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3' 수양대군, 전두환의 롤모델?
[참모열전 12회: 한명회 2부] '야당' 택한 한명회의 인생역전
쿠데타 1년 전인 1452년에 한명회는 경덕궁지기였다. 경덕궁은 개성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사저였다. 요즘으로 치면 한명회는 전직 대통령 사저 관리인이었다. 그런 그가 이듬해인 1453년에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 되어 살생부를 들고 한양 경복궁에 등장했다. 개성에서 '신문'으로 뉴스를 소비하던 사람이 한양 정치의 중심부에 뛰어들어 뉴스의 초점이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1453년 이후의 역사는 승자인 수양대군(세조) 이유를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다. 그래서 역사서를 읽는 사람들은 수양대군의 승리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인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난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한명회는 왜 제3세력 수양대군을 택했을까
어떤 일이 다 끝난 뒤에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런 결과가 나올 줄 전혀 몰랐으면서도, 사건이 다 경과한 뒤에 우리는 자신이 처음부터 그런 결과를 예견했던 것처럼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처음부터 결과를 예견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기억을 자기도 모르게 조작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사후설명 편향(hindsight bias, 혹은 사후확신 편향)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후설명 편향이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에도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성사시킬 가능성이 높았던 것처럼 인식하기 쉽다. 이 때문에 우리는 쿠데타 얼마 전에 수양대군 편에 가세한 한명회가 얼마나 영리한 인물인가 하고 감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전만 해도 수양대군의 정권 장악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제3당의 영수였다. 문종이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맡기고 세상을 떠난 뒤에 정계는 김종서 중심으로 재편됐다. 김종서 쪽이 제1당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안평대군 세력이 제2당을 형성했다. 세종 임금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은 둘째인 수양대군보다 서열은 낮았지만, 인물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수양대군보다 한 수 위였다.
안평대군이 수양대군보다 강력했다는 점은 단종 1년 3월 21일자(양력 1453년 4월 29일 자) <단종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안평대군은 세상의 의심을 살 정도로 세력규합에 보통 이상의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편, 수양대군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편이었다.
안평대군이 훨씬 더 강력했다는 사실은 후세 사람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을 꺾은 지 200년 가까이 된 17세기에도 안평대군의 정치력을 높게 평가하는 문학작품이 나왔을 정도다. 그 작품은 바로 <운영전>이다.
<운영전>은 안평대군 사저에서 근무하던 운영이라는 궁녀의 비참한 최후를 다룬 작품이다. 궁녀는 왕궁뿐만 아니라 왕족의 사저에서도 근무했다. 안평대군의 사저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하나가 김 진사라는 미소년 선비였다. 운영은 김 진사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안평대군의 정치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김 진사가 안평대군의 사저에 들어왔고, 김 진사가 이곳에 들어왔기 때문에 운영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안평대군의 정치력이 운영의 죽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수양대군이 승리한 지 200년이 지난 뒤에도 안평대군의 정치력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이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안평대군이 그만큼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국가였다. 유교국가는 유교를 연구하는 선비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나라다. 선비들이 국가를 경영하려면, 주상과 세자를 제외한 왕족은 국정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이전 시대의 선비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태도로 왕족의 정치 참여를 견제했다. 그런데도 단종 시대에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라는 두 왕족이 한꺼번에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단종이 어린 왕이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다. 왕족은 원칙상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각각 제2당 및 제3당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단종의 할아버지인 세종 때문이었다.
세종은 세자인 문종을 돕게 할 목적으로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에게 국정 참여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형제들을 살육하고 정권을 잡은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은 자기의 친형이자 원래의 왕위계승권자인 양녕대군과도 잘 지냈다.
자기 자신이 형제애가 좋아서인지 세종은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형제도 사이가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 왕자가 국정에 참여해서 세자인 문종을 돕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이 훗날 화근이 되었다. 야심 많은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이를 발판으로 각각 제2당 및 제3당을 형성했다.
그런데 계유정난 이전에 조선 정계에는 슈퍼 여당이 출현했다.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정치적 파트너로 선정한 것이다. 이런 정황은 위의 <단종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보다 강력한 안평대군을 끌어들임으로써 안평대군을 통제하고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김종서-안평대군 연합이 강력한 슈퍼 여당을 형성하고 수양대군은 더욱 더 초라한 제3당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명회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그는 왜소한 제3당을 선택했다. 당시로서는 집권 가능성이 희박한 수양대군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명회의 선택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것이었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한명회의 가족들은 "가도 꼭 그런 데만 가느냐?"고 핀잔을 줬을지도 모른다.
12·12 쿠데타 닮은 김종서 제거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선택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친구인 권람이 수양대군과 친했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특채로 하위직에 들어간 한명회가 김종서나 안평대군 같은 거물과 인연을 맺기는 힘들었다. 또 김종서나 안평대군 쪽에는 이미 인재들이 많아서 한명회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었다.
