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특기는 빈집 점거... 이효리씨 정말 고마워요"
[창간14주년- 인터뷰1] 돌아온 길거리 시인 송경동①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2000년 2월 22일 문 연 <오마이뉴스 >가 창간 14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누구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시민참여 저널리즘'이라는 도전이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기자라는 든든한 토양 덕분입니다. 창간 14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용산참사와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등 이땅의 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전해온 송경동 시인을 만났습니다. [편집자말]
▲ 길거리 시인 송경동은 자작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로 시집 <사소한 물음에 답함>에 수록된 '무허가'를 꼽았다. ⓒ 권우성
"제 전공이죠.(웃음) 언제 또 쫓겨날지 모르겠지만, 머리털 나고 개인 사무실을 차린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무허가 인생인데, 출세했죠. 하-하-하."
길거리 시인이 돌아왔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몬 혐의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뒤에 2년여 동안 잠잠했던 송경동 시인. 그는 1달여 전에 서울 구로 디지털단지에 사무실을 차렸다. 지난 연말에 사장이 야반도주해 텅 비어 있는 기륭전자 건물이 그의 임시 사무실. 기륭전자 고위층 임원이 썼던 4평 남짓한 독방을 쓰고 있다. 여성 노조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점거한 것이다.
"우리들의 특기는 빈집 점거"
생계비에 가까울 정도로 쥐꼬리만한 봉급이었지만 태어나서 월급을 받아본 기간이 고작 2년여밖에 안 된다는 그가 번듯한 사무공간을 갖게 된 탓일까? 지난 19일에 만난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건물 8층에 위치한 그의 방문을 여니 시야가 확 트였다. 전면 유리창으로 내려다 보니 시흥대로 위를 자동차가 질주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역시 호사스러운 삶과는 인연이 없는 길거리 시인이었다. 사무실을 한 번 휙 둘러봤다. 야반도주하다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임원의 책상 위에는 국물이 반쯤 차 있는 컵라면 용기와 노트북, 그리고 책 한권이 놓여 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으려 했는지, 책장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침낭을 깔았다. 방문 밖 40~50평 되는 사무공간은 텅 비어 있고 여성 노동자들은 입구 쪽 회의실에 농성장을 차렸다.
- 여기서 먹고 잡니까?
"먹기는 하는데, 집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 그럼 집 놔두고 왜, 여기서 자요?(웃음)
"저희들 특기가 빈집 점거 운동이잖아요.(웃음)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빈집 점거해서 1층을 갤러리로 쓰고 2층은 독립미디어센터를 만들었듯이... 지금 세입자로 들어왔습니다."
▲ 텅빈 기륭전자 사무실 한 켠에 자리잡은 송경동 시인. ⓒ 권우성
길거리 시인다운 답변이다. 송 시인에게 자작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보라고 했더니, 시집 <사소한 물음에 답함>에 수록된 '무허가'를 꼽았다. 용산 철거민 현장에서 쓴 시란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추리에서, 기륭 고공농성장에서 무단으로 텐트 치고 살아온 시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8년여 동안 무허가 인생이었다"고 말했다. 즉석에서 시낭송을 부탁했다. 아래 동영상을 클릭하면 그의 시낭송을 감상하실 수 있다.
[자작시 낭송] http://www.youtube.com/watch?v=7sJlKAE_fTQ
무허가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
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
생각해보니 작년에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
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점거하고
광장에서 불법 텐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을 두 번이나 점거해
퇴거 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
전엔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
그런 내 삶처럼
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
이 세상 전체가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시 낭송을 다 듣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 아류처럼 보인다"고 우스개로 말하니, 그는 또 웃는다.
야반도주한 사장
출소한 뒤 지난 2년여 동안 전북 남원 귀정사에 사회연대 쉼터인 인드라망을 만들면서 자신도 좀 쉬기도 했던 그가 다시 기륭전자에서 무허가 인생을 시작했다. 여성 조합원과 송 시인이 농성장을 차린 건 지난해 12월 30일 기륭전자(현 렉스엘이앤지) 최동렬 회장이 야반도주하면서부터다. 일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황당한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2005년 7월 5일 기륭전자 여성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 때로 돌아가야 한다. 핵심만 요약하면 이렇다.
