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중학생 3분의 2는 미쳤다?
[서평] '엄숙한 꼰대 열받은 10대' <18세상>
"3분의 2는 미쳤다고 봐야지."
그가 내뱉은 강력한 첫 마디였다. 지난해 말, 몇몇 동료들과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마시던 중이었다. 그는 중학교 근무 경력이 꽤 되는 또래 동료 교사였다. 그 직전 해에도 중학교로 발령이 났다가 고등학교에 와 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중학교 근무 경력이 전혀 없었다. 긴가민가 하기는 했지만, '3분의 2는 미쳤다'는 그의 말이 강한 충격을 준 것만은 분명했다.
"그 정도야?"
"그렇다니까. 정 선생이 중학교에 가게 되면 아마 적응하기 힘들 걸. 순한 성격에 아이들 잡기 어려울 거야."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허세 쩌는' 중학생들에 대해 상당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와 15년을 있었으니, 다음 해에는 중학교 근무를 할 수도 있겠다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언제가 되었든 이른바 '중2병'에 걸린 아이들과 함께 한 교실에서 지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게 혀를 차듯 말하는 그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다 같은 아이들인데 어려울 게 뭐냐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에 말이다. 그가 교사로서의 내 역량(?)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축약어),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그런 말 안 하는 게 좋겠네. 아이들 상대하는 일 한두 번 하는가. 얘들 똑같지 뭐."
정색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쏘았다. 분위기가 일순 서늘해졌다. 내 마음도 굳어지긴 마찬가지였다. 대다수가 '미쳤다'는 그 아이들을 나는 과연 별 탈 없이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평생 '중2병'의 시달림을 받았다는 저자가 쓴 책
제목부터 '과격한' <18세상>을 읽었다. "평생 '중2병'의 시달림을 받았"다는 저자가 쓴 책이다.
책의 모태는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에 연재된 칼럼 글 '김성윤의 18세상'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역설투성이"인 청소년 문화(를 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듯하다.
청소년 문화의 새로운 요소를 알고 싶다면서 낡은 인식틀을 들이대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나는 그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라는 기만은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결박시킬 뿐이다. 이 또한 18세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온갖 역설들로 꼬여 있는데 그 암호를 풀어내는 독법은 오히려 그 같은 역설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더러 사실상 문제를 봉합하고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13쪽, '들어가며'에서)
제목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8세상'은 청소년 인권운동가들이 만 18세 미만의 역설적인 인권현실을 꼬집기 위해 만든 표현이라고 한다. 저자가 이 표현을 빌려 역설로 가득 찬 세상을 조롱하려고 마음 먹은 배경이다.
저자가 보기에, '18'소리가 절로 나오는 '18세상', 곧 10대들의 세계는 온갖 '불편한 진실'들로 가득 차 있다. 몸과 정신이 성인 못지않은 10대들은 미성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침해당할 때가 많다. 성장을 돕는다는 가족과 학교는 사실상 속박만 일삼는다. 10대를 억압함으로써 우리네 사회 체계가 유지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전혀 공감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ADHD는 허구적인 질병의 대표 사례"
'주의력결핍 및 과잉행동장애'로 번역되는 'ADHD'는 모두가 한두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말이다. 이 말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2000년대 중반경쯤이 아닌가 한다. 그 사이 ADHD는 10대 문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ADHD는 청소년 문제를 살피는 글과 강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런데 ADHD는 10대들의 자화상을 온전히 잘 보여 줄까. 퀴즈 하나를 풀어 보자. 1974년에 우리나라 고혈압 환자가 갑자기 3배가 늘었다. 2003년에는 10배가 급증했다. 이유가 뭐였을까. 한국인의 식습관이 급격하게 변하고, 건강관리에 문제가 생겨서일까.
저자가 내놓는 대답은 허를 찌른다. 낮아진 고혈압 기준치 때문이었다. 수축기와 이완기 각각 '160, 100 이상'이던 기준치가 1974년에는 '140, 90'으로, 2003년에는 '130, 85'로 바뀐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멀쩡했던 사람이 스스로를 환자로 여겨 자기 존중감이 떨어지거나 평생 약을 달고 살게 된다. 질병의 탄생과 관련해 저자가 '배후세력'을 의심하게 되었다면서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다.