조선 전기 대학자인 서거정이 지은 <사가집>에 따르면, 한명회는 권람에게 "안평대군이 임금 자리를 엿보고 있으니, 수양대군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고, 권람은 수양대군에게 "만약 대군께서 나라를 얻고자 하신다면 한명회를 꼭 얻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한명회가 수양대군 캠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쿠데타 1년 전 혹은 몇 개월 전의 일이다.
한명회가 가세한 뒤에 수양대군 캠프는 실로 전광석화 같은 방식으로 정권을 쟁취했다. 거사의 '디데이'는 단종 1년 10월 10일(1453년 11월 10일)이었다. 이날 한밤중에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집에 가서 김종서를 제거한 뒤, 경복궁으로 달려가 단종의 재가를 받아 국정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 때 전두환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압한 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재가를 받아낸 일을 연상케 하는 방식이다.
수양대군 측은 단종의 왕명을 명분으로 대신들을 한밤중에 경복궁에 소집했다. 이른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온 <대사편년>이란 역사책에 따르면, 이때 한명회는 살생부를 들고 경복궁 입구에 서 있었다. 거기서 그는 들어오는 대신들을 확인한 뒤 "살!" 혹은 "생!"을 외쳤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한밤중에 입궁한 대신들은 한명회의 한마디에 생과 사를 오갔다. 경복궁을 통과하다가 "살!"이란 외침을 들은 대신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생!"이란 소리를 들은 대신들은 그곳을 그냥 통과했다. 이로써 김종서·안평대군 세력이 무너지고 정국은 수양대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궁지기 한명회가 정권의 실세로 급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제3당을 선택한 한명회의 도박은 이렇게 성공을 거두었다.
한명회의 개인 인생사에서 보면, 경복궁에서 살생부를 펼쳐든 한명회의 행동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개성 경덕궁 입구에서 입장권을 발부하던 사람이 1년 만에 한양 경복궁 입구에서 살생부를 발부하는 사람으로 둔갑한 것이다. 물론 경덕궁지기는 궁궐 입구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궁궐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한명회의 1년 전과 1년 후를 극적으로 비교하고자 '입장권 발부'를 운운했을 뿐이다.
경복궁 입구에서 피의 살육을 주도한 한명회. 이로써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최측근 참모가 되어 조선 팔도를 쥐락펴락하는 정권 실세가 되었다. 이제 한명회의 천하가 도래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얼마 안 있어 제3의 인물이 수양대군의 최측근 참모 자리를 차고 들어온다.
이야기는 제3부로 이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1453년 이후의 역사는 승자인 수양대군(세조) 이유를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다. 그래서 역사서를 읽는 사람들은 수양대군의 승리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인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난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한명회는 왜 제3세력 수양대군을 택했을까
어떤 일이 다 끝난 뒤에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런 결과가 나올 줄 전혀 몰랐으면서도, 사건이 다 경과한 뒤에 우리는 자신이 처음부터 그런 결과를 예견했던 것처럼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처음부터 결과를 예견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기억을 자기도 모르게 조작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사후설명 편향(hindsight bias, 혹은 사후확신 편향)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후설명 편향이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에도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성사시킬 가능성이 높았던 것처럼 인식하기 쉽다. 이 때문에 우리는 쿠데타 얼마 전에 수양대군 편에 가세한 한명회가 얼마나 영리한 인물인가 하고 감탄할 수도 있다.
▲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김종서 동상. ⓒ 김종성
하지만, 계유정난 이전만 해도 수양대군의 정권 장악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제3당의 영수였다. 문종이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맡기고 세상을 떠난 뒤에 정계는 김종서 중심으로 재편됐다. 김종서 쪽이 제1당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안평대군 세력이 제2당을 형성했다. 세종 임금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은 둘째인 수양대군보다 서열은 낮았지만, 인물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수양대군보다 한 수 위였다.
안평대군이 수양대군보다 강력했다는 점은 단종 1년 3월 21일자(양력 1453년 4월 29일 자) <단종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안평대군은 세상의 의심을 살 정도로 세력규합에 보통 이상의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편, 수양대군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편이었다.
안평대군이 훨씬 더 강력했다는 사실은 후세 사람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을 꺾은 지 200년 가까이 된 17세기에도 안평대군의 정치력을 높게 평가하는 문학작품이 나왔을 정도다. 그 작품은 바로 <운영전>이다.
