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랄같은 거여, 미치면 안 보여"
[공모-사랑이 뭐길래] 알츠하이머 엄마와 함께 가는 사랑
아침에 일어나 휴대 전화기를 보니 카카오톡(아래 카톡) 메시지가 와 있다.
"밤샘 모퉁이에 함께 있다가 오늘 새벽 발인을 보고 바로 출근을 했어. 일하느라 장지까지는 따라가지 못했어!"
오늘(19일) 친구의 어머니가 서울 종합병원에서 발인하고 용인에 있는 장지로 가셨다. 발인을 지켜본 친구가 지방에 있는 내게 상황을 문자로 알려주었다. 9년간의 투병이었지만, 발병 이전에도 아파서 수술했기에 그때부터 확진 기간까지 합하면 십오 년 남짓 된다.
엄마 병간호 위해 결혼하지 않고 50대를 넘긴 친구
50대를 넘긴 친구 남매는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결혼하지 않았다. 중병이 든 엄마를 두고 결혼하여 자기들 인생을 산다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엄마를 간호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삶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12년째 엄마의 폐암과 알츠하이머 투병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매일같이 병원에 오가던 그는 출장을 가거나 취직했을 때만 재활요양원에 모시거나 동생에게 부탁하면서 하루에 한 알 십만 원하는 약값과 병원비를 매달 수백만 원을 지출하고 있다.
이 친구들의 공통점은 엄마를 향한 사랑이나 엄마가 남다르게 자식들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낳아준 부모에 대해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도리이고, 모든 것에 우선 순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늘 발인한 친구 어머니의 초상은 사람들이 '호상'이라고 불러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간 고생했던 친구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12년째 엄마의 투병을 함께 하는 다른 친구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를 찾는다는 간병요양사의 연락을 받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때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 한 사람인 엄마만 손잡은 그 친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네가 부러워! 엄마의 얼굴을 만질 수 있고 껴안을 수 있잖아!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그저 나는 엄마가 육신의 큰 고통만 없다면 살아만 있어주면 참 고맙겠어!"
치매 어르신에게 사랑에 대해 물었더니...
예전에 치매 어르신에게 서예 치료를 했을 때, 나는 그분들에게 질문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괄호 안에 그림으로 또는 글로 써 봐주세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정직한 것!"
"거머리여! 한 번 붙으면 안 떨어징께."
"지랄 같은 거다. 한 번 미치면 아무것도 안 보여!"
"손주의 웃음."
"그리움."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이라고 말한 어르신은 농사를 지었으며, '거머리'라고 하신 어르신은 남편의 집착과 의처증으로 힘든 삶을 사셨다. '지랄'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동네에서 바람난 사랑을 보았다며 자세히 말하지 않으셨다. '손주의 웃음'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손주를 생각하면서 해맑게 아이처럼 웃는다. '그리움'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20대에 남편과 사별하셨다.
나에게 '사랑이 뭐길래'라고 묻는다면 베어도 베어도 다시 자라나는 잡초 같은 질긴 모정 같은 것이 아닐까 라고 답하겠다. 주어도 주어도 아깝지가 않고, 퍼내고 퍼내도 다시 고이는 샘물 같기도 하다. 전시회를 계기로 다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나 또한 엄마가 혈액암에 걸려 몇 년 동안 아프실 때 강남성모병원과 강화도에서 요양하는 곳으로 매주 찾아갔다. 그때 각각 네 시간 반씩, 왕복 아홉 시간을 운전하며 다니는 길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보 운전이었던 그때 경부에서 한남, 올림픽대로와 경인고속도로를 거쳐 강화도의 캄캄한 철조망이 처진 해변국도와 지그재그의 산비탈 길을 운전해서 가는 길도 무서움보다는 무사히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했다.
초보 운전으로 왕복 아홉 시간 거리 다녀도
왜냐하면 나를 알아보고 웃어주신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 엄마는 나를 백 배 이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나는 힘이 났다. 아무리 깊은 밤에 도착해도 엄마는 내 손을 꼬옥 잡고 내 얼굴을 만져 주셨다.
그랬던 엄마처럼, 나도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딸들이 손을 내밀면 언제든지 덥석 잡아준다. 큰 아이가 아파서 학교를 휴학했을 때, 나는 세상만사 모든 것을 제쳐놓고 아이의 병간호에 집중했다. 그 덕분에 아이는 빨리 쾌유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집중하여 간호하고, 체온을 나누며 밥을 함께 먹는 그 순간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하다.
지금 와서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좀 더 자주 엄마를 찾아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단 사흘이라도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올 것을... 그런 생각으로 나는 내 딸들에게 자주 여행을 가자고 한다. 큰 아이가 힘든 일을 당하면 위로여행이 되고, 작은 아이가 졸업하면 졸업여행이다. 여행경비는 세 모녀가 분담하기에 별로 부담이 없다. 사랑은 대단한 것 같지만, 기실은 대단하지 않은 순간을 공유하는 그러한 간단함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친구는 엄마가 특별히 잘해준 것이 없었더라도, 엄마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혼도 안 하고 그렇게 엄마와 함께 살아간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발인한 친구에게는 좋은 인연이 생기면 좋겠다. 그리고 아직도 십수 년째 엄마와 함께 투병하고, 시간이 갈수록 알츠하이머가 깊어져서 자기를 영영 못 알아보는 엄마와 함께 살아갈 생각에 아득하기만 친구에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참 잘하고 있어! 존경스러울 정도로... 넌 최고의 사랑을 하고 있어!"