저자는 ADHD 문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분석한다. 이 책에는 모두 18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ADHD 체크리스트가 소개되어 있다(207~208쪽 참조). 테스트 결과 저자는 주의력결핍장애가 특히 심한 ADHD에 해당했다. 저자의 주변 사람들 중에서도 ADHD가 아닌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고 한다.
평소 ADHD라는 말이 남용되는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그런데도 저자를 포함해 멀쩡하게(?) 사회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어른들이 ADHD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는 말은 놀랍기만 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ADHD의 창시자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2012년 독일 <슈피겔(Der Spiegel)>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ADHD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레온 아이젠버그(Leon Eisenberg)가 죽기 7개월 전 "ADHD는 허구적인 질병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는 ADHD라는 질병을 만든 대가로 제약회사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펀드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209쪽)
저자는 제약회사가 왜 그에게 돈을 줬을까 하고 반문한다. 뻔하지 않은가. 전문가들에 의해 질병이 만들어지면 새 환자가 생겨나니 제약회사가 약물치료 등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처럼 조금 산만한 사람조차 금세 (ADHD) 환자가 돼버리는 근본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ADHD의 유행(?) 덕분일까. 지금 학교에는 아이들이 조금만 산만해지거나 삐딱한 짓을 해도 금방 ADHD로 확신하는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부모들은 공부 안 하고 나쁜(?) 친구를 만나는 자녀들을 보며 'ADHD 때문이겠지'라고 지레 진단해 버린다. 덕분에 신경정신과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10대 특유의 '불안'과 '불만'조차도 '우울'로 대체하는데, ADHD로 대변되는 청소년 우울증 담론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모든 문제는 '우리(사회, 어른)'에게 있는 게 아니라 미성숙하고 자아정체성이 덜 확립된 '너희(10대)'에게 있다는 담론도 청소년 우울증 담론의 힘 덕택이라고 분석한다.
청소년 우울증 담론이 은폐하는 '불편한 진실'
청소년 우울증 담론은 학교와 교사, 부모들이 만들어 놓은 '불편한 진실'을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저자는 청소년들이 미성숙해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말한다. 아프지 않고 아플 필요도 없는 10대들이 아파야만 한다고 말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청소년들이 우울하기 때문에 우울증 진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 필요하기 때문에 10대들이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즉,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10대들의 잠재화된 정치성이나 창조성을 우울증이나 ADHD라는 언어로써 축소하고 변환시켜버린다. 공부로 인해 로봇이 된 기분이 든다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마땅히 책을 찢어버리고 책상을 밟고 일어나 시를 노래하라고 권유할 만도 한데, 수다를 떨든 운동을 하든(물론 따뜻한 말로) 로봇이 되어 견디라고 '재-요구'하는 것이다. (215쪽)
저자는 '청소년+정치'의 세 가지 쟁점을 살피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보호론'의 모순(보호한다면서 실제로는 억압하고 착취함), '문제론'의 역설(가령 사회 전체의 문제를 청소년 문제로 슬그머니 갈아 끼우는 것), '운동론'의 아이러니(청소년 정치에 뛰어들더라도 기성세대가 쳐놓은 문법에 지배될 수밖에 없는 현실, 또는 적대의 과녁이 상실되고 내부정치마저도 순조롭지 않게 된 것) 등이 그것이다.
이들 쟁점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자는 쟁점들의 뇌관을 건드릴 수 있는 '새로운 오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체계를 횡단하는 반(反) 체계의 상상력을 강조한다. 그 '반 체계의 상상력'을 상상하는 일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한 교실에 있는 중학생의 '3분의 2가 미쳤다'는 동료 교사 말을 듣고 설마 그러랴 싶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미쳐' 날뛰며 돌아다니더라도 그게 어디 온전히 그들만의 탓이겠는가 말이다. 이른바 'ADHD의 정치경제학'으로 부를 만한 저자의 진단과 분석을 보면서 그때의 내 판단이 그르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신한 이유다.