당시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이 받은 월급은 최저임금보다 10원이 더 많은 64만1850원이었다. 이들은 '문자 해고' '잡담 해고'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했다. 노동부와 검찰도 불법 파견이라고 판정했지만, 불법파견에 대한 고용보장이 법조항에 없었기 때문에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파견법 철폐와 불법 파견 정규직화를 내걸고 1895일 동안 싸웠고, 결국 2010년 11월 1일 국회에서 공식 합의가 이뤄졌다. 정규직으로의 복귀가 현실화된 것이다. 단, 여성노동자들은 국내 생산라인이 없다는 이유로 유예기간을 거쳐 2013년 5월 2일부터 출근을 했다.
하지만 사측은 이후 9개월 동안 업무 배치는 물론 임금도 지급하지 않다가 12월 30일 몰래 본사이전을 했다. 그날 오전 여성 노동자들이 출근했을 때에는 대부분의 사무 집기가 빠진 상태였다. 이날부터 조합원들은 철야 농성에 돌입했고, 송 시인도 며칠 뒤에 결합했다.
눈물의 숫자
기자가 농성장을 찾아간 날 현관에는 붉은 색 숫자가 붙어 있었다.
'농성 50일째'.
3년여 전, 1895일에서 멈췄던 '눈물의 숫자'가 처음부터 다시 돌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시작된 싸움. 노조원들의 입장에서는 기막힌 일이지만, 최 회장은 시간을 벌면서 많은 것을 챙겼다. 그는 우선 사회적 협약인 조인식 때문에 법적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2008년 중국의 생산시설을 비롯해 가산동 공장부지를 매각했던 그는 2012년에는 기륭 소주공장과 신대방동 신사옥까지 매각했다. 현재 기륭전자에는 생산시설을 비롯해 고정자산이 없는 상태다.
"분노스럽죠. 국회 귀빈식당에서 정치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조인식을 가졌는데, 사측에 의해서 휴지조각이 된 거잖아요. 기륭 여성 노동자들이 근 7년을 싸우고 버티고, 사회 각계의 연대를 통해 직접 고용 전문직화라는 약속 하나를 받아낸 거거든요. 한국사회 비정규직 현실에서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기뻐했는데, 이렇게 다시 농성장을 꾸리고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참담합니다."
▲ 지난 2010년 11월 1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기륭전자 최동렬 회장과 김소연 기륭전자노조 분회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사실 기륭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도 그래요. 희망버스가 출발한 뒤 조남호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고, 국정조사도 열렸습니다. 그는 국회청문회까지 불려나갔고 24시간 생중계됐어요. 결국 한진중공업은 2011년 국회청문회 권고안에 따라 노사가 합의해 정리해고자들을 1년여 만에 현장 복귀시켰죠.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에서 잠시만 멀어지면 합의문은 휴지조각이 됐습니다. 현장복귀 4시간 만에 강제휴업이라는 딱지를 붙여 해고자들을 공장 밖으로 내쫓았어요. 그 과정에서 두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쌍용자동차 합의안도 안 지켜지고 있습니다."
송 시인은 "지하철역에서 무임승차하면, 그 징벌이 30배"라면서 "그 작은 약속하나 지키지 않았을 때에도 징벌 조항들이 있는데, 그렇게 큰 사회적 약속을 한 기업주가 무단 폐기해도 징벌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지난 2월 6일에 국회에서 이와 관련한 토론회가 열렸는데요, 3월부터 환경노동위 차원에서 공론화 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개 사업주가 사회적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민주노총이 지난해 말 집계한 주요 사업장 노조의 손해배상 청구금액은 총 938억 원에 달한다. 법원은 대체로 회사 측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송 시인도 이 문제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천문학적인 손배 액수 때문에 배달호 열사 등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헌법에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기본적 권리 투쟁인데, 민사소송으로까지 끌고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압박하는 것은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손배 소송이 노동운동 탄압의 무기가 됐어요."
그는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의 노동자 환경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모든 부분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짓밟히고 있죠. 신자유주의 자본이 죽음의 시대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걸 막고, 노동자들을 살리려는 노력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이겠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각성과 참여, 연대를 통해 무너진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이효리씨 고마워요... 김여진, 공지영, 김제동씨도요"
그가 바라는 희망의 근거는 많다. 가령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씌워진 손배가압류 47억 원이란 멍에를 사회적으로 나누어 가지려는 움직임이 그렇다. 아름다운재단이 시작한 개미스폰서에 가수 이효리씨도 참여하는 것을 보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효리씨가 고마웠습니다. 그냥 상품으로 팔리는 연예인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예술인의 자리가 그런 자리인 거 같아요. 사실 연예인들이 기획사다 뭐다해서 발이 묶여 있기도 하고, 한국 사회처럼 사회의식이 진일보하지 않은 곳에서 사회적 발언을 하기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욱 소중한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함께 지켜줬으면 합니다. 희망버스를 탈 때에도 배우 김여진씨가 연대를 해주셨습니다. 김여진씨가 흘린 눈물 한 방울이 엄청난 도움이 됐습니다. 쌍차 투쟁을 할 때에는 공지영 선배가 <의자놀이>라는 르포를 쓰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죠. 쌍차 콘서트를 두 번씩이나 해준 김제동씨도 고맙지요."
