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내겐 너무 멋진 '동생',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시상식 참석 시말기

등록|2014.02.17 11:55 수정|2014.02.17 11:55
내 나름으로는 학교 안팎에서 교원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는 편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할 때가 많다. '문제'라고 말한 까닭이 있다. '사람'이 있어서 힘을 얻고, 그 '사람'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서다.

어리석게도(!), 노조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는 세상이 진보하는 데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고 보았다. 내게는 '사람'보다 '시스템'이 더 중요했다. '시스템'이 변하면 완고하게 자기 세계에 빠져 있던 사람들도 쉽게 변하기 마련이라는 게 내 믿음이었다. 

하지만 학교 노조 분회장으로, 지회 일꾼으로 일하면서 그런 믿음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크고 작은 변화만으로 '사람' 문제, 나아가 이 사회의 문제를 과연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까. 최근 5~6년간 지리멸렬하게 펼쳐진 정치 상황을 보면서, 혁명이 아닌 한, 아니 혁명을 통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시국선언' 정국이 뜨겁게 펼쳐지던 2009년이었다. 어느 날 출근 무렵이었다. 책상 위에 막 가방을 내려놓고 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노조 분회원 선생님 한 분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내게 전날 교원노조에서 탈퇴했다고 말했다.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러시냐'는 말을 내뱄었을 뿐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오후였다. 퇴근하려고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선생님 한 분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무슨 조화속이었을까. 서로 약속이나 했던 것일까. 그 분 역시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교원노조에서 탈퇴했다고 말했다. '그러시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예?'라는 1음절의 반문어만 약간의 떨림과 함께 나왔다.

몇 주간, 아니 그 해 내내 무력감에 빠져 지냈다. 노조 조직(?)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많은 활동가 선생님들이 징계로 해직되고 있었다. 노조원들이 더 단단히 결집해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게 내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더군다나 내게 '멘붕'을 안겨준 그 '사람'들은 평소 내가 믿고 따르던 '형'같은 이들이었다.

지난 14일부터 15일에 걸쳐 서울과 강화에 다녀왔다.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수상자 자격으로 시상식과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워크숍이 있었던 강화도 오마이스쿨에서는 서른아홉 분의 귀한 이들과 온밤을 함께 했다. 1박 2일의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 문제에 관한 나만의 화두를 푸는 데 큰 실마리를 얻었다. 첫 만남에서 내게 강렬하게 다가온 어떤 한 사람 때문이었다.

"저 동상, 엄청나게 멋져부리네"

그는 나보다 두 살이 적었다. 전남 동부 지역 방언과 억양을 멋지게 쓰는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다. 20대 중반에 결혼해서 큰 아이가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나 되었다. 큰딸이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나와 비교되었다. 솔직히 그가 조금 부러웠다.

그에게 부러운 점은 또 있었다. 그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소심한 O형인 나는 어떤 이와 첫 악수를 나누는 일을 무척 어려워한다. 어떤 표정을 보이고,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쉬이 감을 잡지 못할 때가 많다.

그와 첫 악수를 나눌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 두세 배 더 깊게 숙인 고개와, 적당한 강도로 내 손을 잡아 쥔 그 손으로 전해지던 따뜻한 온기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가 내게 보여준 눈빛과 표정만으로 나는 그가 심성이 곱고 따뜻하며 의기가 넘치는 사람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곧 그가 편안해졌다. 첫 만남의 긴장으로 생긴 마음의 빗장이 금방 사라졌다. 그는 시상식장에서 다른 이들과 흉허물 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워크숍이 끝난 뒤 이어진 뒤풀이 자리였다. 어느 때인가, 술이 불콰해진 그가 나를 '형님'으로 불렀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꺼웠는지 모른다. 그는 나보다 수 년이 앞서는 시민기자 선배였다. 나보다 결혼을 십여 년 먼저 하고 아이들을 훌쩍 키워낸 인생 선배이기도 했다. 밥벌이나 세상살이의 경험과 연륜을 따지더라도 '형님' 소리를 들을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형님'이라는 소리를 했다. 그 '형님' 소리를 듣자마자 평생을 두고 함께할 믿음직스러운 벗 하나를 얻게 되었다 확신했다. '형님'이면서도 오히려 기대고 싶은 든든한 '동생' 하나를 얻게 되었다 여겼다.