10대를 온전히 껴안으려는 어른들의 '반 체계의 상상'도 이런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당장 구체적인 답이나 해법은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문제의 원인의 전부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 사회와 어른이) '자인'하는 것 말이다. 10대들을 단지 '학생'으로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복 입은 '시민'으로 보려는 의도적인 시선도 매우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18세상>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4. 1. 30. | 300쪽 | 15,000원)
그가 내뱉은 강력한 첫 마디였다. 지난해 말, 몇몇 동료들과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마시던 중이었다. 그는 중학교 근무 경력이 꽤 되는 또래 동료 교사였다. 그 직전 해에도 중학교로 발령이 났다가 고등학교에 와 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중학교 근무 경력이 전혀 없었다. 긴가민가 하기는 했지만, '3분의 2는 미쳤다'는 그의 말이 강한 충격을 준 것만은 분명했다.
"그 정도야?"
"그렇다니까. 정 선생이 중학교에 가게 되면 아마 적응하기 힘들 걸. 순한 성격에 아이들 잡기 어려울 거야."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허세 쩌는' 중학생들에 대해 상당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와 15년을 있었으니, 다음 해에는 중학교 근무를 할 수도 있겠다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언제가 되었든 이른바 '중2병'에 걸린 아이들과 함께 한 교실에서 지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게 혀를 차듯 말하는 그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다 같은 아이들인데 어려울 게 뭐냐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에 말이다. 그가 교사로서의 내 역량(?)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축약어),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그런 말 안 하는 게 좋겠네. 아이들 상대하는 일 한두 번 하는가. 얘들 똑같지 뭐."
정색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쏘았다. 분위기가 일순 서늘해졌다. 내 마음도 굳어지긴 마찬가지였다. 대다수가 '미쳤다'는 그 아이들을 나는 과연 별 탈 없이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평생 '중2병'의 시달림을 받았다는 저자가 쓴 책
▲ 김성윤의 <18세상> 표지. ⓒ 북인더갭
책의 모태는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에 연재된 칼럼 글 '김성윤의 18세상'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역설투성이"인 청소년 문화(를 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듯하다.
청소년 문화의 새로운 요소를 알고 싶다면서 낡은 인식틀을 들이대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나는 그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라는 기만은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결박시킬 뿐이다. 이 또한 18세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온갖 역설들로 꼬여 있는데 그 암호를 풀어내는 독법은 오히려 그 같은 역설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더러 사실상 문제를 봉합하고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13쪽, '들어가며'에서)
제목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8세상'은 청소년 인권운동가들이 만 18세 미만의 역설적인 인권현실을 꼬집기 위해 만든 표현이라고 한다. 저자가 이 표현을 빌려 역설로 가득 찬 세상을 조롱하려고 마음 먹은 배경이다.
저자가 보기에, '18'소리가 절로 나오는 '18세상', 곧 10대들의 세계는 온갖 '불편한 진실'들로 가득 차 있다. 몸과 정신이 성인 못지않은 10대들은 미성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침해당할 때가 많다. 성장을 돕는다는 가족과 학교는 사실상 속박만 일삼는다. 10대를 억압함으로써 우리네 사회 체계가 유지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전혀 공감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ADHD는 허구적인 질병의 대표 사례"
'주의력결핍 및 과잉행동장애'로 번역되는 'ADHD'는 모두가 한두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말이다. 이 말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2000년대 중반경쯤이 아닌가 한다. 그 사이 ADHD는 10대 문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ADHD는 청소년 문제를 살피는 글과 강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런데 ADHD는 10대들의 자화상을 온전히 잘 보여 줄까. 퀴즈 하나를 풀어 보자. 1974년에 우리나라 고혈압 환자가 갑자기 3배가 늘었다. 2003년에는 10배가 급증했다. 이유가 뭐였을까. 한국인의 식습관이 급격하게 변하고, 건강관리에 문제가 생겨서일까.
저자가 내놓는 대답은 허를 찌른다. 낮아진 고혈압 기준치 때문이었다. 수축기와 이완기 각각 '160, 100 이상'이던 기준치가 1974년에는 '140, 90'으로, 2003년에는 '130, 85'로 바뀐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멀쩡했던 사람이 스스로를 환자로 여겨 자기 존중감이 떨어지거나 평생 약을 달고 살게 된다. 질병의 탄생과 관련해 저자가 '배후세력'을 의심하게 되었다면서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다.
