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돈방석, 정말 있구나
장석(裝錫) 전문박물관, 경남 진주향토민속관
검은 벽돌담에 검은 기와를 얹은 3층 건물. 좁다란 경사진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주위에도 온갖 것들이 봐달라고 손짓했다. 2층 문을 열면 주렁주렁 매달린 바가지들이 눈에 꽉 찼다. 정신 차려 천장에 매달린 바가지들 아래로 눈길을 돌리면 청동과 백동의 쇠붙이들이 희미한 조명빛 아래 빛났다. 비좁은 공간에 각종 전통 가구 장식에 쓰인 장석(裝錫)들로 숨이 막혔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태정민속박물관'은 그러했다.
하늘이 찌뿌둥한 9일, 경남 진주시 진주성 촉석문 앞 형평운동기념탑을 찾았다. 기념탑 옆에 진주관광센터. 진주의 명산품 비단을 소개하는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수십 년 전 좁다란 계단을 올랐던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올라가는 계단 중단에 2층농이 있다. 이곳이 국내 유일이자 세계 유일의 장석전문박물관으로 가는 길이다.
문 밀고 들어섰다. 이번에는 바가지가 없다. 숨 막힐 듯 압도하던 장석들도 이제는 관람하기 쉽게 널찍하게 뒤로 물러나 있다. 유리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고. 넓어진 공간 때문만은 아니다.
어릴 적에는 그저 쉽게 모을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에 함부로 버려질 보잘 것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40년의 시간을 보낸 뒤에 배웠다. 이제야 장롱에 붙은 장석이 눈에 하나둘 들어온다. 장석들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1 전시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으로 관람을 시작해 오른편으로 한 바퀴 돌면 붙어 있는 제2 전시실까지 구경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석이 주인공이다.
장석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고대부터 사용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일반 서민들이 목가구에 장석을 사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선시대 17~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지배계급들의 전유물이었다.
서민들이 목가구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난 뒤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서민들도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산에서 나무를 구해 목가구를 만들 수 있지만 목가구에 붙이는 장석을 제작하기에는 서민들의 경제력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물관 내 장석들도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다.
장석 재료는 무쇠라고 부르는 '거멍쇠'를 비롯 청동·황동·백동이 있다. 장석의 재료로 가장 먼저 사용한 거멍쇠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널리 이용했다. 청동으로 만든 장석은 중세인 고려시대에만 나타나는데 아쉽게도 여기 박물관에는 없다. 백동이 가장 나중에 사용되어 박물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다.
주인공 장석 틈새로 조연들이 발걸음을 불러 세우기도 한다. 돈방석! 태정 선생이 생전에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였다는 돈방석, 말로만 듣던 돈방석이 실제 있다. 짚으로 촘촘히 엮어 짠 돈방석은 두 겹으로 포개어 꿰매져 있다. 깔고 앉는 돈방석에는 엽전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있다. 주머니 속에 또다른 작은 주머니가 하나 더 있다. 중요한 문서나 종이돈 등을 넣은 듯하다.
장석은 경첩·들쇠·앞바탕·광두정·감잡이·자물쇠로 나뉜다. 경첩은 문을 열고 닫기 위해 만든 장식이다. 들쇠는 '들어 올리는 쇠'라는 순우리말로, 손잡이를 일컫는다. 활형·새형·물고기형·약과형·ㄷ자형·꽃무늬형가 있다. 앞바탕은 가구의 자물통을 채우는 부분에 사용되어져, 자물통으로부터 가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광두정은 머리가 넓은 못으로 가구를 제작한 후에 생기는 여백을 이용해 가구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데 있다. 감잡이는 나무가 뒤틀림을 보완하고 모서리가 외부와 부딪쳣을 때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자물쇠는 자물통·잠글쇠·열쇠로 이루어져 있다.
문자와 동식물 모양으로 가구를 꾸민다. 무병장수와 다산을 기원하는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백복자래(百福自來)와 같은 글자가 주를 이룬다. 오래 살기를 염원하는 까닭에 학·사슴·거북이과 같은 십장생이 많다. 십장생은 아니지만 물고기 장식도 많다.
또한, 자물쇠로 물고기 형태가 많다. 잘 때도 눈 뜨고 자는 물고기 습성처럼 재물을 지켜달라는 뜻이 있단다. 알 많이 낳는 물고기처럼 자손을 많이 번성시키고 재물도 늘려달라는 염원도 있다.
"나 여기 고전의 숲에 왔네. / 조선의 은밀한 빗장을 열고/ 이 무기교의 기교/ 은근한 곡선의 찬란한 청동의 녹속에 / 얼비춰흐르는 선조의 맥박이여/"
예전에 태정민속박물관을 찾은 정목일 수필가처럼 조선의 은밀한 빗장을 열고 선조의 맥박을 느꼈다. 또한, 한 사내의 고집스런 집념의 결과물을 열정이라는 단어로 느꼈다.
