나라는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셈이다.

책은 그 존재 자체보다 인쇄와 유통이 훨씬 중요하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공식적으로 간행된 것이 20세기 들어선 뒤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전에는 오로지 인쇄에 비해 불리하고, 숱한 오해를 낳기 마련인 필사 방식으로만 유통되었다. 저자는 다산 정약용의 거대한 저작들이 당대 민중들이나 지식인 내부에서 과연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묻는다.

우리나라에 서점이 좀 더 일찍 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많은 이들이 <열하일기>나 <목민심서>와 같은 혁신적인 책들을 좀 더 쉽게 구해 읽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 조선의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 후 우리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아무 쓸 데 없는 안타까움과 아쉬움만 더해질 뿐이다.

나는 500쪽이 훌쩍 넘는 이 책을 구해 읽으면서, '박사수'가 등장하는 소설 <○○기(記)>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더 강해졌다. 세세하게 밝혀 놓은 전거와 참고문헌, 꼼꼼하게 정리해 둔 다채로운 사례들은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 틀림없다. 책 마디마디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묵직한 사유도 우둔한 내게 많은 영감과 아이디어의 원천이 될 듯하다. 다만 부족한 능력 탓으로 소설 탈고가 언제쯤에나 가능할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강명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 1. 6 | 547쪽 | 25,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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