"밤샘 모퉁이에 함께 있다가 오늘 새벽 발인을 보고 바로 출근을 했어. 일하느라 장지까지는 따라가지 못했어!"
오늘(19일) 친구의 어머니가 서울 종합병원에서 발인하고 용인에 있는 장지로 가셨다. 발인을 지켜본 친구가 지방에 있는 내게 상황을 문자로 알려주었다. 9년간의 투병이었지만, 발병 이전에도 아파서 수술했기에 그때부터 확진 기간까지 합하면 십오 년 남짓 된다.
엄마 병간호 위해 결혼하지 않고 50대를 넘긴 친구
▲ 영화 <매일 알츠하이머>중에서... 엄마와 딸의 다정한 모습이 담긴 장면. ⓒ <매일 알츠하이머>
50대를 넘긴 친구 남매는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결혼하지 않았다. 중병이 든 엄마를 두고 결혼하여 자기들 인생을 산다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엄마를 간호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삶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12년째 엄마의 폐암과 알츠하이머 투병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매일같이 병원에 오가던 그는 출장을 가거나 취직했을 때만 재활요양원에 모시거나 동생에게 부탁하면서 하루에 한 알 십만 원하는 약값과 병원비를 매달 수백만 원을 지출하고 있다.
이 친구들의 공통점은 엄마를 향한 사랑이나 엄마가 남다르게 자식들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낳아준 부모에 대해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도리이고, 모든 것에 우선 순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늘 발인한 친구 어머니의 초상은 사람들이 '호상'이라고 불러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간 고생했던 친구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12년째 엄마의 투병을 함께 하는 다른 친구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를 찾는다는 간병요양사의 연락을 받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때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 한 사람인 엄마만 손잡은 그 친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네가 부러워! 엄마의 얼굴을 만질 수 있고 껴안을 수 있잖아!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그저 나는 엄마가 육신의 큰 고통만 없다면 살아만 있어주면 참 고맙겠어!"
치매 어르신에게 사랑에 대해 물었더니...
예전에 치매 어르신에게 서예 치료를 했을 때, 나는 그분들에게 질문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괄호 안에 그림으로 또는 글로 써 봐주세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정직한 것!"
"거머리여! 한 번 붙으면 안 떨어징께."
"지랄 같은 거다. 한 번 미치면 아무것도 안 보여!"
"손주의 웃음."
"그리움."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이라고 말한 어르신은 농사를 지었으며, '거머리'라고 하신 어르신은 남편의 집착과 의처증으로 힘든 삶을 사셨다. '지랄'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동네에서 바람난 사랑을 보았다며 자세히 말하지 않으셨다. '손주의 웃음'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손주를 생각하면서 해맑게 아이처럼 웃는다. '그리움'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20대에 남편과 사별하셨다.
나에게 '사랑이 뭐길래'라고 묻는다면 베어도 베어도 다시 자라나는 잡초 같은 질긴 모정 같은 것이 아닐까 라고 답하겠다. 주어도 주어도 아깝지가 않고, 퍼내고 퍼내도 다시 고이는 샘물 같기도 하다. 전시회를 계기로 다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나 또한 엄마가 혈액암에 걸려 몇 년 동안 아프실 때 강남성모병원과 강화도에서 요양하는 곳으로 매주 찾아갔다. 그때 각각 네 시간 반씩, 왕복 아홉 시간을 운전하며 다니는 길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보 운전이었던 그때 경부에서 한남, 올림픽대로와 경인고속도로를 거쳐 강화도의 캄캄한 철조망이 처진 해변국도와 지그재그의 산비탈 길을 운전해서 가는 길도 무서움보다는 무사히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했다.
초보 운전으로 왕복 아홉 시간 거리 다녀도
왜냐하면 나를 알아보고 웃어주신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 엄마는 나를 백 배 이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나는 힘이 났다. 아무리 깊은 밤에 도착해도 엄마는 내 손을 꼬옥 잡고 내 얼굴을 만져 주셨다.
그랬던 엄마처럼, 나도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딸들이 손을 내밀면 언제든지 덥석 잡아준다. 큰 아이가 아파서 학교를 휴학했을 때, 나는 세상만사 모든 것을 제쳐놓고 아이의 병간호에 집중했다. 그 덕분에 아이는 빨리 쾌유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집중하여 간호하고, 체온을 나누며 밥을 함께 먹는 그 순간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하다.
지금 와서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좀 더 자주 엄마를 찾아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단 사흘이라도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올 것을... 그런 생각으로 나는 내 딸들에게 자주 여행을 가자고 한다. 큰 아이가 힘든 일을 당하면 위로여행이 되고, 작은 아이가 졸업하면 졸업여행이다. 여행경비는 세 모녀가 분담하기에 별로 부담이 없다. 사랑은 대단한 것 같지만, 기실은 대단하지 않은 순간을 공유하는 그러한 간단함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친구는 엄마가 특별히 잘해준 것이 없었더라도, 엄마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혼도 안 하고 그렇게 엄마와 함께 살아간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발인한 친구에게는 좋은 인연이 생기면 좋겠다. 그리고 아직도 십수 년째 엄마와 함께 투병하고, 시간이 갈수록 알츠하이머가 깊어져서 자기를 영영 못 알아보는 엄마와 함께 살아갈 생각에 아득하기만 친구에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참 잘하고 있어! 존경스러울 정도로... 넌 최고의 사랑을 하고 있어!"
덧붙이는 글
주제 사랑이 뭐길래 .관한 공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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