선생은 어려서 함양을 떠나 진주로 왔다고 한다. 밤에는 야학교를 다녔고 낮에는 아이스케키(아이스크림)며 찹쌀떡를 팔았다 한다. 13살 때 진주제3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0리 배달요금으로 10전(당시 비빔밥 한 그릇 정도의 값)을 받는 '별사배달원'을 하기도 했다. 일제 때 징용으로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 탈출했다. 일본에서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고철을 운반하는 중노동을 하다 해방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진주시내에 양화점을 연 선생이 장석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53년. 한국전쟁 와중에 세간을 다 불태우고 장롱 하나 장만할까 하던 중에 엿장수의 지게 위에 놓인 경첩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엿장수 지게에 있던 장석을 보는 순간 너무 아름다워 한 벌을 200원에 샀다. 그러나 사들인 장석 한 벌이 농 한짝에 붙이기에 모자라는 것임을 알고 모자라는 다른 한 벌을 채우기 위해 장석 수집에 나섰다.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것이 20만점이 넘게 됐다고 한다.
박물관의 주인공은 장석이지만 전시된 쇠붙이 장석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고(故) 태정(苔井) 김창문(金昌文)선생이다. 1923년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구두수선공으로 번 돈으로 평생에 걸쳐 수집한 옛 가구 장석류와 자물쇠 등 9 만여 점을 경남 진주시에 기증해 현재에 이른다. 선생이 아니었으면 그저 고물로 버려질 문화재였다.
"저는 죽어서도 천당갈 것입니다. 이 장석이나 생활도구들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천대 받던 장인들이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의 한과 억울함이 배어 있는 물건들이지요. 이런 유물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구경까지 시키고 있으니 이들이 저에게 많은 복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살아생전 말씀처럼 아마도 천당에서도 장석을 수집하고 계실지 궁금하다. 바가지는 없다. 다만, 한 사내의 열정을 고스란히 구경했다.
▲ 경남 진주시 진주성 촉석문 앞 진주관광센터 2층에 장석전문박물관<진주향토민속관>이 자리잡고 있다. ⓒ 김종신
하늘이 찌뿌둥한 9일, 경남 진주시 진주성 촉석문 앞 형평운동기념탑을 찾았다. 기념탑 옆에 진주관광센터. 진주의 명산품 비단을 소개하는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수십 년 전 좁다란 계단을 올랐던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올라가는 계단 중단에 2층농이 있다. 이곳이 국내 유일이자 세계 유일의 장석전문박물관으로 가는 길이다.
문 밀고 들어섰다. 이번에는 바가지가 없다. 숨 막힐 듯 압도하던 장석들도 이제는 관람하기 쉽게 널찍하게 뒤로 물러나 있다. 유리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고. 넓어진 공간 때문만은 아니다.
어릴 적에는 그저 쉽게 모을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에 함부로 버려질 보잘 것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40년의 시간을 보낸 뒤에 배웠다. 이제야 장롱에 붙은 장석이 눈에 하나둘 들어온다. 장석들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1 전시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으로 관람을 시작해 오른편으로 한 바퀴 돌면 붙어 있는 제2 전시실까지 구경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석이 주인공이다.
▲ 목가구들 ⓒ 김종신
장석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고대부터 사용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일반 서민들이 목가구에 장석을 사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선시대 17~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지배계급들의 전유물이었다.
서민들이 목가구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난 뒤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서민들도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산에서 나무를 구해 목가구를 만들 수 있지만 목가구에 붙이는 장석을 제작하기에는 서민들의 경제력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물관 내 장석들도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다.
장석 재료는 무쇠라고 부르는 '거멍쇠'를 비롯 청동·황동·백동이 있다. 장석의 재료로 가장 먼저 사용한 거멍쇠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널리 이용했다. 청동으로 만든 장석은 중세인 고려시대에만 나타나는데 아쉽게도 여기 박물관에는 없다. 백동이 가장 나중에 사용되어 박물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다.
▲ 짚으로 촘촘히 엮어 짠 돈방석 ⓒ 김종신
주인공 장석 틈새로 조연들이 발걸음을 불러 세우기도 한다. 돈방석! 태정 선생이 생전에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였다는 돈방석, 말로만 듣던 돈방석이 실제 있다. 짚으로 촘촘히 엮어 짠 돈방석은 두 겹으로 포개어 꿰매져 있다. 깔고 앉는 돈방석에는 엽전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있다. 주머니 속에 또다른 작은 주머니가 하나 더 있다. 중요한 문서나 종이돈 등을 넣은 듯하다.