<운영전>은 안평대군 사저에서 근무하던 운영이라는 궁녀의 비참한 최후를 다룬 작품이다. 궁녀는 왕궁뿐만 아니라 왕족의 사저에서도 근무했다. 안평대군의 사저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하나가 김 진사라는 미소년 선비였다. 운영은 김 진사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안평대군의 정치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김 진사가 안평대군의 사저에 들어왔고, 김 진사가 이곳에 들어왔기 때문에 운영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안평대군의 정치력이 운영의 죽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수양대군이 승리한 지 200년이 지난 뒤에도 안평대군의 정치력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이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안평대군이 그만큼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국가였다. 유교국가는 유교를 연구하는 선비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나라다. 선비들이 국가를 경영하려면, 주상과 세자를 제외한 왕족은 국정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이전 시대의 선비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태도로 왕족의 정치 참여를 견제했다. 그런데도 단종 시대에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라는 두 왕족이 한꺼번에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단종이 어린 왕이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다. 왕족은 원칙상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각각 제2당 및 제3당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단종의 할아버지인 세종 때문이었다.
세종은 세자인 문종을 돕게 할 목적으로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에게 국정 참여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형제들을 살육하고 정권을 잡은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은 자기의 친형이자 원래의 왕위계승권자인 양녕대군과도 잘 지냈다.
자기 자신이 형제애가 좋아서인지 세종은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형제도 사이가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 왕자가 국정에 참여해서 세자인 문종을 돕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이 훗날 화근이 되었다. 야심 많은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이를 발판으로 각각 제2당 및 제3당을 형성했다.
그런데 계유정난 이전에 조선 정계에는 슈퍼 여당이 출현했다.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정치적 파트너로 선정한 것이다. 이런 정황은 위의 <단종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보다 강력한 안평대군을 끌어들임으로써 안평대군을 통제하고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김종서-안평대군 연합이 강력한 슈퍼 여당을 형성하고 수양대군은 더욱 더 초라한 제3당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명회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그는 왜소한 제3당을 선택했다. 당시로서는 집권 가능성이 희박한 수양대군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명회의 선택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것이었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한명회의 가족들은 "가도 꼭 그런 데만 가느냐?"고 핀잔을 줬을지도 모른다.
12·12 쿠데타 닮은 김종서 제거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선택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친구인 권람이 수양대군과 친했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특채로 하위직에 들어간 한명회가 김종서나 안평대군 같은 거물과 인연을 맺기는 힘들었다. 또 김종서나 안평대군 쪽에는 이미 인재들이 많아서 한명회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었다.
조선 전기 대학자인 서거정이 지은 <사가집>에 따르면, 한명회는 권람에게 "안평대군이 임금 자리를 엿보고 있으니, 수양대군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고, 권람은 수양대군에게 "만약 대군께서 나라를 얻고자 하신다면 한명회를 꼭 얻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한명회가 수양대군 캠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쿠데타 1년 전 혹은 몇 개월 전의 일이다.
▲ 한명회가 한밤중에 살생부를 들고 나타난 경복궁. 사진은 정문인 광화문. ⓒ 김종성
한명회가 가세한 뒤에 수양대군 캠프는 실로 전광석화 같은 방식으로 정권을 쟁취했다. 거사의 '디데이'는 단종 1년 10월 10일(1453년 11월 10일)이었다. 이날 한밤중에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집에 가서 김종서를 제거한 뒤, 경복궁으로 달려가 단종의 재가를 받아 국정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 때 전두환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압한 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재가를 받아낸 일을 연상케 하는 방식이다.
수양대군 측은 단종의 왕명을 명분으로 대신들을 한밤중에 경복궁에 소집했다. 이른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온 <대사편년>이란 역사책에 따르면, 이때 한명회는 살생부를 들고 경복궁 입구에 서 있었다. 거기서 그는 들어오는 대신들을 확인한 뒤 "살!" 혹은 "생!"을 외쳤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한밤중에 입궁한 대신들은 한명회의 한마디에 생과 사를 오갔다. 경복궁을 통과하다가 "살!"이란 외침을 들은 대신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생!"이란 소리를 들은 대신들은 그곳을 그냥 통과했다. 이로써 김종서·안평대군 세력이 무너지고 정국은 수양대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궁지기 한명회가 정권의 실세로 급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제3당을 선택한 한명회의 도박은 이렇게 성공을 거두었다.
한명회의 개인 인생사에서 보면, 경복궁에서 살생부를 펼쳐든 한명회의 행동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개성 경덕궁 입구에서 입장권을 발부하던 사람이 1년 만에 한양 경복궁 입구에서 살생부를 발부하는 사람으로 둔갑한 것이다. 물론 경덕궁지기는 궁궐 입구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궁궐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한명회의 1년 전과 1년 후를 극적으로 비교하고자 '입장권 발부'를 운운했을 뿐이다.
경복궁 입구에서 피의 살육을 주도한 한명회. 이로써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최측근 참모가 되어 조선 팔도를 쥐락펴락하는 정권 실세가 되었다. 이제 한명회의 천하가 도래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얼마 안 있어 제3의 인물이 수양대군의 최측근 참모 자리를 차고 들어온다.
이야기는 제3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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