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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정욕도 사라졌는데, 오직 이것만은...

[서평] 글쓰기 병에 걸린 어느 선비의 일상 <자저실기>

등록|2014.02.17 13:44 수정|2014.02.17 14:14
세상에, 정말 어쩌면 그 시대에 이리 자유분방하고 시시콜콜하면서도 사실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기록이자 글쓰기 버릇입니다.

심노승은 조선 후기(정조와 순조 연간)에 살던 학자이자 문인입니다. 몸은 깡마르고 허약하며, 등은 구부정하게 불룩 솟았고, 배는 펑퍼짐하게 아래로 처졌습니다. 결벽증이 있고, 성격은 급하고, 낭비벽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친절하다보니 체통을 잃고, 글과 벼슬, 정욕 중에서는 정욕이 가장 심하지만, 글짓기 병을 앓은 인물입니다.

심노승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싶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초상화를 그려보지만 어느 것도 자신과 흡사하지 않았습니다. 초상화로는 자신을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심노승은 그때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글로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위에서 서술한 심노승 모습은 그가 남긴 글, '용모' 중에서 일부입니다.

터럭 하나도 다르지 않게 글쓰기로 그려

▲ <자저실기>┃지은이 심노승┃옮긴이 안대회·김보성 외┃펴낸곳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2014.2.3┃3만 2000원 ⓒ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자저실기>는 그런 심노승이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용모뿐만이 아니라 내면적 기질, 성격, 습관, 버릇, 생각, 주변에서 보거나 듣는 이야기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정서 등을 모두 포함한 시대적 상황까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정물화 같고 서사시 같은 기록들입니다. 

터럭 하나조차도 달라서는 안 된다는 게 기록(묘사)에 대한 심노승의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라서 그런지 심노승이 남긴 글들은 자유분방하고 시시콜콜해 보이지만, 실상을 투사하고 있는 정론직필 자체입니다.

글을 쓰는 이들이 체면 때문에라도 주춤거리거나 자기검열 반응으로 나오는 게 애매모호한 표현이자 미사여구로 에두른 서술입니다. 하지만 심노승이 남긴 글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휘갈겨 쓴 일필휘지, 드러낼 것 다 드러내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평생 동안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소싯적에 글짓기를 좋아한 것, 벼슬하려는 계획, 정욕에 사로잡힌 것 세 가지 가운데 정욕이 가장 심하였다. 늙고 난 뒤에는 모든 것에 담박해 욕망이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글짓기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못하였다. 다만, 세상 물정을 이해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드디어 욕구가 사라졌다." - <자저실기> 53쪽 '글짓기 병' 중에서-

"정욕이 남보다 지나친 면이 있었다. 열네다섯 살부터 서른대여섯 살까지 거의 미친 듯 방종해 하마터면 패가망신할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기생들과 놀 때 좁은 골목이나 개구멍도 가리지 않아 남들에게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샀고, 스스로도 혹독하게 반성했으나 끝내 그만두지 못하였다. 그 정도면 정욕에 빠져 돌아오지 못할 듯했으나 끝내는 대범하게 연연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기생집에 자주 출입한다는 좋지 못한 소리는 면하지 못했으나 이는 억지로 제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생에 빠진 것은 정을 준 것에 불과하고 마음은 쉽게 동하지 않았다." - <자저실기> 61쪽 '기생집 출입' 중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붓놀림보다도 더 섬세한 글쓰기로 자신의 용모를 그려낸 심노승은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시대적 풍상들도 낱낱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과거, 정조의 승하, 지방 수령과 기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간통,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벌어지던 당파 싸움 등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 등을 생생하게 폭로합니다.

초상화보다도 더 섬세하게 그린 시대상

의리 없는 노론, 암암리에 벌어지는 벼슬청탁, 세습되고 있는 일자리 등을 고발하고,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나 사회적으로 오간 이야기들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글을 읽고 있다보면 심노승이 살고 있던 시대를 거닐고 있는 듯 연상됩니다. 실록에서는 읽을 수 없는 백성들 이야기, 야사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적나라한 사실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모습으로 생색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남구만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창계(滄溪) 임영(林泳)이 그의 아들 남학명(南鶴鳴)에게 편지를 보내 무사 한 명을 천거하였다. 며칠이 지나 다시 편지를 띄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난번 추천한 일은 공정한 마음이 부족하고 사적인 마음이 많았으니 그만두는 게 좋겠소"라고 하였다. 아! 임영과 같은 사람은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 <자저실기> 566쪽 '임영의 인사청탁' 중에서-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가 이조판서인 조현명을 속여 집안사람인 시골 진사에게 벼슬자리를 얻어주는 과정을 그린 내용은 명예욕을 이용한 처세술이자 시대를 살아가는 모순적 지혜의 한 단면입니다.

<자저실기>를 읽다 보면 200여 년 전 사회상, 심노승이 살던 정조와 순조 연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시대상이 뒷짐 진 양반의 모습으로도 그려지고, 고달픈 민초들의 모습으로도 그려지며 글짓기 병에 걸린 한 문인이 초상화보다도 더 섬세하게 그린 시대상을 실감나게 감상하게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자저실기>┃지은이 심노승┃옮긴이 안대회·김보성 외┃펴낸곳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2014.2.3┃3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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