장석은 경첩·들쇠·앞바탕·광두정·감잡이·자물쇠로 나뉜다. 경첩은 문을 열고 닫기 위해 만든 장식이다. 들쇠는 '들어 올리는 쇠'라는 순우리말로, 손잡이를 일컫는다. 활형·새형·물고기형·약과형·ㄷ자형·꽃무늬형가 있다. 앞바탕은 가구의 자물통을 채우는 부분에 사용되어져, 자물통으로부터 가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광두정은 머리가 넓은 못으로 가구를 제작한 후에 생기는 여백을 이용해 가구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데 있다. 감잡이는 나무가 뒤틀림을 보완하고 모서리가 외부와 부딪쳣을 때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자물쇠는 자물통·잠글쇠·열쇠로 이루어져 있다.
▲ 자물쇠로 물고기 형태가 많다. 잘 때도 눈 뜨고 자는 물고기 습성처럼 재물을 지켜달라는 뜻이 있단다. 알 많이 낳는 물고기처럼 자손을 많이 번성시키고 재물도 늘려달라는 염원도 있다. ⓒ 김종신
문자와 동식물 모양으로 가구를 꾸민다. 무병장수와 다산을 기원하는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백복자래(百福自來)와 같은 글자가 주를 이룬다. 오래 살기를 염원하는 까닭에 학·사슴·거북이과 같은 십장생이 많다. 십장생은 아니지만 물고기 장식도 많다.
또한, 자물쇠로 물고기 형태가 많다. 잘 때도 눈 뜨고 자는 물고기 습성처럼 재물을 지켜달라는 뜻이 있단다. 알 많이 낳는 물고기처럼 자손을 많이 번성시키고 재물도 늘려달라는 염원도 있다.
"나 여기 고전의 숲에 왔네. / 조선의 은밀한 빗장을 열고/ 이 무기교의 기교/ 은근한 곡선의 찬란한 청동의 녹속에 / 얼비춰흐르는 선조의 맥박이여/"
예전에 태정민속박물관을 찾은 정목일 수필가처럼 조선의 은밀한 빗장을 열고 선조의 맥박을 느꼈다. 또한, 한 사내의 고집스런 집념의 결과물을 열정이라는 단어로 느꼈다.
선생은 어려서 함양을 떠나 진주로 왔다고 한다. 밤에는 야학교를 다녔고 낮에는 아이스케키(아이스크림)며 찹쌀떡를 팔았다 한다. 13살 때 진주제3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0리 배달요금으로 10전(당시 비빔밥 한 그릇 정도의 값)을 받는 '별사배달원'을 하기도 했다. 일제 때 징용으로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 탈출했다. 일본에서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고철을 운반하는 중노동을 하다 해방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진주시내에 양화점을 연 선생이 장석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53년. 한국전쟁 와중에 세간을 다 불태우고 장롱 하나 장만할까 하던 중에 엿장수의 지게 위에 놓인 경첩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엿장수 지게에 있던 장석을 보는 순간 너무 아름다워 한 벌을 200원에 샀다. 그러나 사들인 장석 한 벌이 농 한짝에 붙이기에 모자라는 것임을 알고 모자라는 다른 한 벌을 채우기 위해 장석 수집에 나섰다.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것이 20만점이 넘게 됐다고 한다.
▲ 진주향토민속관 제1전시실 ⓒ 김종신
박물관의 주인공은 장석이지만 전시된 쇠붙이 장석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고(故) 태정(苔井) 김창문(金昌文)선생이다. 1923년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구두수선공으로 번 돈으로 평생에 걸쳐 수집한 옛 가구 장석류와 자물쇠 등 9 만여 점을 경남 진주시에 기증해 현재에 이른다. 선생이 아니었으면 그저 고물로 버려질 문화재였다.
"저는 죽어서도 천당갈 것입니다. 이 장석이나 생활도구들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천대 받던 장인들이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의 한과 억울함이 배어 있는 물건들이지요. 이런 유물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구경까지 시키고 있으니 이들이 저에게 많은 복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살아생전 말씀처럼 아마도 천당에서도 장석을 수집하고 계실지 궁금하다. 바가지는 없다. 다만, 한 사내의 열정을 고스란히 구경했다.
故 태정(苔井) 김창문(金昌文)선생(1923~2003) 약력 |
△1923년 경남 함양 안의면 출생. △진주 제3야학교 졸업. △진주 한빛공민학원 설립 참여와 원장 역임, △1956년부터 조선 가구장석 본격 수집. △1969년 한국 다례회 회장. △1982년 진주 '조선시대 가구장석박물관' 개관. △198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제1호). △1985년 태정민속박물관 신축 개관. △1986년 경상남도문화상 수상. △1999년 수집 민속자료 진주시 기증 후 진주향토박물관 개관. △ 2003년 노환으로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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