저자는 ADHD 문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분석한다. 이 책에는 모두 18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ADHD 체크리스트가 소개되어 있다(207~208쪽 참조). 테스트 결과 저자는 주의력결핍장애가 특히 심한 ADHD에 해당했다. 저자의 주변 사람들 중에서도 ADHD가 아닌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고 한다.
평소 ADHD라는 말이 남용되는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그런데도 저자를 포함해 멀쩡하게(?) 사회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어른들이 ADHD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는 말은 놀랍기만 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ADHD의 창시자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2012년 독일 <슈피겔(Der Spiegel)>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ADHD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레온 아이젠버그(Leon Eisenberg)가 죽기 7개월 전 "ADHD는 허구적인 질병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는 ADHD라는 질병을 만든 대가로 제약회사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펀드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209쪽)
저자는 제약회사가 왜 그에게 돈을 줬을까 하고 반문한다. 뻔하지 않은가. 전문가들에 의해 질병이 만들어지면 새 환자가 생겨나니 제약회사가 약물치료 등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처럼 조금 산만한 사람조차 금세 (ADHD) 환자가 돼버리는 근본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ADHD의 유행(?) 덕분일까. 지금 학교에는 아이들이 조금만 산만해지거나 삐딱한 짓을 해도 금방 ADHD로 확신하는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부모들은 공부 안 하고 나쁜(?) 친구를 만나는 자녀들을 보며 'ADHD 때문이겠지'라고 지레 진단해 버린다. 덕분에 신경정신과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10대 특유의 '불안'과 '불만'조차도 '우울'로 대체하는데, ADHD로 대변되는 청소년 우울증 담론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모든 문제는 '우리(사회, 어른)'에게 있는 게 아니라 미성숙하고 자아정체성이 덜 확립된 '너희(10대)'에게 있다는 담론도 청소년 우울증 담론의 힘 덕택이라고 분석한다.
청소년 우울증 담론이 은폐하는 '불편한 진실'
청소년 우울증 담론은 학교와 교사, 부모들이 만들어 놓은 '불편한 진실'을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저자는 청소년들이 미성숙해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말한다. 아프지 않고 아플 필요도 없는 10대들이 아파야만 한다고 말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청소년들이 우울하기 때문에 우울증 진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 필요하기 때문에 10대들이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즉,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10대들의 잠재화된 정치성이나 창조성을 우울증이나 ADHD라는 언어로써 축소하고 변환시켜버린다. 공부로 인해 로봇이 된 기분이 든다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마땅히 책을 찢어버리고 책상을 밟고 일어나 시를 노래하라고 권유할 만도 한데, 수다를 떨든 운동을 하든(물론 따뜻한 말로) 로봇이 되어 견디라고 '재-요구'하는 것이다. (215쪽)
저자는 '청소년+정치'의 세 가지 쟁점을 살피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보호론'의 모순(보호한다면서 실제로는 억압하고 착취함), '문제론'의 역설(가령 사회 전체의 문제를 청소년 문제로 슬그머니 갈아 끼우는 것), '운동론'의 아이러니(청소년 정치에 뛰어들더라도 기성세대가 쳐놓은 문법에 지배될 수밖에 없는 현실, 또는 적대의 과녁이 상실되고 내부정치마저도 순조롭지 않게 된 것) 등이 그것이다.
이들 쟁점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자는 쟁점들의 뇌관을 건드릴 수 있는 '새로운 오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체계를 횡단하는 반(反) 체계의 상상력을 강조한다. 그 '반 체계의 상상력'을 상상하는 일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한 교실에 있는 중학생의 '3분의 2가 미쳤다'는 동료 교사 말을 듣고 설마 그러랴 싶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미쳐' 날뛰며 돌아다니더라도 그게 어디 온전히 그들만의 탓이겠는가 말이다. 이른바 'ADHD의 정치경제학'으로 부를 만한 저자의 진단과 분석을 보면서 그때의 내 판단이 그르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신한 이유다.
10대를 온전히 껴안으려는 어른들의 '반 체계의 상상'도 이런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당장 구체적인 답이나 해법은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문제의 원인의 전부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 사회와 어른이) '자인'하는 것 말이다. 10대들을 단지 '학생'으로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복 입은 '시민'으로 보려는 의도적인 시선도 매우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18세상>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4. 1. 30. | 300쪽 | 15,000원)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