그와 나는 강남 고속터미널까지 동행했다. 표를 끊고 보니 서로 한 시간이 넘는 차이가 났다. 홀로 있게 될 내 '동생'인 그가 안쓰러웠다(?).

"워쪄. 이 성님이 한 시간 놀아줄까?"

나는 짖궂게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이 순간 살짝 빛났다.

"그래도 돼요?"
"커피, 아메에~리카노 커피 사 주면 한 시간 정도 놀아줌세. 동상, 어서 결정허소. 5, 4, 3, 2…."

그 때까지, 웃음과 고민 사이를 오가던 그의 얼굴은 적지 않은 심리적 긴장(?)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듯했다. 나는 꼭 공짜 커피(!)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그럽시다, 성님' 하고 대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몰랐기에 말이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서로 삶터를 오가며 만나자고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가 '1'을 셀 때 '그럽시다' 하고 대답했다. 매표구로 가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버스표로 바꿨다. 여유 있게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되었다!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벗'이자 '동생'인 그와 한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그와 나는 지하로 내려가 북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의 매력에 다시 푹 빠져들었다. 그는 솔직했다. 꾸밈이 없고 겸손했으며 소박했다. 낙천적이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그의 삶의 향기가 강한 힘이 되어 나를 일으켜 세우는 듯했다. 이즈음의 스산한 세상이 준 '독기'가 내 몸과 마음에서 말끔히 씻겨 나갔다.

그날 밤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은 그런 사소한(?) 정성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곤 한다는 게 평소의 내 확신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사람 읽기' 능력을 시험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도착했냐는 안부 전화였다.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형언하지 못 할 진한 감동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고마웠다. 심지어, 그가 사랑스러웠다.

오마이뉴스 덕분에 형님 같은 동생을 만나다

<오마이뉴스> 창립일은 2월 22일이다. 이번에 나와 그가 받은 상은 그 창립일을 기념해 만든 '2월22일상'이다. <오마이뉴스>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 정신을 내걸고 출범한 인터넷 종합 매체다. 수만 명의 시민기자들이 상근기자들과 함께 언론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세계 언론사상 유례 없는 언론사다. 그런 <오마이뉴스>의 창립 기념일을 기려 만든 '2월22일상'을 타게 된 것이다.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일인가.

더군다나 나는 이번에 평생을 두고 함께할 '형님' 같은 '동생'을 만났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내게 정말 큰 힘을 안겨 주었다. 앞으로 마주칠 나날의 삶을 두근거리며 기다릴 수 있도록 큰 희망을 주었다. <오마이뉴스>가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6·4지방선거에서 최후의 웃음을 짓는 이들은 누가 될까. 내란음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석기 의원이나 정당해산심판청구소송에 휘말린 통합진보당은 우리에게 어떤 뉴스를 전해 줄까. 다가오는 봄날 밀양의 할머니들은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나물을 캐는 소박한 여유나마 누릴 수 있을까. 그 모든 일들을 떠나, 쳇바퀴처럼 도는 하루하루의 '나'의 삶에 과연 어떤 '진보'가 찾아오기는 할까.

수시로 거대한 음모극이 횡행하는 대한민국이다. '내 탓' 아니면 '네 탓'만을 하며 불신과 냉소에 빠져 살아가는 수많은 '나'가 있다. 대한민국과 그 수많은 '나'들의 내일을 내다보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나'를 바꾸고 사회를 움직이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주변을 둘러보자. 평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이들에게 말을 걸자. '나'의 말을 '그들'에게 전하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들'의 생각을 차분히 살피자. 티브이 대신 책을 보고 공부도 좀 하자. 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일들을 글로 써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 보기도 하자.

그 과정에서 '나'가 바뀌고 '그들'이 변하며 세상이 움직이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운이 좋다면, 내가 멋진 그를 만난 것처럼, 그 못지 않은(?) 매력을 지닌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런 수많은 '나',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세상의 진보와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 길에 <오마이뉴스>가 함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모든 시민은 기자가 되는 세상,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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