[송경동 시인이 가수 이효리씨에게] http://www.youtube.com/watch?v=BsY-dRAR-7U
다시 돌기 시작한 농성장의 숫자에 분노하는 송 시인이 그래도 미래를 낙관하는 까닭은 이런 연대의 손길 때문이다. 농성장 철거를 반대하며 포클레인 위에서 점거농성을 하다가 떨어져 중상을 입기도 했던 그는 1590일이 되었을 때 이 숫자에 공감과 연대의 시어를 입혀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 지난 2010년 10월 기륭전자앞 굴삭기위에서 농성 중인 송경동 시인. ⓒ 기륭전자 노조까페
너희는 고립되었다
가난한 인력시장에서
불법으로 언제든 살 수 있는 64만 원짜리 싼 기계들이 있었다
1년만 쓰다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는 기계들
그 기계들도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고 발개지는 볼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 여덟 시간 서 있기만 해도
돈을 벌어주는 희한한 기계들이었다
임대사용료가 터무니없이 싸고
사용 후 재처리 비용도 필요 없었다
너희는 이 희한한 임대업에 맛 들여
일상 라인에는 파견직을 못 쓰게 되어 있음에도
무려 200여대의 기계를 불법으로 빼곡히 들여놓았다
사장의 입이 기쁨에 찢어질 때,
기계들의 손발은 부르텄고 가랑이는 찢어졌다
도저히 참지 못해, 그들이
싸디 싼 비정규기계가 아닌
하자 없는 정규사람임을 외쳤을 때
너희는 본보기로 수십 대의 기계를 대책 없이 내다버렸다
불법으로 쫓겨날 수 없다고
일손을 멈추고 공장을 점거하자
너희는 용역깡패를 채용했다
무섭지 않으냐고, 겁나지 않느냐고
허리를 부숴놓겠다고 위협했다
그것이 빛 때문일까 싶어 전기를 끊었고
수도를 끊었고, 밥 주던 것을 끊었다
숨소리 하나라도 새나갈까
철문 사이사이를 틈 하나 없이 꽁꽁 메웠다
혹 그것이 꿈 때문일까 싶어
그들의 미래에 22억 원에 달하는 가압류 딱지를 붙였고
그것이 혹 총명한 지도부 몇 때문인가 싶어
경찰의 도움을 받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수억 짜리 감시카메라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지만
너희는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급기야 겁에 질린 너희들은
그들에게 공장 일부의 소유권을 넘겨주겠다고 했다
제발 너희들을 놓아달라고
사정했다 애원했다
그래도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성의 불꽃은 점점 커져
함께 모여 있으면 그들은 봉홧불처럼 거대하게 보였다
그들의 눈은 어둠속에서도
진주처럼 여물어갔고
캄캄한 공장 안에 갇혀서도
희망의 소리와 해방의 빛을 보았다
그것은 전선을 타고 오지도
녹슨 상수도관을 타고 오지도 않았다
그것은 오직 그들 마음속
한 점 각성의 빛으로 타올랐다
너희들은 아직도
무엇이 우리를 단결케 하는지
투쟁하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전사
이윤밖에 모르는 너희의 부패한 머리에
새로운 삶의 가치관을 심는 희망의 전령들
거짓 민주주의의 역사를
거리에서 새로 쓰는 역사의 새 페이지들
닳아진 사랑과 연대의 다른 이름
처음부터 다시 싸워야하는 현실이 참담하다는 송 시인은 또다시 기륭 무허가촌에서 '연대의 희망버스'를 조직하고 있다. 오는 3월15일 고공농성 150일째 되는 유성기업을 향해 희망버스가 출발한다.
기륭전자 8층 벼랑 끝에 선 시인은 또다시 꿈을 꾸고 있다.
[송경동 시인 인터뷰②] "시는 언제 쓰냐고? 기륭, 유성... 그게 다 내가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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